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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우리가 가진 것(고후4:7-15)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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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7-09 23:06 조회 23,564 댓글 0
 
3년 전인 2009년 7월 22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 개기일식이란 달이 태양을 가려서 얼마동안 태양의 모양이 가리어지는 현상이다. 한국시간으로 그날 오전 9시 34분부터 시작된 개기일식은 12시 15분까지 2시간 15분정도 계속되었다. 그것은 61년 만의 개기일식이며 다음 개기일식은 2035년 9월 2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개기일식이란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지구와 지구의 둘레를 공전하는 달이 일직선이 되는 현상이 개기일식인데 지구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해를 가리는 달의 그림자가 지표면의 일부에만 드리워지기 때문에 개기일식 현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태양이 잠시 가리어져서 초승달 모양으로도 보이고 반달 모양으로도 보이는 것은 몇 시간동안 관찰하는 흥밋거리일 수 있지만 만약에 태양이 무엇엔가 가리어져서 계속해서 지구에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지고 말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의 구조와 자연의 축복 중의 하나가 태양의 혜택이다. 지구의 어떤 지역은 너무 더운 곳이 있고 반면에 어떤 곳은 너무 추운 곳이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태양의 혜택을 적당하게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참으로 천연 혜택이 풍성한 땅 중의 한 곳이다. 그런 우리나라의 축복을 애국가로 부를 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가사의 국가를 부를 수 있는 것은 거의 찬송가 수준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단군이야기를 신화화하기도 하고 불교나 유교는 물론 산과 바다와 나무와 바위와 짐승 등을 신적 숭배 대상으로 섬겨 오는 미신이 오래도록 지배해 오던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왔고 그 복음을 깨달아 영접하고 믿는 민족으로 변천해 온 기독교 선교 127년의 역사는 가히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 항에 도착한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첫 발을 내디딘 그 시작이 오늘 날의 한국 교회의 첫 씨앗이었던 것을 뒤 돌아 보면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씨앗은 심으면 자라나게 되어 있다. 물론 심는 자의 수고와 물을 주는 자의 수고가 연합하여 합력한 선을 우리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심고 물주는 수고 이외에 그 심겨진 씨앗이 잘 자라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헤롯의 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부모의 고향 마을인 나사렛에 들어가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나사렛에서 자라난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며 해마다 절기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앙을 키워 가셨다.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으로 붙들려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일 만에 하늘나라의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셨다. 오늘 날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인사는 언제나 ‘마라나타’ 즉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재림 신앙에 붙들려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 고백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신 후에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수많은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똘똘 뭉쳐서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아 인 것을 반대하였다. 자신들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부인했고 그런 소문이 번져 가는 것을 막아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막으려 하면 막으려 할수록 더 빨리 소문나는 법이다. 이 세상에 냄새와 소문은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 소문과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불길처럼 유대와 사마리아와 주변 국가의 국경을 넘어서 땅 끝까지 번져 가게 하였다.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의 큰 도시 중의 한 곳인 고린도에도 복음이 들어갔다. 고린도는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 여행 기간이었던 A. D 49-52년 기간 중에 대략 주후 50년경에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곳이다. 고린도교회는 그 도시가 그러하기도 하였지만 로마의 본토 여러 곳과 아프리카, 팔레스틴과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신흥항구상업도시로서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각종 이교의 문화가 우상숭배와 함께 물결쳐 밀려들어오는 곳이었다. 고린도 지역은 교회마저도 분열이 심하고 각종 부끄러운 범죄를 비롯해서 예배 의식조차 문란해지고 각종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심각성을 느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의 제 3차 전도 여행 중에 보낸 첫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고 여전히 사태가 악화되자 사도 바울이 직접 방문한 적도 있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마음 아픈 소식들이 들려오자 복음을 복음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참 복음의 가치와 그 숭고함을 깨우쳐 전하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편지한 편지가 고린도 후서이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현상까지 일어나면서 사역과 관계의 위기를 느낀 사도 바울이 이러한 편지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건강한 신앙으로 회복시켜 보려는 안타까운 목자의 심정을 갖고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사도 바울은 첫 편지와 이 후서 중간에 소위 ‘눈물의 편지’라고 별명 붙여진 또 다른 편지를 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편지가 오늘 날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그런 마음이 절절이 느껴지는 말씀이 나온다.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면,

“나는 대단히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쓴 것이 아니고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쓴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의 마음이요 목자의 마음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가는 곳곳 마다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분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천하 만민들이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기를 소원하는 열망이 불붙던 사도였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자고 격려하고 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이와 같은 것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다. 본문에 보면 7절과 13절에 ‘가졌으니’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을 가진 자란 말씀인가.

우리가 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인간의 몸은 연약하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대로 질그릇과 같다. 인간의 육체는 병과 사고로 병들기도 하고 약해지고 무너진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라고 했다. 인간의 육체가 낡아지고 질그릇처럼 쉽게 금이 가고 쪽이 떨어져 나가고 깨어지는 것으로 끝이라면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는 선언처럼 인간의 몸을 병들고 늙고 약해지지만 하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점점 새로워져 가는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4장 2절에는 인간을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같다고 했다. 모세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다. 물론 요즘 인간 수명이 평균적으로 늘어서 장수 시대에 살아가긴 하지만 인간의 육체의 수명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도 잘 보이던 모세도 120세에 하나님이 부르시니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보배이다.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이다. 그 보배란 무엇인가. 이는 ‘구원의 복음’이며 6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는 것이다. 말씀 그대로 구원의 복음에는 심히 큰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능력이지 인간에게서 들어나는 능력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의지하고 간구하고 소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 능력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나약해 보이지만 그 큰 능력이 보배로 임한 성도는 그 큰 능력의 힘을 힘  입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예수님의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서 비추이게 해 주신 빛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화를 보면 그 얼굴 주위에 둥그렇게 환하고 강한 빛이 번져 나가는 것을 형상화한 어려 종류의 성화를 보게 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6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에 기초한 성경적인 성화들이다.

성도들의 삶은 이천년 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중세의 성도들이나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성도들이나 누구나 다 내 질그릇 같은 육체 안에 보배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보배는 그것으로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로 하면 밭을 갈던 농부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면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가지고 와서 그 밭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신앙인의 모습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복음의 능력인 것이다. 과거에도 오늘 날도 나라 안과 밖에서 이와 같은 복음의 큰 능력을 위하여 보배를 간직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려고 헌신하고 평생을 서원하는 이들이 계속하여 탄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보배인 구원의 복음은 일단 한번 깨달아 알고 나면 우리를 강권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진 자들이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나면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복음 전파의 능력과 부담이 우리를 강권하게 되어 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불이 붙으면 말릴 길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 복음의 능력인 보배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해야 신앙생활이 신앙생활다워 지는 것이다.

이런 복음의 큰 능력이 있어서 소록도의 한센 병 환자 곁의 성자 손양원은 한센 병 환자들의 피 고름을 감싸 안으면서 살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여 사랑으로 받아 준 것이 아닌가.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 (賀川豊彦, 1888-1960)는 고베(神戶)에서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번 자살 시도를 하던 그는 로간 선교사와 마이어스 선교사를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수님을 만났고 일본 교회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그리스도교 전도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였다. 고베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고베의 빈민굴에서 그리스도교 전도활동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反戰)운동 혐의로 헌병대에 감금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A theology of Anus'라고 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밑을 닦아 주는 신학이란 말이다. 나중에 그는 실명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난하고 병들 자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시절에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다. 저서로 자전적 소설인 <사선을 넘어서>와 <새벽이 오기 전에> 등이 있다.

그러므로 보배를 가진 질그릇 인생의 믿음이란 안팎의 환란을 이기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 그대로이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왜 그러한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예수의 생명 또한 그 몸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
우리의 믿는 믿음은 감상적인 믿음이 이나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증거가 있는 믿음이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시편 116편 10절 말씀의 고백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기억하며 바울 자신이 고난과 환란과 비방과 조롱과 역경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던 믿음처럼 오늘 날 우리들의 믿음도 그러하여야만 할 것이다. 오뚝이와 같은 전천후 믿음으로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주를 향한 믿음으로 이겨 나가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환경과 여건과 조건을 탓하며 주저앉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환경을 돌파하고 나아가는 권세와 능력을 덧입어야 할 것이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체험한 이후에 사도 바울로 변화되어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즉 성(聖)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십대에 사생아를 낳는 탕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4세기의 성자의 길을 걷는 변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로마의 땅이었던 북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태어난 그는 17 살에 한 젊은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1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아데오다투스(Adeodatus, 신으로부터 주어진)라는 아들을 낳기도 한다. 이 아들은 389년 어린 나이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 품에서 살았다.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하던 어거스틴은 당시의 존경 받던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를 만났다. 결국은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회심을 결심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하나의 회심 계기는 밀라노의 정원에서 뛰어 놀던 어린이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였던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을 찾아 읽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그는 세례를 받은 이듬해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원 생활을 하였다. 그의 <참회록>은 오늘날도 유명한 기독교 고전 중의 한 권이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은혜와 깨달음 즉 인식론(認識論)과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 프란시스코(Francesco d'Assisi, 1182-1226)는 대 부호 상인의 아들의 신분과 그 많은 유산 상속의 혜택을 훌훌 벗어 버리고 20살에 회심한 후에 예수님의 사랑 실천의 마음을 따라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복음 안에서 평생토록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람이 되었다. 44살을 살았는데 42살 때에 성흔(聖痕)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오늘 날도 유명하지 않은가.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선의 선장으로 아프리카 노예 무역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악한 생활을 청산하고 풍랑 속에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23살 때에 회심한 후에 독학으로 영국 성공회의 목사가 되어 평생토록 복음을 위해서 살아갔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305장 찬송)와 같은 찬송시를 쓴 변화와 고백의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이던 초기와 일제식민지시대의 핍박기와 6. 25 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수많은 신앙 선배들이 지켜 왔던 그 믿음의 마음은 시편 기자의 믿음의 마음이요 사도 바울의 믿음의 마음이었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시116:10)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의 마음도 이런 믿음의 마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자의 선언이요 권면이요 고백인가.

우리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소망을 가졌다.
주어진 환경과 깨달아 아는 진리의 복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 생활을 계속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고 했다. 성도된 우리 모두에게는 분명한 부활 신앙이 있어야만 한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도 헛되고 오늘 날의 우리 신앙도 헛되고 만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기독교 복음은 윤리요 도덕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의 신앙이 우리 모두의 신앙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믿는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요 우리고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원한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복음 전파자의 마음이었다. 고린도 후서 1장 6절의 반복이라 할 것이다. 고난과 환난과 위로와 구원의 복음과 이 모든 것을 전파하려는 것은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을 깨달아 알게 될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그 고린도 교인들이 누구인가. 오늘 날 바로 나 자신이요 우리가 아닌가. 이런 영광을 계속하려 돌리려는 소망을 갖고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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