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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내 양심이 증언하노라(롬9:1-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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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7-31 16:33 조회 19,125 댓글 0
 
당신은 요즘 어떤 근심과 고통(苦痛)을 갖고 살아가는가. 사람마다, 가정마다 근심거리가 다르고 그치지 않는 고통 가운데 살아간다. 별의 별 걱정 근심 없이 그날그날 평안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자처럼 해결 되지 않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슬픔과 고통과 탄식과 불안과 초조 가운데 우울하게 살아가는 이웃들도 적지 않다. 다 하하 호호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가만히 가정사와 인생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해결 되지 않는 근심과 쉽사리 그치지 않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도 꽤나 있다. 병원에 가 보면 세상사람 모두가 환자인 것만 같다. 교도소에 가 보면 감옥살이하는 죄수들이 넘쳐 난다. 그 인물 멀끔한 아까운 사람들이 어쩌다 저렇게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까하고 불쌍하게 여겨진다. 고아원에 가 보면 세상 아이들이 다 고아 같고, 노인 요양 병원에 문병 가보면 세상 노인들이 다 그런 고통의 노년기를 살아가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오늘 이 편지를 로마 교인들에게 쓴 주인공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이 여기 로마서 9장에서 자기 진실을 고백하는 편지를 하고 있다. 자기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언제나 눌려 있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근심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동족 구원이다. 민족 구원을 위해서 큰 근심과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자신의 양심 운운하면서 드러내고 있다. 근심과 고통 속에 지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복음 전파에 집착하는 전도자의 모습인가.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 마치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의 말씀을 받기까지 머무는 동안에 산 아래의 형 아론과 백성들은 금을 모아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인도할 신이라고 광란한 적이 있다. 나중에 모세가 산에서 계명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며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모세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바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의 범죄를 대하는 모세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화가 잔뜩 난 모세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어 대는 백성을 바라다보면서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들고 내려온 말씀의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트려 버렸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 우상을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어다가 물에 뿌려서 백성들이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 모세는 형 아론과 한 바탕 크게 다투었다. 모세가 보기에는 형 아론이나 백성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방자(放恣)하기가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주목하는 광야의 이방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때에 모세가 진 앞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 그의 말을 듣고 레위 자손들이 다 모여 그에게로 왔다. 모세가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허리에 칼을 차고 금송아지 앞에 절한 동족들을 칼로 쳐 죽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한 날에 레위 사람의 칼에 죽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 금송아지 앞에 우상 숭배하던 자들이 죽은 것이다. 광야 길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기의 불안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이튼 날 모세는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신(神)이라고 섬기며 우상 숭배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며 기도했다. 그 때에 산꼭대기에서 기도한 모세의 기도 내용이 바로 본문의 사도 바울의 기도와 같은 기도였다. 자기의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하나님 이 못된 짓을 한 동족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슬픈 마음으로 드린 것이다.


동족 구원을 향한 바울의 열망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형제와 골육친척들 중에서 복음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몰라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들이 구원 얻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동족들이 누구인가. 사도 바울이 동족들을 배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전하며 이방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이 못마땅하여 호시탐탐 사도 바울을 죽여 없애려는 이들이다. 그 동족들 중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사울의 모습처럼 하나님은 알고 믿되 예수 그리스도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런 이스라엘의 형제들과 골육친척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처럼 간절하게 기도하고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간절함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9:3)라고 했다.

이 얼마나 간절한 동족 구원의 열망인가. 우리는 공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같은 한 가지 분명한 열망에 붙들려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공부도 이와 같은 복음 전파를 위해 해야 할 것이다. 결혼도, 직장 취업도, 사업도, 장사도, 가정생활도, 사회의 그 무슨 활동일지라도 온전히 그리스도가 이웃과 동족과 열방에 전파되는 일을 위해서 힘을 모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지난 주(2011. 7. 27)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 목사는 지난해 50권 째의 책으로 세상에 내어 놓은 마지막 책인 <제자도>(The Radical Disciple)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핵심 가치 8가지를 말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의존’이라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한다. 5년 전인 그의 연세 86세이던 2006년 8월 20일, 주일 아침에 그가 평생토록 섬긴 올소울즈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해 목사관에서 준비하다가 비끗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세탁물을 치우다가 회전의자의 튀어 나온 발에 걸려 침대와 책꽂이 사이로 고꾸라져 넘어지고 말았다. 크게 다친 것이 분명한 것이 도저히 일어 날 수가 없었다.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비상 단추를 눌렀고 몇몇 성도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 와서 구해 주었다. 올소울즈교회의 휴 팔머라는 젊은 목사가 그의 설교 원고를 챙겨서 존 스토트 목사 대신에 주일 설교를 해야만 했다. 마침 설교문의 내용은 주기도문에 관한 것이었다. 주기도문은  세 가지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내용과 따 다른 세 가지의 간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나머지 세 가지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의존하는 기도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를 악에서 건저 달라는 기도 내용이다.

그 날 아침 존 스토트는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 가고 말았다. 순식간에 마룻바닥에서 들것으로, 들것에서 응급차로, 응급차에서 병원 침대로, 병원 침대에서 수술실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실려 다녀야 했다. 그리고 부러진 고관절에 인공관절을 이식하는 대 수술을 마치고 의식이 깨어난 후에 오랜 기간 동안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즈음에서 그는 생의 중요한 진리를 제자의 도로 깨우쳐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철저히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의존의 성장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도 온 몸이 십자가에 의존되어 처절하게 죽어 갈 때에 그의 모습은 무엇엔가 의존하지 않고는 시체조차 버틸수 없는 버려진 존재 같았다는 점을 묵상한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그런 시작과 끝의 의 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구원의 큰 선물을 인류에게 안겨 주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웃의 반대를 무릎 쓰고라도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의 지평을 새롭게 넓혀 가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목적이다. 성전 건축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는 절대로 아니다.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의존의 삶이 서로에게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의 위엄, 하나님의 아들딸의 위엄을 잃어 버려서는 않된다. 그리고 그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의 삼일 장례 후에 장엄한 부활의 새벽을 맞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가 기대고 의존한 영원한 영생의 삶을 소개하고 증언하는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그런 처소를 마련하여야만 한다. 그곳에서 시작하여 지역과 도시와 민족과 열방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베이스캠프를 마련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칠월을 다 보내며 팔월을 맞이하는 우리의 가슴 속에 오늘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사도 바울의 이런 복음 전파의 열망의 불붙여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땅에 120여 년 전에 서로 앞 다투어 복음을 들고 선교하기 우하여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의 열정이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대전에서 감리교 신학대학에 들어가니까 첫 학기에 바울의 성서 신학을 가르쳐 주시는 선교사가 계셨다. 찰스 데이빗 스톡스(Charles D. Stokes, 1915-1997)선교사였다 . 그의 한국 이름은 도익서이다. 신학자요 목사요 선교사요 신학교를 세우고 발전시킨 교육가였다. 그의 아버지  매리언 스톡스(Marion B. Stokes)도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였다. 그의 아버지 도마련 목사의 네 번째 아들로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외국인 학교를 다녔고 에즈베리 신학교를 거쳐서 1940년에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평생토록 대전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전쟁 직후인 1954년에 대전 신학원을 세원 것이 오늘 날 신학 대학으로 발전하고 종합대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는 평생을 신학교의 교수로 남의 나라에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일에 앞장섰고 학교를 발전시키는 이사장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동족과 이방 민족에게로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공급되는 것인가. 우리나라로 하면 길선주 이기풍 김익두 최봉석 주기철 손양원 김구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이와 같은 복음 전파의 선봉에 섰던 지도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민족이 되기를 염원한 저들의 가슴 속에 복음의 열정이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강화도 저희 고향 마을에서 1883년에 유학자인 김철교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우(1883-1940)란 인물이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인 김용하에게서 정통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가 1901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가족이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김용하 씨는 나의 고조부와 함께 1906년에 고향 마을에 교회를 설립한 주인공이시기도 하다. 고향 교회 마당에 가면 자그마한 비문에 그와 같은 내용들이 적혀 있다. 그의 손자인 김용우는 1901년 9월에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두 달 뒤인 11월에는 청년 속장이 되었다. 몇 해 후(1907년)에 서울로 와서 배재 학당에 입학하여 서양 공부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 고등과 3회로 졸업하였다. 계속하여 배재학당 대학부에서 공부하던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뜻이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가까운 친구가 마적 떼의 습격으로 죽고 말았다. 슬픔과 충격 가운데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에게 세 곳에서 취업 제안이 왔다. 서양 사람이 운영하는 금광에서 월급 70원을 주겠다고 했다. 정부 관청에서는 판임관이란 직임을 주겠다고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동제일교회에서 최병헌 담임 목사가 그를 전도사로 동역하도록 불렀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전도사의 사례비는 매달 10원이었다. 서양 사람의 금광에 취직하면 그 일곱 배인 70원을 준다고 했다. 고민하던 그는 물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서대문 밖 북한산 자락 깊숙이 있는 진관사 뒤 절벽에 있는 바위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의  나중에 쓴 책 <승리의 생활>에 보면 그 때에 일주일째 기도하는데 “새벽 긔도시에는 겻헤서 누가 말하여 주는 것갓치 ‘이 어리석은 자식아! 엇지 그리 미련하냐! 네게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네게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이며 인생의 뎨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텬하를 주어도 박굴 수 업는 것은 너의 생명이 아니냐?’ 하는 소리가 들엿다. 엇지도 하엿든지 오날지도 그 말이 귀에 졍졍하야 이즐내야 이즐 수가 업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새벽에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뻐서 껑충 껑충 뛰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평생토록 산제사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 경험 후에 산에서 내려와서 오늘 날 평택 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3년부터 정동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늘 설교의 부족을 깨닫던 그는 매일 마다 남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다. 1914년 11월 21일 주일 날 밤 12시경이었다. 추운 밤에 남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는데 성령이 임한 것이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오른 손을 붙잡 아 주시는 환상도 보았다. 그의 나이 31살 때의 체험이었다. 그 날 이후로 전국에서 그를 부흥회 강사로 모셔 가는 일이 늘어났다.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부흥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수 천 명에 달했다.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그는 나중에 협성 신학교에 김창준 손정도 등과 함께 공부하였고 1916년의 그의 자질이 인정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34살에 동대문교회 담임 목사를 시작으로 2년 후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8년간 담임 목사로 목회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상동교회와 수표교 교회를 거쳐서 다시 정동제일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섬기는 동안 그가 목회하는 교회들마다 큰 부흥이 일어났다. 1938년에 양주삼 총리의 뒤를 이을 감독 선거에 여덟 명의 후보가 나와서 이틀 동안 21번의 투표를 계속해도 삼분의 이를 득표하는 이가 없어서 다들 지쳐 있을 때인데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가 날아들어 와서 김종우 목사 곁에 앉았다. 김종우 목사가 양 손을 펼쳐서 비둘기를 환영하자 인사를 하듯이 날아올라서 다시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일 후에 다시 22차 투표를 했는데 많은 표를 얻게 되어 23번째 투표에서 그를 감독으로 추대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는 목회자이든지 그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바탕 위에서 형제자매와 골육 친척과 동족과 열방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에 사도 바울과 같은 이런 심정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그런 마음과 열정을 품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
바울이 안타깝게 근심하며  그치지 않는 고통 중에 구원시키기를 원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이 당시에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은 몹시도 바울을 미워하고 대적하던 이들이었다. 바울은 그런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안타깝게 구원의 열망을 갖고 지낸 것이다.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뒤 돌아 보면서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축복들을 나열하고 있다. 4절에서 말씀하는 여섯 가지 요소들이다.

양자(養子)됨과 영광(榮光)과 언약(言約)들과 율법(律法)을 세우는 것과 예배(禮拜)와 약속(約束)들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요소들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그와 같은 은총을 오늘 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 각 사람에게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신 것이다.

양자됨이란 무엇인가. 혈통적으로는 비록 친자가 아니지만 법적으로 아들딸이 된 것이다. 우리는 아무 자격과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이다.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갖 좋은 것을 유업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물론 물질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하고 누리지 못할 지라도 그렇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온갖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만한 그런 심성과 그런 성품과 그런 넉넉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된 것만으로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로마서 8장 15절이 그런 말씀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도,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다.

이로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이는 십계명의 말씀을 받던 모세가 체험한 영광이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식양과 규격대로 성막을 건설하고 지성소 안에 법궤를 모시던 때의 영광이다. 또한 다윗의 소원을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을 봉헌할 때의 영광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를 나타내는 영광이기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 정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머무시던 때의 영광이요 부활의 영광이요 승천하실 때의 영광이요 천사들의 호령 나팔 소리 가운데 영광중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이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언약 가운데 살아가며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로마서 9장 1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라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성도의 모습이 그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인생의 온갖 해답을 얻어야 한다.

금번에 적지 않은 이의 목숨을 앗아간 수도권의 큰 비로 여러 사람의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 신세계 그룹의 구학서 회장의 부인인 고(故) 양명숙 권사(63세)도 한 사람이다. 그는 우면동 자기 집의 지하실에 내려간 사이에 물길이 그의 집 지하실을 덮쳤고 그의 목숨을 앗아 가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성가대와 셀 리더로 활동하며 숨은 봉사 활동과 선한 사업에 앞장서던 분이었다고 한다. 큰 그룹의 부인인 행세를 전혀 하지 않고 겸손하게 남들을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6가정을 돌보고 섬기던 셀의 책임자로 칭찬이 자자했다. 젊은이들에게라도 늘 배우려는 자세였고 할 수 만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섬기고 베푸는 일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주일아침이면 7시 50분에 정확하게 성가대 연습실에 나타나 자리를 충실히 지키며 예배를 소중히 여겼던 주인공이라고 한다.  우리 감리교단의 복지시설인 태화관을 비롯한 밀알학교와 같은 봉사 단체에서도 열심히 봉사 활동에 앞장서던 그였다고 한다. 회장의 부인이었지만 어디가야 싼 물건을 살 수 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손수 싼 물건을 살 수 있는 마트에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검소하게 생활해 왔다고 한다. 그런 반면에 선교사들을 돕는 등의 후원 문제가 나오면 발 벗고 나서서 이름 없이 선한 섬김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이스라엘 사람인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의 말씀 안에서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언약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새 이름이 아닌가. 우리는 야곱의 후손으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거짓말과 궤계와 술수 가운데 사단에게 지지 말고 마귀와 귀신에게 끌려가지 말고 우상 숭배와 이방의 온갖 잡신에게 끌려가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양심을 따라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복음의 증언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우리가 믿고 선포하며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곧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장엄한 선언인가. 5절에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예수는 혈통으로 해도 조상들에게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셨다. 그래서 그 분은 언제나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고 영원무궁토록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광스러움을 세세에 찬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양심의 증언을 따라 전하고 또 전하며 증언하고 또 증언하는 복음의 사람들로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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