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대사를 발전시켜온 배후에는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이 세 자매의 삶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송가황조>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 자매는 하이난 섬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상해의 감리교 목사였던 송가희 목사의 여섯 남매 중의 세 딸들이다. 송가희는 중국 관동성과 저장성의 재벌 가문에서 나서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목사가 된 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 왔다. 송가희 목사는 인쇄업을 해서 성경을 출판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때에 친구이면서 둘째 사위가 될 손문을 만나게 되었다. 송가희는 세 딸을 모두 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에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나중에는 세 딸 모두 미국 유학을 보내서 또 다른 넓은 세상에 가서 다른 많은 문화를 보고 배우며 꿈을 키우고 돌아 와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고 축복해 주었다. 세 딸은 송가희 목사 내외의 소원처럼 잘 자라 주었다. 큰 딸 송애령은 당시 중국 최고의 부자인 공상희와 결혼하였다. 둘째 딸 송경령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손문과 결혼하였다. 셋째 딸 송미령((宋美齡, 1897-2003)은 나중에 중국 국민당의 총재가 된 10살 위인 장개석(蔣介石,1887-1975)과 결혼하였다. 송미령은 미국 웨슬리 대학을 졸업한 후에 1927년에 장개석과 결혼하면서 중국 근대 역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송미령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미국을 통해 중국 국민당의 활동 자금을 지원 받게 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36년 12월 12일에는 만주군이 장개석을 체포하고 감금하자 몸소 서안으로 가서 주은래를 만나 협상을 벌여서 남편 장개석이 석방되도록 했다. 그 후 중국에서 일본군의 세력을 몰아내는 항일전쟁 중에는 간호사들을 도와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난민 대책을 진두지휘하고 미국을 방문해서 모택동의 공산당에 맞서는 국민당을 도와야 할 것을 호소하는 등 실질적이고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항상 장개석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함께 하였다. 송미령은 1943년 2월 18일에는 아시아인 최초요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 유명한 주간지인 ‘TIME'에는 두 번이나 표지 인물로 선정되고 ‘올해의 남편과 아내’, ‘용의 여인’이란 주제의 특집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개석이 카이로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 회담할 때에는 그 곁에 나란히 앉아 남편 장개석을 통역한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송미령은 1960년 말에는 미국이 존경하는 10대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송가희 목사의 세 딸들 중에서 두 딸은 자매간에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내인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경제력과 나라와 권력이 결국은 송가희 목사의 세 딸들에게 골고루 다 주어졌고 저들 세 자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으로 남편을 도와서 중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세 주요 인물이 되었다. 저들의 바탕은 하나님 신앙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믿음이었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던 메이링 궁 2층 거실 중앙에는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앞에는 성경책이 펼쳐있고 장개석과 송미령은 항상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손문과는 달리 장개석이 송미령을 만날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평생 잘 믿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장개석은 아내 송미령과 함께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의 명문가는 저절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신앙생활교육과 성경에 기초한 큰 꿈이 인물을 길러 내고 역사 앞에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대만은 매년 4월 5일을 장개석 기념일로 그를 추모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유언을 통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이며
나의 기독교 신앙은 동요된 적이 결코 없다.”
는 말을 남겼다. 1930년 10월 23일에 장개석에게 세례를 베푼 츄리엔 후아 목사는 “장개석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치고 그 후로 평생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안에서 살아계시게 한 인물이다.”라고 나중에 장개석의 일생을 평가하였다.
우리나라로 하면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가문을 자주 언급한다. 그의 가정은 5대째 하나님을 믿어 오고 있다. 김승규 장로의 8형제자매들은 모두 다 신실한 신앙으로 자라났고 살아가고 있다. 큰 형 김홍규 장로는 순천 매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둘째 김병규 장로는 명보 그룹의 회장이다. 셋째 김성규 장로는 유성T&G회사의 사장이다. 넷째 김명규 장로는 전 국회의원을 지냈다. 다섯째 아들인 김승규 장로는 전 국정원장을 지냈다. 매년 100명이 훨씬 넘는 가문이 다 같이 모여 예배하는 신년 하례 감사 예배 때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성경을 통독하고 우수하게 신앙생활한 가족들을 선정해서 상도 주고 특별 찬양도 하고 연주할 기회도 갖는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증거를 서로 간증하며 나누는 것이다.
소나 나귀는 길들여서 쓴다. 말은 훈련을 통해서 명마가 된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인물이 되어 가는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그의 어머니 수산나 여사에 의하여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예나 오늘 날이나 태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조기 교육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인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존 웨슬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17세기의 영국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계속되었다. 18세기 영국의 인구는 500만 명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8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늘었다. 그 중의 10% 정도가 런던에 모여 살았다. 존 웨슬리가 태어난 엡워스라는 마을은 런던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던 때였다. 18세기 말에 가서야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가난한 지역은 더럽고 지저분했다. 위생 시설이 거의 없었다. 쓰레기가 길거리와 강변에서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실 물은 너무나도 귀했다. 식료품 값은 너무나도 비쌌고 그나마도 공급이 딸려서 살수도 없었다. 가난한 집에는 질병이 많았다. 도시에 모여 들긴 하였지만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자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이 술과 폭력과 매춘과 도박에 빠져 살아갔다. 그나마 기술이 있는 장인이나 숙련 노동자들이나 견습공들은 남들보다 수입이 높아지면서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서 좀 더 높은 수입을 벌어들이며 살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에 14시간씩을 일해도 별로 버는 돈이 많지 못했다. 그러하다 보니 부녀자들도 다 같이 일터에 나가서 일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4-5살 된 어린이들까지도 굴뚝 청소를 시켜서 돈을 벌게 하거나 탄광과 공장에서 일을 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그 반대로 부자들과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귀족으로 살거나 부유한 상인들은 사치하고 평안하게 안락을 누리며 살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양과 소를 키우거나 강과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탄광과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살아갔다. 또 어떤 이들은 밀과 보리를 제분하는 일과 빵을 굽는 일과 양복을 만들고 옷을 수선하는 일과 대 장장이나 말굽을 만드는 일과 수레를 고쳐 주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차라리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들 보다는 농촌 생활이 더 나았다. 그런 당시에 백성들의 대부분은 영국의 국교인 영국교회 교인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적은 무리들이 캐톨릭이나 장로교나 침례교나 퀘이커교에 속해 있었다. 영국의 국교인 영국교회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선한 의도와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난한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일에는 별로 큰 공헌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시대에 태어났다. 존은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 사이에서 19명의 자녀 중에서 15번째로 태어났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는 분리파라고 구분하는 청교도 교회의 목사였다. 존의 가정은 할아버지도 목사였다. 존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수산나에 의하여 철자한 생활 교육과 신앙 교육과 공부에 열심을 다하도록 지도 받았고 지금도 유명하지만 당시에도 유명하던 옥스퍼드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존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영국교회에 소속하게 되었고 거기서 목사 안수를 받고 링컨 주의 습지에 위치한 엡워스 교구의 교회를 맡아서 한 교회에서 40년간 목회하였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학문 연구에 열심히 있었고 시를 쓰는 엄격하고 양심적인 목사였다. 욥기의 주석도 썼고 찬송시는 연합감리교회의 찬송가에도 실린 찬송이 되었다.(#293, Behold the Savior of Mankind.)
사무엘 웨슬리 목사의 부인이며 존 웨슬리 목사의 어머니인 수산나는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비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강인한 성격에 헌신적이었고 목사 부인의 역할도 잘 감당하였다. 수산나는 19명의 자녀 중에서 10명이 살아남았는데 3명의 아들과 7명의 딸들을 모두 엄격한 조기 교육으로 철저하게 잘 키워 낸 것으로 유명하다. 존 웨슬리는 1903년 6월 28일에 태어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늘 광범위한 독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종교와 신학에 관한 책을 두루 섭렵하였다. 남편인 사무엘 웨슬리 목사가 출타 중에는 목사관에서 직접 기도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들 부부는 종교와 정치에 있어서 의견 대립이 될 때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17번에 걸쳐서 태어난 19 남매 중에서 10명의 자녀들이 죽는 슬픔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장남인 사무엘 2세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나머지 7명의 딸들은 대개 어렵게 살았다. 15번째로 태어난 존과 18번째로 태어난 남동생 찰스는 서로의 평생 목회에 있어서 친구이자 동역자이며 절친한 형제였다. 저들 삼형제는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목사를 따라서 모두 다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존은 위대한 사역을 감당해온 목회자로 동생 찰스는 복음적인 찬송시를 써서 6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남기는 음악인으로 살아갔다. 성탄 찬송 중에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돌려보내세 구주 오늘 나셨네”(126장)이나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23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늘에서 내리사 우리 맘에 항상 계셔 온전하게 합소서. 우리 주는 자비하사 사랑무한 하시니 두려워서 떠는 자를 구원하여주소서.”(15장)는 세계인이 즐겨 은혜롭게 부르는 그의 대표적인 찬송들이다.
7명의 딸들뿐만 아니라 장남 사무엘 2세와 존과 찰스 삼형제를 영국 교회의 목회자로 키워 내고 특히 존을 세계적인 목회자로 배출한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에게 신앙과 학문과 교회와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나중에 존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어렸을 적의 교육에 대하여 두고두고 회상하며 언급하고는 하였다. 존은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했다. 가난한대도 런던의 유명한 사립학교인 차터하우스에 11살 때부터 유학하였다. 18살 때에는 그 유명한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졸업할 때에는 고전, 현대 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고 신약성경을 헬라어 원어로 술술 읽을 정도의 능숙한 실력가가 되었다. 그는 졸업 후 2년 만에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뽑히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날 이후로 대학에서 제공하는 연구원의 특권과 자유를 누리며 웹워스의 아버지 교회에 가서 아버지의 목회를 열심히 돕기도 하였고 이년 동안(1727-1729)은 담임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인 172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에 링컨 칼리지에서 강의 부탁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에 크라이스트 처리 칼리지에 다니는 동생 찰스는 영적 성장을 목표로 다른 학생들을 불러 모아서 소그룹으로 규칙적인 만남을 계속하였다. 이 모임에 초청 받은 존은 그들의 비공식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기도와 성경공부와 금식과 성만찬과 사회봉사와 감옥 방문과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들을 규칙적으로 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다른 학생들은 이와 같은 경건한 모임을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붙여진 비난이 “성례주의자, 성경벌레, 신성구락부(Holy Club), 규칙주의자(Methodist)” 등이었다. 결국은 규칙주의자란 별명이 나중에 오늘 날 감리교의 이름이 되었다. 이때부터 존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을 본받고 싶은 열방이 강렬하였다. 그의 주변 친구들은 존을 “초대 기독교를 본받으려 하는 자”라고 불렀다. 1935년, 존이 32살 때에 아버지 사무엘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장례 후에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의 선교단체인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존은 이와 같은 일들이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 선교지에서 다시 영국 런던으로 돌아간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밤 8시 45분경에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날의 세계 감리교로 발전한 시작이었다. 그 다음 해인 1739년부터는 조지 휘필드의 권유를 받아 들여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옥외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주께로 돌아왔다. 시골, 도시, 시장, 탄광, 술집 골목, 창녀촌에서 까지도 회개하고 주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이 일어났다. 8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 존 웨슬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는 말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이 같은 역사적인 인물 존 웨슬리도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 특히 그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를 통하여 양육되고 교육되고 길러진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가르치라’는 강조가 1절과 7절에 반복된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는 것인가. 왜 가르치라는 것인가. 법과 질서를 지키면 자기 자신에게 복된 것이다. 신명기 5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며 살면 이 세상에서 살게 되고 복되게 되고 장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 중에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라고 했는데 이는 ‘prosper' 즉 번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명령하신대로 잘 따라 순종하며 오래 살면서 번성하게 된다고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광야에서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잘 지키며 살라는 강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행할 만한 민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과 손자들이 평생토록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섬기며 살아갈 것을 스스로 믿음으로 다짐하며 후세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여기 ‘가르치라’는 말은 1절에서는 ‘가르치다. 교육하다, 훈련하다. 길들이다’는 뜻의 라마드(dm'l)이다. 그리고 7절의 ‘가르치다’는 솨난(@n"v;)이라고 하는데 이는 ‘송곳으로 콕콕 찌른다, 날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1절의 명령(命令)과 규례(規例)와 법도(法度)란 무엇일까.
명령(命令)이란 미츠와(hw:x]mi)라고 하는데 이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우고 침묵과 순종을 요구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세워주고 어떤 지위에 임명하며 서로 결속관계를 갖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만 180번 반복하여 나오는 단어이다. 이는 ‘계명’(誡命) 즉 ‘commandment’를 말한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계명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며 준행하며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 질 뿐만 아니라 그 삶의 지위도 존귀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시다.
규례(規例)란 호크(qjo)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긁다, 새기다, 쓰다’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 128번 사용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규칙과 법령과 관습과 의무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다가 보면 복된 결과가 선물처럼 열매처럼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법도(法度)란 미쉬파트(fP;v]mi)라고 하는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으로 구약 성경에만도 400번 이상 사용 되었는데 이는 마치도 재판관이 피고인을 재판할 때 기준으로 삼는 법전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처럼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구분하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율법의 말씀들을 성경을 통하여 강조하시는 것일까. 2절 끝에 보면, “네 날이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좋은 말씀들은 듣고 행하면 그 모든 것이 내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고 복된 것이다. 하물며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 행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3절에 보면,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잘 되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랴.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잘 보라. 이는 신명기 5장 32절과 33절의 반복이다. 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행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래야 나도 복을 받고 자손들이 번성하게 된다는 축복의 약속이시다.
금번의 대만 목회자 부부 150명 초청 집회는 많은 경비가 드는 큰 집회였다. 그런 집회를 한국에서 참석한 목회자들의 다섯 교회에서 조금 씩 선교비를 모았다. 그래도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 많은 경비를 대만 현지의 젊은 실업가가 개인적으로 다 충당한 것이다. 진육민(陳陸民, 1963-) 전도자는 안양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아래서 화교로 태어났다. 수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화교 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인천에서 화교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만에 건너가서 건축토목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건물 설계를 주로 하는 토목설계 사무소의 소장이다. 오래도록 신학을 공부해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올 7월이면 목사가 되는 사업가이다. 얼마나 겸손하고 친절하고 싹싹하고 경우가 밝은지 모른다. 잘 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잘 쓸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그 바쁜 사업가가 직접 나서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계속되는 집회와 세미나들을 내외간에 참여하여 통역자로 섬기고 수고하였다. 얼마나 보기 좋은 커플이었는지 모른다. 집회 후에 나중에는 자기 타운 하우스의 일이층 두 층을 다 내어 주고 학교 다니는 삼 남매의 자녀들과 가족들이 호텔 방을 마련하여 불편하게 지내면서 우리 일행 10여명에게 모든 집안 공간을 다 내어 주었다. 복음 안에서 끝없이 누군가를 섬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부와 그의 가정을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바라고 소원하기는 교회와 가정들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몸소 행하고 자손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며 살아가는 그런 신앙 부흥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는 말씀인가.
4절 이하에 보면,
유일신 신앙을 가르치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을 가르치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의 말씀들을 마음에 새겨라.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강론해 주어라.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여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에까지 기록해서 집을 드나들면서도 보게 하라.
이번에 대만에서 만났던 진육민 전도사의 집 현관에 들어서니 하얀 대리석 기둥에 ‘그리스도는 나의 집의 주인이시다.’는 뜻의 ‘기독시아가지주’(基督是我家之主)라고 새겨 넣은 글씨를 보았다. 응접실의 전면 벽에는 타일로 예수님의 성화를 크게 부조하였다. 그렇게 살아가란 말이다. 환경도 그렇게 하고 마음도 그렇게 하여서 길가나 돌 짝 밭이나 가시떨기가 뒤 덮지 않는 좋은 땅이 되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번성하는 인생이요 그런 가정으로 살아가라는 축복의 약속이며 선언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역사에 대대로 축복된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 연구소에서 유대인들의 뇌를 연구하였다. DNA 분석을 해 본 결과 성경 말씀을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외우고 늘 묵상하며 성장한 유대인들의 뇌는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키아즘(Chiasm) 적 뇌의 구조라고 한다. 성경 말씀을 계속하여 읽고 외우면 뇌가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대인들의 테필린(tefillin) 교육이라고 한다. 테필린이란 반복교육이란 말이다. 유대인들은 613개의 계명의 말씀인 미츠보트(mitzvot)를 외우고 또 외운다. 그 내용은 하라는 내용 248개와 하지 말라는 내용 365개로 되어 있다. 사람의 뼈마디가 248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라는 말씀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면 뼈마디가 쏙쏙 쑤시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암시적인 교훈이 담겨 있다. 또한 365개의 하지 말라는 계명을 무시하고 함부로 살아가면 어떤 괴로움과 쓰디 쓴 고난이 닥아 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365날을 하루하루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에 살든지 613이란 숫자의 번지를 가진 땅이나 건물은 그 값을 흥정하지 않고 사들인다고 한다. 숫자의 상징성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적인 풍습이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연세에 상관없이 2절의 말씀처럼 나 자신과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며 살아서 이 땅에서 그 살아가는 날이 장구할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신앙의 명문가문을 이루어 가는 복되고 번성하는 축복의 가문을 가꾸어가는 성도와 교회로 주를 섬겨 나가야 할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