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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음의 시작(막1:1-8)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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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2-04 00:59 조회 19,947 댓글 0
 
오늘 날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한국 교회 기독교 선교 126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처처에서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충격 받게 하는 뉴스들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이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성도들을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큰 거목이 쓰러질 때에 그 요란함은 작은 나무 하나 쓰러지는 소리와 비교가 안 된다. 그 거대한 코끼리가 병들어 쓰러지는 충격은 파리 한 마리나 하루살이 한 마리 죽어가는 충격하고는 더욱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문제나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길은 단 한가지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날마다 거듭나고 새로워져야 한다. 사도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처럼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사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기에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의 시작을 다시 묵상하는 일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과 전혀 다른 형식으로 복음서를 시작학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42대 족보 이야기로 시작된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좀 다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표현은 마치도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표현과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혹자는 마가복음 1장 1절을 신약의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했다. 마가복음 1장 1절의 ‘시작’이란 단어가 창세기를 시작하는 단어인 ‘태초’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시작’이란 것은 대단히 여러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의 말 중에 ‘문열이’ 혹은 ‘문여리’ 또는 ‘무녀리’라는 단어가 있다. 원 뜻은 짐승의 새끼들 중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딘가 신체적으로 부족하고 어리어리한 상태의 누군가를 말할 때에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좀 부족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단어 자체로 하면 문을 열고 나온 이란 뜻의 장자요, 첫 것이요, 맏물이란 뜻의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주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그런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첫째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인간 죄악을 해결하고 용서하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이사야 53장 2절의 메시아 예언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멸시 받고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분이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고 그 어느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당한 질고와 슬픔과 징벌과 고난은 죄악된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해결하는 평화의 능력이요 치유의 은총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축복인가.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육 개월 먼저 오신 세례 요한의 복음 전파를 시작으로 회개의 세례와 물세례와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씀하는 대단히 소중한 복음서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라는 책이 있다. 잔느 귀용(Jeanne Guyon, A. D. 1648-1717)이란 부인이 300년 전에 쓴 기독교 고전 중의 하나이다. 저자인 잔느 귀용은 책의 제목처럼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해 가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원래 그의 이름은 엄청나게 길다. 잔느-마리 부비에 드 라 모트 귀용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 남쪽의 몽타르지라는 곳에서 부자인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잔느는 일곱 달 만에 세상에 태어나 매우 병약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딸을 무척 사랑했지만 어머니는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에 비해서 어머니는 병약한 딸 잔느를 냉대하고 함부로 대했다. 잔느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어려서부터 매사에 금욕하기를 좋아했고 자신을 자학하리만큼 신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자라났다. 가톨릭의 수녀들의 생활에 더욱 관심을 갖고 지냈다. 당시에 유명한 수녀회의 한 설립자 중에 샹탈이란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영적 체험과 고행을 위해서 인두불로 예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길 정도였다. 그런 소식을 들은 잔느는 예수의 이름을 쓴 종이를 바늘로 피부에 꿰맬 정도였다. 이처럼 지나친 고행과 신비주의를 동경하던 그녀를 그의 부모는 16살에 강제로 출가시켰다. 서로 얼굴을 본지 삼일 만에 결혼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남편은 22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어려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그녀에게 재앙의 시작이었다. 친정은 경건하고 점잖은 편이었는데 시집은 세속적인 욕망 가운데 살아가는 귀족이었다. 더군다나 남편은 늘 병약해서 병수발을 들기에 급급한 나날이었다. 시어머니는 괴팍해서 며느리를 학대하고 모욕하고는 했다. 그녀의 결혼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지켜 내는 힘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기도 생활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 자신도 고달픈 나날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다 병들고 때로 이겨 내는 것 같았지만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고통을 견뎌 내야 하는 인내와의 싸움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부요하고 풍요로운 시집의 환경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로부터 교훈을 듣고 극적으로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날 이후로 그는 단순하게 기도하는 기도 생활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고통과 환경적인 모든 불안과 염려와 고통들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기도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 결혼 생활 12년만인 28살 때에 그의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날 이후로 그는 평생을 홀로 살아 갈 것을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 날 이후로 그녀의 글쓰기와 편지의 내용들은 개신교 도시였던 스위스의 제네바에까지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글들과 말들과 모든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 의해서 비방도 받고 조롱도 받았다. 나중에는 왕의 명령으로 수도원의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그런데 루이 14세의 부인인 맹트농 부인의 활약으로 풀려나서 계속하여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생활과 기도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소문은 당시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까지 소문이 나고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평생을 반대자들로 인해서 오해와 불신과 모욕도 많이 당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의 영향력은 프랑스와 주변 여러 나라에 불길처럼 번져 가게 되었다. 역사는 그녀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마음 속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과 전적인 자기 포기,
자신의 의지를 배제한 순종의 기도 생활,
정신력이나 말이나 의지를 벗어난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안식과 완전한 기도자”

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연약한 탄생과 성장, 불운했던 결혼과 학대 등을 극복하며 오로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지식을 오물처럼 여기며 오직 주님만을 향한 어린이 같은 단순한 갈망으로 평생을 살아간 신앙의 수행자요 은혜의 회복자로 평가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녹여 주는 참된 향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깊고 내밀한 관계는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주님께 굴복시킴으로 이루어집니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주님께 사랑을 표현함으로 완성됩니다.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하심의 아늑한 품 안에, 그 감미로운 임재하심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아 알고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깨달아 알아서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물로 세례 받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평생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전파했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말라기와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갔다. 그는 광야에서 지냈고 낙타털을 옷으로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틴 남루한 야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먹는 음식도 광야에서 겨우 구할 수 있는 메뚜기와 석청뿐이었다. 그는 처절한 고행 속에 복음의 시작을 알렸고 불의한 헤롯의 악행을 고발한 죄로 붙들려 목이 잘려 처형되는 순교자의 길을 갔다. 그가 광야에 있을 동안에 수많은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에게로 나아가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 머물렀다. 그의 유명한 고백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1:7)는 말씀 말이다.

물론 세례 요한의 복음 전파에도 회개의 촉구와  죄 사함의 선언이 있었다. 그러는 그는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였다. 7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자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가복음 1장 1절의 시작이 마치도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같지 아니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고백 말이다.

여기서 발전해서 오늘 본문은 세례에 대한 강조로부터 복음서를 시작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세례의 비중은 어디에 있는가.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다. 오늘 보문은 세 가지의 세례에 대하여 말씀한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그렇다. 죄 사함과 회개가 없는 세례는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기 전에 선행 되어야 할 영적인 고민과 순례의 과정이 바로 이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 사도의 복음 전파의 내용 중에 이와 같은 강조가 나온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라고 했다. 어떻게 하다가 대강 세례도 받고 때가 되면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무언가 직분도 받고 직임도 받고 역할도 하고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 받고 거듭나고 새로워지고 변화되어 주를 섬기는 것과 어떻게 하다 보니까 물로 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고 직분도 받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무슨 봉사를 하고 누군가를 섬기고 무엇인가를 역할을 하고 하는 것이 다 중요하지만 회개가 우선이요 죄 사함이 먼저다. 이 영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믿는 무리들 가운데 뒤 섞여 있으므로 신자가 되었다고 착각하거나 자기기만이나 자기 위선에 빠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서 재판을 받고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벌금을 내기도 하지 않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세상을 살면서 재판 받는 차원의 그런 죄가 아니지 않는가. 물론 살인범이나 가정 파괴범이나 성 범죄나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 회령, 밀수와 같은 죄질이 분명히 들어나면 세상적으로 법의 심판을 받고 실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지 않는가.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게서 불순종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왔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갖 죄를 해결하고 씻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이 그러한 내용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금번 대강절과 성탄절이 이 같은 은혜와 영의 축복을 받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에 이런 은총이 임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절가 2절을 보라.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물세례.
교회는 물세례와 회개에 이르는 세례와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집이다. 2010년에 경기도 여주에 세워진 소망 교도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교도소이다. 그 재소자들 중에서 이번 2011년 12월 1일에 처음으로 32명이 세례를 받았다. 죄수들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참석해서 눈물을 흘리며 같이 예배드리고 꽃  다발도 전달했다. 비록 지난날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물로 세례를 받으며 새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결단한 것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 교인은 누구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장로교인 중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1886년 7월 11일에 세례를 받은 노춘경이다. 그는 유학자였는데 동양 서적들 중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을 읽다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스스로 선교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 후에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이나 스크랜턴의 어학 선생으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복음을 접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1885년에 언더우드를 만났으나 별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을 얻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가 겨울을 난 후에 알렌의 방에서 한문으로 쓰여 있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서를 읽게 되면서 복음을 깨닫고 믿기 시작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남 감리교 최초의 세례 교인은 해위 윤보선 대통령의 당숙인 윤치호 선생이다. 나라 밖에서이지만 한국인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인물은 이수정이다. 총신대학교 교정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 때에 민비를 충주로 피신시켰다가 환궁하도록 도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명성황후에 의해서 벼슬이 내려지지만 사양하고 고종이 박영효를 일본에 신사 유람단으로 보낼 때에 그 수행원으로 동행했다가 당시에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농학자인 쓰다젠을 통해서 성경을 선물로 받게 된다. 쓰다젠은 이수정에게 “그는 공자가 방안을 비추는 등불이라면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는 세상을 비치는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시는 분”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 그 후 7개월간 성경을 공부하고 일본의 야쓰까와 목사와 호주 선교사 녹스의 입회하에 1883년 4월 29일에 야쓰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수정이 최초의 세례교인인 셈이다. 세례 받고 마음이 뜨거워 진 이수정은 한국 백성들에게 모두 이 성경을 보급하고 싶은 열망을 갖고 루미쓰라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1884년 12월에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마가복음 성경 1,000권을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해인 1885년 4월 15일에 제물포 항에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을 때에 그 이수정의 번역 성경을 들고 들어 왔다고 하니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지 않은가. 그 후에도 이수정은 일본에 머물면서 당시 국비 유학생이었던 조선 청년 30여명에게 계속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성령 세례.
이 모든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함이다. 물론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란 물세례와 성령 세례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따로 따로 일 수 없다. 마가복음도 1장의 9절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신 장면을 소개한다. 그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께 임했다.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다. 성령은 평생을 주의 자녀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 성령을 소멸하거나 훼방하지 말고 환영하고 마음속에 모셔 드리고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 오늘 날 이 세상이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넘쳐 나기를 기도하자.

네팔 임근화 선교사의 간증을 가슴에 품자. 1990년 26살 청년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밟은 그 땅의 선교 현장을 지난 22년 동안 강력한 성령이 그를 사용하셨다. 한 어린이의 영혼이라고 구원하고 먹을거리 챙겨 살리겠다는 소박한 기도가 오늘 날 네팔 감리교단 설립의 복음의 시작이었다. 2011년 세계 감리교회는 남아공 대회에서 네팔감리교회(NMC) 설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초대 감독이 되었다. 264개 교회 26,000명의 신도, 11개의 초중고, 2개의 단과대학, 1개의 종합대학, 의사만도 100여명이 근무하는 1개의 종합병원, 4개의 고아원이 그의 손길에 의해 세워졌다. 성북동 골짜기를 누비며 새벽 신문을 돌리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 소년이 예수 영접하고 야간 신학교 나와서 선교의 거장이 되었다. 자신이 오늘 날의 모습을 알았겠는가. 성령의 세례를 제한하지 말라. 그리고 사모하고 쓰임 받는 성령의 주인공이 되라.

성령은 보혜사 즉 돕는 영이시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간구할 때에 임하신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를 향해 갈급한 마음을 가질 때에 임하신다. 성령은 기도하고 간구할 때에 임하신다. 성령이 임하면 죄와 악이 떠나가고 죄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고 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게 된다. 에이든 토저 목사의 책 <보혜사>에 보면, 성령을 지식으로 배워 보려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또한 오늘 날로 마가 다락방의 성령 강림을 체험할 수 있으니 성령을 재능이나 거짓으로 대하지 말고 참된 마음으로 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강조한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들은 유대 백성들이 마음에 찔림을 갖고 “형제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치던 모습처럼 간절히 성령 세례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리함으로 노인, 젊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환상과 예언과 꿈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요엘 시대의 축복을 모두가 받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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