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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감사한 기억(살전1:1-1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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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30 23:13 조회 19,995 댓글 0
 
사람은 기억하는 동물이다. 동물은 본능적인 습관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사람은 과거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을 살아간다. 부모가 아들딸을 낳아 기를 때에 저들을 원만한 부모의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고 감싸고 보듬어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모의 마음에 안정이 없고 기쁨과 감사가 없이 애들을 키우면 그 아들딸들이 온갖 상처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아기에게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먹이는 것이다. 엄마의 모든 것을 먹이는 것이다. 엄마의 성품, 엄마의 기질, 엄마의 됨됨이, 엄마의 모든 것이 품 안의 아기에게 내려 흐르는 것이다. 이미 한 아기의 인격은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관계 속에 자라나는 것이다. 태어나서도 엄마와 아빠와 가까운 가족들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해 간다. 그 모든 관계들이 한 사람의 기억 상자 속에 입력되게 되어 있다. 사람은 기억의 상자 속에 담긴 자기의 경험들을 사랑과 용서와 은혜와 평화와 화목과 관용 등으로 덮어 두지 않으면 언제 그 기억들이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기억 속에 입력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경험들을 감사라는 여과장치를 통하여 저장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같은 은혜를 체험하기 이전까지의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하기 이전의 모습은 자기 의와 자기가 믿고 신봉하는 자신의 율법 신앙의 틀에 꽉 갇혀서 다른 사람을 절대로 받아들이거나 포용할 줄 모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달라지고 변화된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사도 바울의 13편의 편지들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쓴 편지이다.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 여행의 때였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서 10절이 그 역사적인 배경이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여 3주 정도 만에 복음을 전하고 떠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 근동의 데살로니가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범적이었고 주변에 좋은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기억을 갖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복음 전파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첫째,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둘째, 전파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다.

그 때에 경건한 헬라 사람들 중의 큰 무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다. 또한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의 복음 전파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에 곧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어떤 시장의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가지고 다니면서 성을 소동시켰다. 바울의 선교단 일행이 야손의 집에 머무는데 그 사실을 알고 야손과 그의 몇 형제들을 읍장 앞에까지 끌고 가 버렸다. 저들은 바울 사도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고발했다. 또한 가이사의 명을 어겨 가면서 “또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며 다니는 자들을 집안에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소동을 피워 댔다. 결국은 야손과 그 주변 사람들이 읍장 앞에 보석금을 내고야 풀려 날 수 있었다.(행17:9) 그 밤으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 지역으로 피신하여 그 곳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지나간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성도들이 탄생되고 신자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믿음이 너무 모범적으로 잘 성장되고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저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칭했다. 따로 무슨 예배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들의 가슴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다. 그것이 교회인 것이다. 저들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의 신앙생활 제대로 잘 하는 소문이 각처에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소문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한다. 저들이 바로 그런 좋은 소문의 주인공들이었다. 저들의 신앙생활을 든든하게 하는 세 기둥이 있었다. 그 기둥의 이름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을 때마다 대하는 이 표현은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말씀인지 모른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말씀 말이다. 공동 번역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좋은 기억으로 기억하며 늘 감사한 기억 가운데 감사한 기도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실라나 디모데와 함께 대화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 기억을 갖게 하는 저들의 믿음이라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자.

택(擇)함 받은 성도들에 대한 감사한 기억.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은 종들이었다. 이것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믿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택하심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이 아니고는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과 환란을 잘 감당하며 이겨 나간 성도들이었다. 6절 말씀에 보면 저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의 선교 일행과 주를 본받은 믿음의 성도들이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4절에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라고 했다. 고난이 끊임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택함 받은 성도의 신앙을 잘 지켜 간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을 깨달아 알고 나면 그 믿음의 태도와 자세가 달라진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다.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처럼 그 택하심과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시련과 환란도 성도의 택함 받은 믿음을 결코 약하게 할 수는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렇다. 이것이 성도들의 믿음인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의 말씀 그대로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히11:36-38)

찬송 336장의 가사에 보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라고 찬송하고 있다. 이것이 선조들의 고난을 극복해 나가던 신앙이었다.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환난이 있다. 그러나 그 환난을 이겨 나가는 힘은 무엇인가.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의 힘이다. 그렇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질병과 곤고한 일들을 겪고 오해와 시기와 모함을 받을 지라도 각 사람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성령으로 인한 기쁨과 말씀의 힘이 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요 복음의 능력이요 성령의 감화인 것이다.

주를 본(本)받은 자들에 대한 감사한 기억.
사람이 누구를 본받느냐 혹은 무엇을 본받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요즘 소위 흔하게 말하는 롤 모델을 누구를 삼느냐는 말이다. 이 세상에 스승 삼을 만한 이들이 많겠으나 우리 모두의 영원한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사도 바울은 몰랐을 때에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다메섹 체험 이후로 철저하게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했던 복음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16절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구구절절이 사도 바울의 아비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편지이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편지하듯이 권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노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까지 초청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고백인가. 사도 바울은 직분뿐인 사도요 이름뿐인 명목상의 사도가 아니라 그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꽉 찬 주인공으로 살아갔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는 이런 교훈도 남겼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우리의 사역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고백이요 가르침인가.

우리 모두 이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할 것이다.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그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 믿는 시늉을 내는 모양뿐인 성도가 아니라 주변에 영향력과 감화력을 줄만한 성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본받아 가야 할 것이다.

믿음의 좋은 소문(所聞)이 각처에 퍼진 것에 대한 감사한 기억,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소문이 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원리이다. 당시에 데살로니가 지역 성도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의 소문은 각처에 퍼져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의 신앙생활의 모범이 전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다. 7절의 말씀이 그러하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다. 당시 헬라는 북쪽에 마게도냐와 남쪽에 아가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북쪽 마게도냐 주의 주도가 데살로니가였다. 또한 남쪽 아가야의 주도는 고린도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고린도전, 후서를 읽어보면 그런 염려를 갖고 편지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전혀 달랐다. 저들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8절에 나타나는 대로, 말씀 전파와 말씀 생활과 믿음의 소문이 각처로 퍼져 나간 것이다. 여기 8절의 시작에 ‘왜냐하면’ 이란 표현이 원래의 성경에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범적인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소망을 갖고 참고 인내하게 하였는가. 저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저들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언제나 성령의 기쁨이 넘쳐 났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받아 들였다. 그리고 흐트러짐이 없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때가 되니 저들의 소문이 처처에 번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상을 버렸다. 어리석은 과거의 신앙을 청산한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 온 것이다.
회개가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1907년 1월의 평양 대 부흥의 발단도 회개로부터였다. 길선주 장로가 둘째 날 집회 중에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가까운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관리를 부탁했는데 몰래 죽은 친구 돈을 떼어 먹었다고 회개했다. 이 회개의 물결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번져 갔다. 도적질, 살인, 강도, 사기, 공갈, 횡령, 음란, 불륜한 죄들을 토하듯이 서로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에 성령의 대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회 후에 어떤 사람은 술독을 깨트려 버렸다. 어떤 사람은 160킬로미터 4000리길을 가서 과거에 도둑질한 물건을 되돌려주고 회개 하고 돌아  오기도 했다. 독일교회의 자랑인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인간관계의 막힌 것이 뚫리고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 뚫린다.”고 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 간에 막힌 것이 뚫리려면 회개하여야 한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진실하시고 참되신 아버지이시다. 그 하나님을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했다.
하나님 우편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실 것을 기다리며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심판 날에 진실한 성도들을 죄와 악의 심판으로부터 건지실 구주이신 것을 믿고 전파하였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믿음이 분명했고 이것을 낱낱이 전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잘 믿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주를 섬기며 장차 오실 부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은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요 믿음의 바탕이 아닌가. 특별히 환난 중에 고통을 이기며 소망을 갖고 살아가던 저들에게 있어서 장차 주께서 노하심으로 세상을 신판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현세와 내세에 우리를 고통과 환난과 질병과 가난과 역경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브라함을 우상을 섬기던 소굴에서 불러 내셔서 말씀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이라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하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믿는 자의 의를 세상에 전해 주신 하나님이시다.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내시는 영원한 구주이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복음이시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는 구주이시다.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는 구세주이시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시는 주님이신 것이다.(눅4:18-19)

깊어 가는 가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소문나는 모범 성도가 되자, 그리함으로 서로에게 감사한 기억만 쌓아가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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