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려서 자라나던 시골의 밤은 참으로 어둡고 깜깜하였다. 중학교 들어가서야 전기가 들어 왔으니 그 이전의 밤 문화는 뻔 한 것이었다. 호롱불이 고작이었고 대개는 등잔불에 심지 둘을 밝혔다. 밤늦게 그런 불을 밝히고 저녁을 먹는 날에는 음식상이 어두컴컴했다. 물론 요즘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은 대 낮에도 어두컴컴하게 해 놓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환한 것이 좋지 않는가. 문명의 발달은 생활 여건이 얼마나 환한가로 가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남북한을 항공사진으로 찍은 밤 사진을 보면 북한은 칠흑 같고 남한의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대낮같이 밝다. 도심의 밤거리를 달리는 차들이 밝고 환하게 긴 선을 그리며 달려가는 밤 풍경의 사진도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묘사 중에서 아삽의 시로 되어 있는 본문인 시편 80편에 보면 세 차례나 반복하여 하나님을 빛을 비추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빛의 광채를 비추어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을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둡고 답답하고 음울하고 가난과 압제와 핍박과 질병과 고통 중에서 살아가던 인생들의 캄캄한 세상을 환한 광명으로 비추이는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제 네 주일만 지나면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다가 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의 한 가운데 환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광명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세례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오신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참 빛 자체라고 하였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라고 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보면 시대적으로 암울하던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구원하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양떼와 같이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천사들인 그룹 사이에 좌정하셔서 어두운 세상에 환한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구주이시다. 시편 80편의 시편 기록자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믿음을 갖고 기도한 것이다.
물론 이 시편 80편은 그 시대적인 배경을 찾아 볼 수는 있다. 성경 해석자들은 이 시편의 탄생 배경을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 왕국을 쳐 들어와서 멸망시키던 주전 722년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다가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상과 별 큰 차이가 없다. 다 읽지 못한 시편 80편의 8절 이하의 말씀을 간략히 보면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애굽에서 뽑아내다가 가나안의 민족들을 좇아내시고 그 곳에 심겨 놓은 한 그루의 포도나무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를 친히 가꾸셔서 그 뿌리가 깊이 내렸고 땅에 가득하게 박혔다. 그 한 그루의 포도나무 그늘로 인하여 산을 가릴 정도였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과 같았다. 그 포도나무의 가지는 바다까지 뻗고 그 넝쿨들은 강까지 골고루 미쳤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그 담을 헐기 시작하셨고 길 가던 사람들이 그 풍성한 포도나무의 열매를 함부로 따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그 포도송이를 함부로 따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심지어는 숲 속에서 멧돼지들이 뛰쳐나와서 먹기 시작했고 각종 들짐승들이 포도나무의 열매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시편의 내용은 시대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고 백향목처럼 번성하게 하시던 한 그루의 포도나무와 같은 이스라엘읖 포기하기 시작하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다. 출애굽 이후 살아가면서 점점 하나님을 친근히 한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다윗의 때와 아들 솔로몬의 때를 거치면서 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200여년 세월이 지나던 중에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B. C 930-722) 그와 같은 시대 상황을 시편 80편은 12절에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앗수르가 강해서 이스라엘을 점령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깊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담을 허셨다. 지나가던 이들이 넘석거리며 이스라엘의 포도열매를 따 가기 시작했다. 숲 속에서 멧돼지가 출몰하듯이 각색 짐승들이 달려들듯이 이스라엘의 운명은 불행한 심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 긴긴 세월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바벨론 포로 시대와 메데 바사와 헬라와 로마의 지배를 거듭해 가던 암울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지난 2,000년 동안 메시아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받아들인 민족마다 큰 복을 받았다. 21세기인 오늘 날에도 못 먹고 못 입고 원시 부족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미개문명의 종족들이 세계의 처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글도 모르며 살던 종족들이 글을 깨우치고 긴긴 역사를 옷도 입지 않고 매우 원시적으로 살아가던 이들의 삶의 양태가 급속하게 변화하게 된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면에서 생활이 변하고 새로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원시 문명 속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들 나름대로 행복도 있고 만족도 있다. 그러나 일단 복음이 들어가고 나면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민족이든지 하나님의 원 창조의 질서와 형상을 회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하면 개인과 가정과 민족의 운명이 상상을 초월할 수 없도록 바뀌게 된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해 보자.
인도하시는 목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에 비유하고 있다. 목자 없는 양이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양을 집단 사육하는 목장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그러나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양떼를 치는 목자와 양의 풍경은 흔하게 늘 상 대할 수 있는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 양떼 중에서 목자의 돌보고 인도하는 손길과 눈길을 벗어나면 잃은 양이 되고 말수 있다. 곰과 사자와 같은 맹수나 독수리의 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 삼고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도자 삼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그러하여야 한다. 잠시의 방심이나 교만이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사사 들 중에서 삼손이나 임금 중에서 사울이나 솔로몬의 나중 불행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임금 사울과 임금 다윗의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유명한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렇다. 질문해 보자. 당신은 어떠한가. 지난 한 주간 하라 하루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목자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도자 삼고 살아 왔는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 보면 저자는 1960년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이 영화는 그 해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 영화는 두 팔을 벌린 거대한 예수 상을 헬리콥터에 묶어서 로마로 옮겨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트랙터를 몰던 들판의 농부는 소리를 치면서 트랙터의 속력을 내서 그 헬기에 매 달린 예수상을 좇아가 보려고 한다. 로마의 근처에 도착하자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비키니 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고도를 낮추어서 저들의 광경을 보려고 급강하한다. 그러나 우울하고 무표정한 콘크리트 부조물인 거대한 두 팔 벌린 예수 상의 예수는 아무 말 없이 공중을 선회하며 저 아래 세상을 묵묵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삼류 신문사에서 가십거리를 기사화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하는 마르셀로는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업무가 끝나면 날이면 날마다 여자와 술 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계속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인간 세상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가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 로마의 퇴폐적인 치부와 타락상과 로마의 바티칸에 대한 다루기 어려운 내용들을 담아내면서 가톨릭의 바티칸으로부터 상영금지요청을 받기 까지 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필립 얀시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내에게 있어서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을 안고 고민하면서 그의 책을 써 가고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인가”라는 주제로 4-500페이지 정도의 책을 한 권쯤 쓴다면 어떤 내용의 무슨 간증과 어떤 경험들과 그 어떤 나의 신앙을 기록할 수 있을까. 벌써 올 한해도 다 지나가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12월이 시작된다. 마지막 한 달을 남겨 놓고 있다. 길게 생각하지 말고 올 한 해를 뒤 돌아 본다면 지난봄과 여름과 가을을 지내고 오늘까지 지내 오도록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는가. 내가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요즘 교회에서 사용하는 차량들이 교회의 대표자로 되어 있는 나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보니까 무슨 불법 주차를 하여 벌과금을 받는다든지 혹은 속도위반을 하여 과속 벌과금을 받게 된다든지 하면 모든 차량의 사용 기록이 내 앞으로 날아온다. 우리가 한 해를 살고 나면 이처럼 나의 인생 성적표가 나에게 따라 오게 되는 것이다.
몽골에 두어 차례 선교지 방문을 위해 갔다가 끝없이 광활한 들판을 차량으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냥 들판으로 달리면 그 곳이 길이다. 물론 망망하게 푸른 들판의 초원이 길이 난 곳도 있긴 하지만 길이 끊기고 나면 그냥 들판으로 달려가야 한다. 잠시 쉬기 위해서 내려 보면 멀리서 볼 때에 그렇게 아름답던 풀과 잔디의 들판이 어디 구별해서 잠시 앉을 자리가 한 곳 없도록 거의 그 넓고 넓은 들판을 양떼와 염소 떼와 소떼가 풀을 뜯고 지나가고 배설물을 이 곳 저곳에 배설해 놓고 지나간 흔적들이 가득하다. 아는 이들은 아는 것처럼 양이나 염소의 배설물은 마치도 콩을 들판에 쏟아 흩뿌려 놓은 것과 같다. 그러하다 보니 그 어느 곳 한 곳도 디디고 구별해 앉아 쉴만한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 그러하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하고 배설물들이 우리의 살아온 처처에 널려 있다. 양떼의 일상이 그러하지만 매 순간마다 목자들이 양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일정한 곳으로 그 양들을 인도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생이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을 목자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 삼고 살아가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우리 감리교단의 시인이요 목사인 이중에 고진하 목사란 이가 있다. 지난 주 교단 ,신문인 기독교타임즈의 같은 지면에 나의 칼럼도 실렸고 그의 ‘황금방석’이란 제목의 시도 한 편 실려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황금색 알들을 주어 담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노란황금 방석이 푹신하게 자신을 받쳐 준 것이다. ‘아 평생 처음 앉아 본 황금방석’ 여기서 시의 내용이 반전을 시작한다. “문득 곁에서 구린내가 솔솔 올라와 코를 찔렀지 아뿔사! .......왜 황금이 있는 곳마다 이토록 구린 냄새가 진동할까. 바람 곁에 악취를 날릴 요량으로 가까운 언덕배기로 허위허위 올라갔지. 수령이 무려 팔백년이라는, 장렬한 임무를 다 마친 늙은 고독이, 허허로운 늦가을 허공 속으로 폐선(廢船)처럼 흔들거리며 떠가고 있었어.”
그렇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며 인생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분은 오직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뿐이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목자 삼고 순종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르며 살아 온 인생들 중에 잘못된 인생이 역사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남은 해를 보내고 새 해를 설계하는 이 계절이 대강절기를 지내면서 진심으로 주님을 인도자요 목자로 따르는 은혜를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인생을 돌이켜 회복해 주시는 주님.
대개의 현실주의자들은 기적 따위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일에 교회에 와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든지 헌금 생활을 계속한다든지 교회의 어느 기관이나 부서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누군가를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있어서 기적으로 관찰되지 않는가. 일주일 중의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이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시편 80편의 본문에 보면 3절과 7절과 마지막 절인 19절에서 이 같은 회복을 기도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3절에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라고 했다. 7절에서는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라고 했다. 다시 19절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하나님 아버지 만군의 여호와는 자녀 된 우리들을 돌이켜 주시고 회복하여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인생을 돌이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축복과 은총 중의 하나가 바로 회복시켜 주시고 돌이켜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이 발전해서 각종 수술이 이루어진다. 뇌수술뿐만 아니라 안과 수술, 치과 수술, 이비인후과 수술, 심장을 비롯한 오장 육부에 수술이 이루어진다. 장기를 잘라내기도 하고 이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신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잘라내고 연결하고 봉합하고 이식하고 하는 모든 정교한 시술과 수술이 진행되지만 생명을 연장시키고 잃었던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능력은 창조자 하나님의 손길에 달린 것이다. 약해져 있던 몸과 마음이 강건해 지는 축복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돌이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은총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과 앗수르에 빼앗겼던 땅에 어떻게 다시 되 돌아 갈 수 있었는가. 불타고 무너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에 다시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성곽을 다시 쌓고 수문 앞 광장에 한 나절씩 둘러서서 ‘아멘! 아멘!’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 책을 다시 펼쳐 읽을 수 있었던 에스라 시대의 회복의 날이 어떻게 되돌아 온 축복인가 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돌이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능력과 은총을 겸허하게 의지하며 기다리고 기도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돌이키시고 회복해 주시는 주님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회복자로 오신 메시아인 것을 선언하는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이 나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오셨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무슨 말인가. 한 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악과 허물과 어둠과 슬픔과 아픔과 답답함과 억울함에서 건져 내시고 되 돌이켜 주시며 온전하고 완전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의 나라로 회복시켜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다.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역사적인 작품을 쓴 도스토에프스키는 “신앙은 기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기적이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잘 듣고 생각해 보라. 기적에서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부터 출발해서 기적이 나오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 예수의 곁에서 치료의 기적과 회복의 기적을 본 모든 주인공들을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축복의 말씀은 한 결 같이 저들의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 믿음에서 회복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가령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기적을 보라. 산상설교를 마치고 하산 하신 예수께 찾아온 백부장은 자기의 중풍병에 걸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는 그 환자가 있는 곳에 가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자 “이곳에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났겠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의 믿음의 말을 들으시고 너무나 기분이 좋으셨다. 그리고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칭찬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한 관리의 딸이 죽어서 슬퍼하며 찾아 와서 예수께서 방금 죽은 자기의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자기 딸이 살아나겠다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에 예수도 따라가고 제자들도 그 뒤를 따라 가는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부인이 예수의 뒤로 살짝 따라가서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여인은 자신이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뒤를 돌아다보시면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축복하신 적이 있다. 그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그 여인의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그 여인이 그 때에 혈루증에서 나은 것을 단순히 병에서 나았다고 하지 않고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했다.
마태복음 12장에도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 가셨을 때에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그 환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실 때에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해졌다.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이 무엇인가. 돌이켜 지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건강도 회복되고, 재물도 회복되고, 관계도 회복되고, 환경도 회복되고, 여건도 회복되고, 경제도 회복되고, 지위도 회복되고, 학생들은 성적도 회복되고 그 모든 삶이 구석구석마다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대개의 기도이다.
본문 4절에서 6절까지에 보면 용서와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진노를 거두어 주시고 눈물로 양식을 삼고 눈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고통 중에서 이웃의 다툼거리와 원수들의 비웃음거리가 더 이상 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다운 생활로 되 돌이켜지고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구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본문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2, 3, 7)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하고 있다. 본문의 표현 그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을 나타내어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어 구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19절 말씀을 보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고 했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이 같은 전능하신 구원을 시시 때때로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누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나게 하였는가. 누가 이삭의 파는 우물마다 맑은 샘이 넘쳐 나게 하였는가. 누가 야곱의 양떼와 짐승 떼가 번성하여 두 산 허리를 덥게 하였는가. 누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게 하였는가. 누가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어린 아기 모세를 나일 강의 갈대 상자에서 건져 냈는가.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게 하였는가. 누가 광야 사십년 동안 마실 물과 먹을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가. 누가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었고 누가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해 주었는가. 누가 아이성 전투에서 이기게 하셨는가. 누가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게 해 주었는가. 누가 예루살렘 성에 성전을 짓게 해 주었는가. 누가 솔로몬 임금에게 그 많은 잠언과 전도서의 지혜의 말을 기록하게 하였는가. 누가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을 쳐서 이기게 하였는가. 누가 한나에게서 아들 사무엘이 태어나게 했으며 누가 베들레헴의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게 하였는가. 누가 다니엘의 환상처럼 바벨론과 앗수르와 메대와 바사와 헬라와 로마의 그 큰 사자와 같고 곰과 표범과 같고 열 뿔 달린 해괴한 짐승과 같고 두 뿔 가진 양이요 두 눈 가운데 현저한 뿔과 같은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택한 백성들을 건지고 구원하셨는가.
오늘 날 나의기도 제목과 우리의 가정사와 우리의 교회의 기도 제목을 해결한 능력자가 그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그렇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사들인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셔서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며 날마다 요나의 표적처럼 새로운 능력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처럼 악한 세대 가운데서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과 열방과 그 가운데 주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영원히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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