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과 간간이 이어지는 평화의 역사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평화와 전쟁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1950년의 6. 25 전쟁 이후에 그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어느 산허리엔가 묻혀있는 전쟁 희생 용사들의 숫자가 127,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7년에 국방부 산하 기관으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이후에 해마다 수백구의 전쟁희생용사들의 유해가 발견되고 있다. 지난해인 2010년 일 년 동안에만도 1,137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올해도 6개월 동안 66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는 언론 집계가 공개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조국은 그렇게 젊음을 바쳐서 죽어간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거름이 되어 오늘 날의 이만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실비 보시에의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라는 책에 보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묘한 말을 한다. 실비 보시에는 문학을 공부한 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꾸준히 고대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며 저술활동을 해 온 인물이다. 그는 또한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비폭력이다”라고 선언한다. 그의 책에 보면 계속되는 전쟁의 역사 한 가운데서 평화를 위한 간절한 소원으로 시작된 것이 적십자 운동이며 또한 전쟁을 줄여가고 평화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된 기구가 국제연합인 U. N 이라고 언급한다.
그렇다. 평화와 전쟁 이 두 가지 틀 안에서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오늘 본문인 역대하 14장에 보면 1절에 “아사가 왕이 대신하여 왕이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년 동안 평안하니라.”고 했다. 5절에는 “나라가 그의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고 했다. 또한 7절 후반부에 보면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그렇게 평화와 평안을 이어가던 시대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 왕국 유다를 쳐들어 왔다. 마치도 우리나라의 동족 전쟁이었던 6. 25 때에 중공군 100만 명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것과 같다. 여러해 전에 중국 선교지에 갔다가 단동 지역의 중국 전쟁 기념관에 갔더니 한국의 6. 25 전쟁에 대한 사진 자료와 당시에 사용하던 무기들과 전쟁 물자들을 진열해 놓고 거대한 글씨로 “항미원조전쟁”이라고 쓴 것을 보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란 미국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란 뜻이다.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구스 사람 시삭은 어떤 인물인가. 애굽의 제 22 왕조 때의 두 번째 왕이었던 오소로콘(Osorchon) 1세 때의 군사령관이다. 이처럼 거국적인 전쟁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던 임금 아사의 기도 내용이 본문 중에 나온다. 위기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평안할 때에 그 평안을 누리지만 위기와 불안과 질병과 역경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사 임금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잘 의지하고 찾고 믿음으로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남 왕국 유다의 제 3대 임금인 아사왕은 솔로몬 왕의 증손자이다. 그러니까 다윗 왕과의 관계로는 고손자이다. 무려 41년간(B. C 910-869)이나 왕이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40년간 왕이었는데 저들보다 일 년을 더 왕으로 있었다. 아사 왕은 그의 아들 여호사밧 임금까지 합치면 66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아들 여호사밧도 25년 동안 유다를 부흥시킨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아사 왕은 할아버지 르호보암 때에 남북으로 나누어진 남 왕국 유다의 왕으로 아버지 아비야의 대를 이어 뛰어난 임금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아사 왕은 복이 많은 왕이었다. 아버지 아비야를 대신하여 왕이 된 후에 십년 동안 온 나라가 평안하였다. 아사왕은 왕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선하게 살고 정의를 행할 줄 아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역대하 14장 2절에 보면, “아사가 그의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라고 했다. 요즘 온 나라의 각 분야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실망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고 검찰청에 들락거리고 불려 다니고 하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씁쓸해 진다. 우리가 사람 보기에도 잘 해야 하지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역대하 14장 3절 이하에 보면 아사 왕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였나를 소개해 준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 버렸다. 우상의 형상인 주상이나 아세라 상을 깨트려 버리고 찍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온 유다 나라에 공포하여 “조상들이 믿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신앙 회복 운동을 벌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왕정을 펼쳤다. 전국 각처에 있는 우상 숭배지인 산당을 없애고 태양을 섬기는 태양상도 없애 버렸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아사 왕의 때에 온 나라에 평안함을 선물해 주셨다. 나라가 평안하고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전쟁도 없던 때에 임금 아사왕은 부지런히 유다 나라의 처처에 견고한 성읍들을 건축하였다. 아사 왕의 때에 나라는 평안하고 하는 일들은 형통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처처마다 성읍을 건축하고 성곽을 쌓고 망대를 세우고 견고한 문과 빗장을 만들어 달았다. 아사 임금은 국방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유다 지파 안에서만도 큰 방패와 창을 잡는 군대의 수가 30만 명이었다. 또한 베냐민 지파 안에는 작은 방패를 잡고 활을 당길 줄 아는 군대가 28만 명이나 되었다. 저들은 다 훈련되고 준비된 큰 용사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지 영원한 평화란 없는 법이다. 구스 사람인 세라가 100만 명의 군대와 병거 300대를 앞장세우고 마레사 지역으로 유다를 쳐들어 온 것이다. 병거 300대란 오늘 날로 하면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탱크 부대를 말한다. 이때에 임금 아사 왕은 도망하거나 피신하거나 숨지 않고 군대의 최전선에 나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적군과 싸울 준비를 다 마쳤다.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전열을 갖추게 한 아사 왕은 그 전쟁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도의 내용을 묵상해 보면 아사 왕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아 부르짖는 믿음의 기도.
아사 왕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던 아사 왕은 전쟁이 일어나자 더욱 다급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간구하기 시작했다.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14:11)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절박한 임금 아사의 심정과 신앙의 고백을 느껴보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도움의 원천이시라는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다.
역대하 14장에 보면 4절과 7절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 나온다. 아사 왕의 특징은 매사에 하나님을 찾는 왕이었다. 또한 그의 마음 바탕에는 우리가 늘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이 같은 장면은 역대하 15장 끝까지 이어진다. 그 세월이 무려 35년의 긴긴 세월이었다. 아사 왕은 왕이 된 후에 장장 35년간을 여호와 하나님만 찾고 의지하고 도우심을 청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신실한 믿음의 왕이었다. 5년간 계속된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이긴 후에도 700마리의 소와 7,000마리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전국적으로 강조했다. 역대하 15장 1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령할 정도였다. 온 나라의 백성들은 왕의 이 같은 신앙 개혁적인 명령을 다 좋게 받아 드렸다. 온 무리들이 큰 소리로 외쳤고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맹세하였다. 하나님은 이 같은 왕과 백성들의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고 온 나라의 사방에 다시 평안이 임했다. 성경은 이 같은 역사의 현장을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15:15)고 했다.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은 대개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 만만하고 뭐든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부하고 내가 건강 지키고 내가 직장 구하고 내가 사업하고 내가 재물관리하고 내가 집도 사고 내가 차도 사고 내가 결혼도 하고 내가 자식도 낳고 내가 뭣도 하고 뭣도 하고 모든 것의 중심이 나 자신이다.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산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란 단어조차도 없다.
그러나 임금 아사는 달랐다. 그는 전쟁 앞에서 군대의 수를 세고 병거의 수를 다시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기도의 첫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밖에는 우리를 도와 줄 분이 없으시니 지금 당장 도와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예수님의 기도에도 이런 기도의 가르침이 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는 기도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끝없는 악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수 없이 다양한 악의 환경에 방치 되어 있다. 그러한 악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 내고 가족들과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 없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려야만 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런 기도 말이다. 모든 인간은 질병과 가난과 궁핍과 우울과 각종 유혹과 거짓과 악한 습관과 중독과 다양한 싸움과 전쟁의 악 앞에 방비 없이 노출되어 있다.
아사 왕이 그렇게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청하며 항상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임금으로 지내려 하였지만 그의 어머니 마아가 태후는 신앙이 달랐다. 역대하 15장 16절 이하에 보면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 태후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인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아사 왕은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빻아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은과 금과 좋은 그릇들을 구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드리며 신실하게 살아갔다. 하나님은 그 35년 동안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안한 땅으로 남 왕국 유다를 지켜 주셨다.
그렇다. 이처럼 예배가 살아야 나라가 평안하고 섬김과 헌신이 살아나야 일상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오래도록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탁하는 믿음의 기도.
또한 아사 왕은 하나님을 잘 의지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이웃 나라와 동맹을 하고 연합군을 형성하려는 전략을 구상할 생각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절대 절명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대하14:11)
주님을 의지해야 우리가 살게 된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고 번영하고 발전하고 있다며 교만한 말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잘 되는 것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지 않고 번영하는 것은 진정한 번영이 아니다. 덩굴 식물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고 10미터도 휘 감고 올라가고 20미터도 휘 감고 올라가지 않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만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
송길원 목사의 ‘하이 패밀리’에서 보내오는 이메일의 읽을거리 중에 썰렁한 조크를 보았다. 어느 여고에 공부 잘 하는 여학생이 문제 하나를 못 풀고 끙끙거리다가 옆에 있는 친구의 답안지를 슬쩍 훔쳐보았다. 답안지에 “니체”라고 쓴 것을 잘 못 보고 ‘나체’라고 썼다. 그 공부 잘하는 아이가 답을 쓰자 그 다른 곁의 여학생이 힐끔 답을 보고 옮겨 쓴다는 것이 보고 쓴 것 표시 날까봐 응용력을 발휘하여 ‘누드’라고 썼다. 그러자 또 그 옆의 여학생이 답안지를 훔쳐보고는 같은 답을 쓰면 선생님께 표시 날까 싶어서 뜻은 같지만 다른 표현으로 쓴다는 것이 ‘알몸’이라고 썼단다. 잠시 공부 잘하는 아이 의지하려다 서로 다 낭패를 보고 만 것이다.
물론 건강과 재물과 지혜와 지식과 명예와 권력과 힘과 능력이 골고루 다 있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모든 힘과 권능의 원천은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이런 믿음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사람인 것이다. 다윗은 시편 20절 7절에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다. 다윗은 시편 25편 2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역대하 14장부터 16장까지의 아사 왕에 대한 기록을 단숨에 읽어 보면 그의 평생의 신앙 여정을 입체적으로 보게 된다. 임금이 되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을 찾던 임금 아사 왕이 41년간 왕으로 지내는 동안에 35년간 전쟁을 이기며 나라에 평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신앙이 변질 되었다. 성경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역대하 16장 1절에 보면 “아사 왕 제 삼십육 년에”라고 했다.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때 이후로 아사 왕은 나머지 남은 왕정기간인 5년 동안 신앙이 병들어가고 믿음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처 들어 오자 성전과 왕궁의 은금을 내어다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면서 원조를 요청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하나니를 아사 임금 곁으로 보내서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아람 나라의 왕을 의지하였다고 책망하셨다. 아사 왕은 회개하기는커녕 크게 화를 내면서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 날 이후로 아사 왕은 자기에게 못 마땅한 이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사 왕은 재위 39년 때 되던 해에 발에 난 병으로 위독하여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지 않고 의원들의 도움만 청하다가 죽고 말았다. 역대하 16장 12절은 그렇게 믿음이 좋던 임금 아사가 말년에 신앙이 타락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병들었을 때에조차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만 의지하던 불신앙을 고발한다.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나 지금 신앙 좋은 것 믿음이 좋은 것 자랑하면 안 된다. 앞으로도 하루하루 자신의 믿음을 지켜가지 않으면 언제 사탄이 나의 신앙을 허물어트릴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부끄러운 인생이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구하며 간구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믿음의 기도.
믿음과 기도는 항상 현재적인 것이다. 물론 과거에 이전에 기도한 기도의 힘과 은혜를 덧입는 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지금 현재 기도하는 기도의 줄을 놓치면 안 된다. 오늘 본문인 역대하 14장 11절의 끝 부분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런 멋있는 기도를 드리던 임금이 아사 왕이었다. 그와 같은 신실하고 참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100만 명의 군대가 쳐들어 온 구스의 군대를 막으셔서 적들이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고 도망가게 하셨다. 100만 명의 군대를 아사 왕의 58만 명의 군대가 추격하여 살아남은 자가 하나도 없도록 섬멸했다. 아사왕의 유대 군대가 엄청난 전리품을 빼앗아가지고 돌아 왔다. 심지어는 양과 나타와 같은 짐승들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이끌고 개선한 군대로 의기양양하게 돌아 올수 있었다.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사 임금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아무리 힘이 센 나라와 왕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진솔하고 하나님을 드높이는 겸허한 신앙인의 기도인가. 우리의 앞으로의 삶이 이런 기도의 연속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즘이야 우리나라에 명문 사립학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것도 수도권이 아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 위치한 유명한 기독교 학교가 바로 거창고등학교다. 최근에 그 학교의 전직 교장을 지낸 전성은 교장이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을 냈다. 그는 6. 25 전쟁이 휴전된 몇 해 후인 1956년에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설립자인 전영창 교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자신도 그 학교를 다녔고 나중에는 41년을 교사로 교장으로 있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1년 7월호에 그에 관한 특집 대담이 실렸다. 그가 교육가의 아들로 장성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명문 기독교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오래도록 봉직한 교육가의 양심을 가지고 호소하는 첫 마디는 “사람이 사람을 바꾸면 큰일 난다.”였다. 무슨 말인가. 그는 신앙과 철학이 분명했다.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과 성령님께만 있다는 강조였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히틀러나 일본의 천황이나 군부독재의 독재자들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역사는 점점 더 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키거나 바꾸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오직 인간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사람됨 즉 인격이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구원이란 도대체가 십자가를 질수 없던 인간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겨자 씨 하나가 자라나서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이다. 생명력이 있는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30배 60배 100배를 맺는 시작은 생명력이 있는 씨앗이 일단 먼저 죽어야 한다. 일단 죽어야 그 다음에 부활 즉 생명력이 무수하게 번성해 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개인이든 가정사이든나라의 역사이든 교회의 일이든 사람의 힘이 역사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32,000명 중에서 기드온의 남은 300명 용사가 미디안의 군대 12만 명을 이길 수 있었다. 기드온이 이긴 것인가.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이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베드로 대 성당과 바울 대 성당을 지키던 그 많은 신부들도 해결 못하던 종교의 개혁을 이름도 없던 수도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통해서 가능하게 하셨다. 마틴 루터가 한 것인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셨던 것이다. 오늘 날의 세계 평화와 역사가 3강 혹은 6강 혹은 G-20 정상회담 같은 영향력 있는 강대국의 대통령과 수상과 왕들이 연합해서 협의하는 국제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하고 섬세한 손길이 살아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의 고백 가운데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는 인생들을 주목하시고 그런 믿음을 표현하는 동안에만 붙들어 사용하신다.
이것은 혈육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사 왕이 믿음이 좋았던 때에는 아세라 목상을 우상으로 섬기던 어머니라도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킬 만한 용기와 순결한 믿음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 타락하고 변질되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믿음에서 멀어져 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며 부르짖어 간구하며 새 날을 준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내일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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