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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욥23:10-17)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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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09 00:28 조회 21,414 댓글 0
 
1950년대부터 국제기능올림픽이란 것이 있어 왔다. 영어로는 “World Skills Competition”이라고 한다.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젊은이들이 참가하여 각 분야의 기능을 겨루는 국제 대회이다.  초기에는 매년 열렸으나 최근에는 격년마다 열린다. 각종 분야의 기능인들을 개발하고 경합해온 그 이름 그대로 기능올림픽이다. 한국은 1966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금메달을 휩쓸어 오는 나라가 되었다. 당시에 가난했던 한국으로서는 기술 한국으로 진입하는 데 인재를 발굴하고 격려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금속공예, 금형, 요리, 금은세공, 용접, 판금, 배관, 철골 구조, 목공, 석공, 양복을 만드는 기능공, 자동차 수리공, 당시에는 흔하지 않고 귀하던 TV 수리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실력을 겨루는 경기였다. 저들이 우리 나라 기술 발전의 최전선에서 수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분이 그들의 모습을 회상하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때에 만나 보았던 우수한 장인인 젊은이들에게서 아쉬움을 보았다고 했다. 각 분야에서 세계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 온 것은 좋은데 저들의 마음이 너무나 피폐해 있더라는 것이다. 기능은 세계적인데 그들의 마음에는 “가난한 가정과 공부할 기회를 후원해 주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과 탄식”이 너무나 강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전하고 완벽한 환경에서 낳아 성장하는 이들은 없다. 누구나가 다 그 삶의 주변을 들여다보면 위기도 있고 갈등도 있고 고뇌도 있고 번민도 있을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병약한 이들은 건강한 이들을 부러워할 수 있다. 재능이나 역량이 부족한 이들은 각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뛰어난 이들을 부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고 해석하기에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과 배경을 갖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인간이 단순한 기능공 정도의 수준에서 일정한 경제성을 갖고 살아가기만을 기대하시지는 않는다. 원만한 인격의 사람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고 개인의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생활과 세상에서의 모든 범사에 성도의 덕을 드러내며 빛과 향기가 있는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신앙의 힘은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서 불행과 아픔과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다른 능력을 공급받는 은혜를 누리게 한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현세에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나는 또 다른 힘과 지혜와 역량이 주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잘 난 사람들이 많다. 뛰어난 사람도 많고 우수한 인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우수하고 공부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앞서가고 하는 일도 별 탈 없이 형통하고 그러면 매사를 자기가 잘 나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대로 간절히 간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변을 돌아보면 의외로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꽤나 많다. 그것이 자신의 질병이든 혹은 가족들 중의 그 누군가가 겪는 오랜 투병생활이든 몸이나 마음이나 정신력이 연약하여 몸과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가족들과 더불어서 함께 고통당하고, 같이 아파하며 사는 가정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또한 남들 이상으로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아가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하여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족 관계가 복잡하여 늘 심란하게 사는 이들도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생활을 하는 가정들도 있다. 산다는 것이 고생과 수고와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어려움이 전혀 없이 사는 가정이나 인생이 그 어디에 있으랴.

그런 세상 중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이 겪는 고난은 고난이라기보다는 재난(災難)에 가까운 비극을 겪으며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저 좋은 관계인 것 같았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방문과 위로가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지금 욥은 그 많던 짐승들과 재산이 다 날아가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포함한 열 명의 자녀들이 한 날 한 곳에서 다 죽고 말았다. 욥이 세상을 막 살고 되는대로 살고 하나님 없다하며 타락된 생활을 하던 사람이라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욥은 동방의 유명한 신앙인이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했다. 그런 참신한 믿음으로 살아가던 욥이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는 동방의 소문난 재산가였다. 양이 7,000마리였다. 낙타가 3,000마리에 소가 500겨리였다. 암나귀가 500마리에다가 종도 많았다. 동방 사람들은 그를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1:3)고 칭찬하던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늘 자녀들에게 향했다. 아들딸들이 모여서 음식을 해 먹고 잔치하고 나면 아버지가 앞장서서 아침이면 자녀들을 불러서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려 죄의 용서를 구했다. 그런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던 욥의 가정에 엄청난 재난이 덮쳤다. 자식들이 한 날 다 죽고 그 많던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그 많던 짐승들을 다 약탈해 갔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남은 짐승과 종들까지 다 불살라 버렸다. 이런 재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내조차도 집안에 덮진 재난을 이해하지 못해서 남편 욥에게 무슨 하나님을 속이는 죄가 있기에 이런 재앙을 받느냐고 닦아세우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욥의 가정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욥 자신도 몸에 병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욥의 몸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성한 곳이 한 곳도 없게 되었다.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도 피범벅만 될 뿐 시원한 곳이란 한 곳도 없었다. 아내는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소리 질러 댔다. 그러나 욥의 고백은 분명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아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다. 그 후에 소식을 듣고 찾아온 세 친구들과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욥기 전반부의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오늘 본문도 그 대화 가운데 일부이다. 욥에 친구 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을 듣고 대답한 내용이다. 욥의 심경과 믿음의 면면을 보게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의 장래사를 미리 아신다. 우리의 모든 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각자 자유 의지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런 것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추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묻는다. 그것이 기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매사를 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특징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불행과 재난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아 나서느라 씨름하고 고뇌하고 있다. 14절에 보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욥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런 고백을 한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대 소사 앞에 이런 고백의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의 나아가는 길을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성도 각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순금(純金)처럼 단련(鍛鍊)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욥은 자신의 당한 불행과 재난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겪고 있는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이 자신을 순금을 얻으시기 위해 금을 단련하듯이 단련하시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사실 욥은 마음의 불안정으로 인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영적 씨름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 본문인 23장 2절에 보면,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고 했다.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처절하고 솔직한 고백인가. 욥은 지금 자신이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겁다고 했다. 너무나 엄청난 불행을 당해서 탄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부르짖고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보존되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그 나중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 구절을 암송하기는 쉬워도 막상 그 말씀의 환경이 내게 주어졌을 때에 그런 고난이나 재난을 극복하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고 했다.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고, 동은 동이다. 올림픽 메달 중에도 금 은 동메달의 차이는 만만치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과 아픔과 슬픔과 참혹한 재난을 딛고 굳건한 믿음으로 재기하게 되면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단련된 후의 순금 같은 믿음으로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새벽마다 묵상하는 매일 묵상집인 ‘생명의 삶’ 9월 23일 분량에는 읽을거리부록으로 조경호 목사의 <진정한 부흥 로마서>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해 주었다. 몽골의 칭기스칸(Chingiz Khan)은 황제가 된 후에 자신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이들에게 ‘타르 탄’이란 칭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여섯 가지의 특권을 허락했다.

첫째, 언제나 누구의 허락 없이도 나를 만날 수 있다.
둘째, 전쟁 후의 전리품 중에서 무엇이든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셋째, 평생 어떤 세금에서도 면제된다.
넷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아홉 번까지 용서 받을 수 있다.
다섯째, 이 나라의 살고 싶은 곳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다.
여섯째, 이 같은 권리를 앞으로 4대까지 이어 갈 수 있다.

어떤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고 누리는 영혼육의 축복이란 어떠한가. 징키스칸에게 충성하여 얻는 축복과 혜택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주를 향한 충성과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인생에게 천대의 복을 약속해 주셨다. 물론 인생이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별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정금처럼 단련해 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을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가 고난 극복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그 엄청난 불행과 자신의 질병과 아들딸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 버린 빈털터리 환경에서 좌우로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고 욥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천의 하나 만의 하나 누구에게나 그리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사람이 순풍 앞에서는 그 누구나 세상을 유람선 타고 유람하듯이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폭풍노도가 거세게 칠 때에 중심을 잡고 올 곧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렇다. 11절과 12절을 보라. 욥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항변하듯 담담하게 이리 말한다.

“내 발이 그의 정한 걸음을 바로 따랐다”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내가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유로굴로라는 광풍을 만난 사도 바울의 모습을 소개한다. 유라굴로라는 바람은 지중해에 부는 북동풍의 광풍을 말한다. 276명이 탄 배였다. 선주도 타고 있었고 선장과 선원과 심지어는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로마의 율리오란 이름의 백부장과 병사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런대 광풍노도가 대작하여 보름동안 바다 한 가운데서 해의 빛을 보지 못하는 날들을 지내야 했다. 심하게 멀미하고 토하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언제 죽을지 언제 배가 전복될지 모르는 혼비백산하게 하는 위기가 끊이질 않고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그 파도와 풍랑이라는 것이 한 두 시간만 쳐도 불안이 극에 달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지난번에 부산 성일교회 집회에 갔다가 여러 장로님들 중에서 두 분이 국제 무역선과 유조선 선장 생활을 평생하신 분들을 만나 보았다. 그 유조선이란 것이 배의 길이면 200미터가 넘는 운동장 같은 거대한 배인데도 엄청난 파도를 만나면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엽편주라는 말을 쓰는데 아무리 크고 거대한 배라도 무서운 풍랑을 만나면 개울물에 띄운 종이 장난감 배 흔들리든 요동친다는 것이다. 막상 큰 파도와 큰 풍랑을 만나면 불안하기는 그 때 그 때마다 언제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풍랑이 잠자지 않는 파도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은 인생길에서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욥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하신 명령을 어기지 않고 치우침이 없는 발걸음으로 정한 걸음을 한 걸음씩 걷고 또 걸어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온 욥의 고백에는 담담한 신앙 순례자의 의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그런 욥인데 지금 엄청난 재난 앞에 주저 앉아 있다. 아들딸 다 죽고 재산 다 날라 가고 아내조차도 남편을 의심하고 욥 자신의 몸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다. 마지막 남아 있는 몸 하나 조차 벌레처럼 상하고 병들어 있다.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산다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환경이 되었다. 그런데도 욥의 고백은 의연하고 당당하다.

우리가 이런 정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욥은 지금 알 수 없는 고난, 믿어지지 않는 고난 앞에 처절하게 버려져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조차 침묵하시는 이 참담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병들고 외롭게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앙 의지는 너무나 분명하고 담담하다. 그의 입의 말, 발의 걸음, 가는 길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살아 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신앙의 결연한 의지가 솟구쳐 오른다.

우리가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무엘이나 다윗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여곡절 많은 세상을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살아간 신앙의 선조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깨달음을 가지고 그를 두려워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나의 가는 길을 나보다 더욱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어려서 아버지 손을 잡고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 나서기만 하면 어린이 대공원에도 가고 동물원에도 가고 비원에도 가고 남산에도 가고 청계천에도 가고 한강에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라.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일정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누가 하나님의 뜻을 능히 돌이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반드시 행하시고 이루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스스로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구원주이시다. 일찍이 이사야와 요엘과 호세아와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과 계획을 때가 찬 경륜으로 이루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완성이요 성취인 것이다. 우리 인생도 하루 일을 아침에 한 해 일을 봄에 계획하거 하루하루 이루어가고 한 해 한 해 이루어 가려 하지 않는가. “일일지계재어조 일년지계재어춘”(一日之計在於潮 一年之計在於春)이라 했다.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작정하신 것을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므로 욥은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와 재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욥23:15)

하나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 생활이다.  하나님 앞에서 떨며 지각을 갖고 깨달음을 갖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소중하게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올해 92세의 고령인 빌리 그래함 목사의 2005년 뉴욕 집회 때의 세 편 설교를 담은 <빌리 그래함 마지막 설교>라는 설교집이 있다. 그는 첫째 날은 니고데모 이야기를 주제로 거듭남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둘째 날은 고민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 이야기를 주제로 설교하였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교한 것이다. 재물을 버리고 권력을 버리고 인기를 버리고 명예를 버리고 주를 따른 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날도 여전히 도전하신다. 지금 나의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버리고 주를 따를 만한 그런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창세기의 노아를 주제로 설교하였다. 세상의 생활에 애착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을 향해서 종말적 신앙을 고취하는 설교 말씀이었다. 그 첫날 설교 말씀인 니고데모를 향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한 설교 중에 빌리 그래함 목사는 야구 경기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말이다.

여러해 전 월드시리즈 야구 경기 7차전이 있었다. 당시 양편의 스코어는 9회 말 동점이었다.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나섰다. 그는 멋진 장외 홈런을 때렸다. 관중들은 크게 환호했고 모두 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9회 말 투(two) 아웃의 상황에서 마지막 타자가 홈런을 때린 것이다. 그런데 그 멋진 홈런을 때리고 여유 있게 베이스를 돌아서 홈 플레이트로 돌아 왔는데 심판은 ‘아웃!’하고 소리쳤다. 관중들은 흥분하고 아우성이었지만 심판은 선수가 1루를 제대로 밟지 않고 달려서 홈 플레이트만 밟는 과정을 자세하게 지켜 본 것이다.  결국 그 선수는 아웃되고 말았다. 마치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대강 대강 건성 건성해서는 마지막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기가 어렵다. 교회도 다니고 주일도 지키고 십일조 생활도 잘 하고 자녀들과 함께 가족 모두 세례도 다 받고 집사도 되고 임원도 되고 뭐 굉장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의 마음 저 깊은 곳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닌 부분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고민 가운데 예수의 곁을 떠나가지 않았는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5절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도전하셨다.

지금 욥이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씨름하는 영적 숙제가 무엇인가 보라. 물론 욥의 마음이 약해져 있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긴 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흑암이 자신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러면 지금 욥의 고민과 두려움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가 평생을 온전하고 정직하게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 아버지가 과연 자신에게 어떤 분이시냐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을 잘 못 알고 지낸 것인가. 하나님은 변덕쟁이이신가. 이날 까지 믿고 따르고 순종하고 예배드리며 시시 때때로 번제를 드리던 하나님, 그 번제를 받으시던 하나님이 지금 침묵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욥 자신이 이처럼 사탄의 부림을 받고 고난과 재난과 시련과 질병과 두려움 속에 무너져 가도록 나타나지도 않으시고 보이지도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비겁 장이이신가. 고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답답해하고 우울해하면서 절 귀하는 것이다. 여전히 욥은 고민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약하게 해 놓으셨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런 두려움을 주셨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씨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끔찍한 고난과 재난의 터널을 지내던 욥은 나중 42장 5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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