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예배다>라는 책을 쓴 A. 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목사는 그의 책에서 “인간은 예배를 위해 태어났다. 숨질 때까지 인간의 의무는 예배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렇다. 오늘 날의 교회의 위기나 신앙생활의 위기는 예배를 등한히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학생이 학교 다니는 것이 귀찮아진다든지 공부하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한다면 학생으로서 어딘가 병들어 가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자녀라면 교회 생활이 즐겁고 예배가 기다려져야 한다. 예배 시간에 은혜가 있어야 한다. 예배를 드려도 그만이고 안 드려도 그만인 증세가 시작되었다면 이미 영적으로 병이든 증세가 심각한 것이다. 식욕이 없어지고 입맛이 떨어지면 몸에 어딘가 질병이 찾아든 자각증세일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성도의 특징은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배가 은혜롭고 스스로 예배의 은혜를 간절히 목말라하고 사모하는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오늘 말씀은 예배자의 예배 회복에 관한 유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는 자기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는 물론 영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몸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몸은 골프장에 가있고 시장에 가 있고 결혼식장에 가서 있으면서 내가 어디서든지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또한 예배자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매 순간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실제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변화를 받아야 한다. 변화 받은 척 하고 변화 받은 무리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으로 자신을 변장하면 안 된다.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변질은 위험한 것이다. 영혼육이 변화된 변화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꾸준히 분별하는 삶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요 예배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기뻐하시는 뜻과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 나가는 영적 고민과 씨름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다.
나라마다 민족성이 다르고 문화와 풍습과 종교가 서로 다르다. 이번에 며칠간 방문했던 선교지인 필리핀은 자그마치 7,107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 그 중에 4,000여개의 섬에만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1565년에 스페인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 후에 333년간 지배를 받았다. 그 후에 미국과 일본과 다시 미국의 지배를 거쳐서 380년만인 1945년도에야 독립을 맞게 된 긴긴 아픔을 가진 나라이다. 오늘 날은 영어를 잘하는 동남아 국가 중의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r런 연유로 하여 세계 190개 국가에 인력 수출을 통해서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인구는 1억이 넘지만 국민 소득이 2,000불 정도로 아직은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나라이다. 엄청난 부자들이 지배하는 반면에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필리핀이란 이름도 스페인의 탐험가 빌라로보스가 자기 나라의 황태자인 필립의 이름을 따서 ‘Las lslas Filipinas'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지금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이지만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의 연구로는 과거에는 인도네시아와 함께 아시아 대륙이었으나 화산폭발로 인하여 대륙에서 분리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종교적으로는 일찍이 16세기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여서 83%가 구교도이다. 개신교는 9%정도이다. 회교가 5%이고 불교와 기타 종교가 3%정도이다. 가톨릭은 1521년에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도착하면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는 미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1899년부터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성이 보편적으로 친절하고 착하지만 더운 지역에서 살아서인지 게으른 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도 그 멀리까지 가서 저들을 섬기는데 약속한 아침 예배 약속 시간이 30분이 지나야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어슬렁어슬렁 모여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간을 잘 안 지켜서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던 것처럼 필리핀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잘 못 지킨다고 한다. 예배의 기본이 잘못 습관들여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예배의 회복이 신앙생활이 회복이다. 예배가 살면 일상생활이 살고 예배의 의욕을 잃고 예배의 활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어른 아이 남자 여자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예배의 회복이 급선무이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다. 가정 예배가 살아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매이고 꼬이기 시작한다. “우리 집은 서로 너무 바빠서 예배를 못들이며 살아가는데요.”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라도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씨름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배의 회복에 관한 도전의 말씀을 주고 있다. 영적 예배가 무엇인가.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祭物)로 드려야 한다.
사람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영과 혼과 몸- 그 세 가지가 균형 있게 건강해야 진정으로 건강한 것이다.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된 순간부터 태어나서 평생토록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 몸과 혼과 영이 균형 있게 지낼 수 있어야 참으로 건강한 것이다. 몸은 혼과 영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러므로 몸을 함부로 취급하면 안 된다. 먹는 음식과 마시는 물과 음료와 가고 앉고 눕는 모든 자리를 구별해야 한다. 그래야 몸이 거룩해져 가는 것이다. 몸에 좋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 것이나 함부로 들여 넣으면 스스로 몸이 이것을 알고 반응하기 시작한다. 몸에 해로운 음식이나 술이나 담배나 마약 같은 것을 섭취하면 몸이 경고를 나타내고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살아가면 결국은 몸이 병들고 만다. 그러므로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예배자의 기본이다. 기억하기로는 오늘 날까지 몸이 아파서 주일 예배에 빠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하나님의 축복인지 모른다.
이번에 필리핀의 팔라완 섬에서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지도자들 집회를 인도하는데 성경 없이 참석한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았다. 물론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성경 찬송 없이도 예배드릴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과 찬송가를 준비하고 예배드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 예배의 감격과 그 느낌은 각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전해 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군대에 갔을 때에 소대장으로 임관하고 훈련 마치고 최전방 휴전선을 지키는 소대에 배치 받은 후에 몇 달 동안 예배를 못 드릴 환경에 처했었다. 밤을 낮 삼아 휴전선을 지키고 낮에 교대로 잠자고 불모지 작업을 하는 일상의 연속은 주말도 없고 주일도 물로 없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콘크리트 방카 속에서 예배를 원하는 소대원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그런 예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번은 대대장이 새롭게 바뀌고 내가 신학교를 나온 소대장인 것을 알고 산 정상의 중대 본부 그 산 너머에 있는 대대 본부에서 대대장의 전용 지프차를 보내 와서 대대장 취임 예배에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그 후에 도라 산 OP의 정상에 1981년도 년 말에 북한이 환하게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성탄트리를 휘황찬란하게 점등하는 점등식에 나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사단장, 사단 참모, 연대장, 연대 참모, 대대장과 대대 안의 장교와 하사관과 사병이 많이 모여서 성탄 트리 점등식을 행했다. 사단의 군목이 설교하고 여러 사람이 순서를 맡았다. 그런데 그 도라 산 OP를 맡고 있는 대대와 중대의 소대장인 내게 직접 기도하라고 순서를 맡겨 준 것이다.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 보면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생활이라고 하였다. 군사가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성도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그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여야만 한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직장인은 직장에서, 사업하고 상업하는 이들은 그 사업의 현장에서 매 순간마다 예배자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생활을 겸허하게 지속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예배자의 모습이다. 정해진 예배시간에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것 같은데 가정과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활을 한다든지 하나님이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는 생활을 함부로 마구 살아간다면 결국은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말 것이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제자 주기철 목사가 담임으로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요 오산 중학교의 스승이었던 고당 조만식 장로가 주일 예배 시간 전에 교회 마당에서 다른 성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배에 늦게 들어오자, “조 장로님! 그 뒤 자리에 서서 예배드리세요.”하고 엄하게 조만식 장로를 책망하였고 조만식 장로는 그 책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공개적으로 담임 목사와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불찰을 사과하고 회개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게 전해져 오는 일화이다.
물론 이처럼 예배도 잘 드려야 하지만 그런 예배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예배자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 세대를 본(本)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예배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이란 말이 있다. 예배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란 종말론적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한다. 오늘 날은 본이 무너진 세상이 되었다. 소위 롤 모델을 찾기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다. 제 각각 무작정 성공과 출세만을 위해서 멈출 줄을 모르고 달려가는 기차와 같다.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바울 사도 시대의 이천년 전이든지 오늘 날이든지 아니 다가 오는 장래의 어떤 시대이든지 우리는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에녹시대의 에녹이 그런 인물이었다. 에녹은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히11:5)하는 증거를 받았던 주인공으로 살아갔다. 노아는 세상을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을 본받는 경건한 삶을 살다가 가족을 모두 구원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히11:7)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방 땅에 머물렀지만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단을 쌓으며 예배자의 삶을 경건하게 살아간 축복의 조상들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모두 하나님 신앙을 붙들며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믿음을 지켜 갔던 영적 예배자들이 되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엘리야와 칠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저들은 한 결 같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믿음을 지켜간 예배의 성공자들이었다. 열왕기 상 18장의 갈멜 산 정상의 엘리야의 제사와 기도를 보라. 아합 왕 시절에 삼년이 지나도록 나라 전체에 비가 오지 않았다. 사람과 짐승과 자연이 다 타들어 가고 죽어 갈 판이었다. 그 때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모으게 하고 엘리야가 저들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린 유명한 예배 승리의 장면을 본다. 바알 선지자들이 오전 내내 아무리 바알을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였다.(왕상18:30)
이것이 중요하다. 무너진 예배의 단을 수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래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엘리야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을 상징하는 열두 돌을 취했다. 열두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곡식 종자 두 세아 즉 15리터 정도 둘만한 규모의 도랑을 팠다. 나무를 벌여 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사이에 부었다. 삼년동안 비가 안 온 세상에서 어디서 이런 물을 마련 해다가 갈멜 산꼭대기에 부었을까 상상해 보라. 세 번 반복하여 결국은 열두 통의 물을 마련 해다가 흥건하게 제단에 부었다. 물이 제단에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찼다. 이제 저녁 소제 드릴 시간이 되었다. 엘리야는 그 제단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18장 36절과 37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유명한 기도다. 이때에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 이 장면을 보았던 백성들이 한 결 같이 엎드려서 이렇게 외쳤다.(왕상18:39)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때에 엘리야가 소리쳤다. “바알의 선지자를 한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다 잡으라.” 엘리야는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다 쳐 죽였다. 엘리야는 그 즉시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일곱 번을 사환에게 확인시키며 기도할 때에 작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임금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들어갔고 선지자 여호와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한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아합 임금이 보는 앞에서 달려갔다. 살아가던 당대의 세상을 본받지 않고 언제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생을 살아갔던 인물의 대표가 엘리야이다. 그런 인물이 넘쳐나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 가자.
변화(變化)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하여야 한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제 1조는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예배자의 증거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변화는 좋은 것이고 변질은 위험한 것이다. 변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변질은 타락의 시작이다. 영 혼 육이 주 안에서 변화를 받는 증거가 무엇인가.
이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일인가.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인가.
이 일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드러날 만한 일인가.
이와 같은 질문을 계속하고 그 대답을 계속하여 찾으며 살아가는 신앙순례의 과정이 곧 예배자의 삶이다. 악을 미워하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에 속하여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롬12:9, 21)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 주께 칭찬을 받아야 한다.(롬13:3) 대단히 구체적이고 윤리적이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다. 이 생각과 말과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드러낼 만한가.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라고 분부하셨다.
이번에 선교지에서 귀국하는 토요일 새벽에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신문을 보았다.(2011. 6. 4. 한국일보) 우리 나라 전국에 조사된 바로는 전기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가정이 지난 2010년 8월 현재로 221가정이라고 한다. 그 중에 강원도가 129가구로 60%이다. 그 중에 3가정 이하 세대의 경우는 200미터까지만 전기 공급 가설 공사비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개별 부담으로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전기 공급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 최근에야 전기 공급 혜택을 받게 된 산간 마을의 한 가정 초등학교 어린이가 현장학습으로 학교에 허락을 받게 한 후에 마을 사람들과 기관장들이 모인 자리에 수박을 아래위로 썰어 제단을 차려 놓고 시루떡 위에 북어를 두 마리 마주 보게 하여 실타래로 묶어 얹어 놓고 고사를 지내는 사진이 일간 신문에 나왔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왜 북 대가리를 갖다 놓고 고사를 지내는 걸까. 이게 세상이다. 비행기 사다 놓고도 돼지 머리 놓고 고사 지낸다. 최첨단 IT 관련 생산 공장 설비를 마치고도 돼지 머리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낸다. 이런 세상에서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맹목적인 종교,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분별력있는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살고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단 셀리어즈의 <거룩한 예배>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기억하는 예배, 세상을 위한 예배”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본다. 세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발견하고 세상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구원해 가는 그런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매 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답게 마음을 새롭게 하며 분별력을 갖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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