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은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전도활동은 점점 더 왕성해져 갔다. 120성도의 성령 받은 증거는 건물도 없이 모이는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 왔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던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던 한 사람! 성전 미문 앞에 누군가가 늘 데려다 놓던 걷지 못하던 걸인을 일어나 걷고 뛰게 한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소문이 나자 사도들에 대한 관심과 성령 받은 무리들에 대한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다. 물론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이 역사하신 기적이요 치유의 사건이지만 당장 주목 받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었다.
이 같은 치유의 기적 사건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관리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장 싫어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신앙이 전혀 없던 유대인들을 말한다. 산헤드린의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이었다. 저들은 육체의 부활이나 영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로마의 침략 세력에 빌 붙어서 하나님 신앙과는 상관없이 정치적인 출세와 경제적인 안정만을 꿈꾸던 자들이었다.
그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였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전했다. 결국은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앞장서서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붙잡아서 옥에 가두는 사태로까지 번져 갔다. 그러나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무리들은 남자만도 오천 명을 넘어서는 거대한 부활 공동체로 부흥해 가고 있었다.
옥에 갇힌 사도들은 감옥에서 새 날을 맞았다. 대 제사장인 안나스(재위, AD 6-15)와 당시의 현직 대제사장이며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재위, AD 18-36)를 비롯한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였다. 6절에 가야바 주변의 유대 권력의 핵심 세력이 다 모인 가운데 사도들을 가두기도 하고 심문 하려고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들의 손에 의해서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력이 다시 예루살렘에서 활력을 얻기 시작하자 초긴장하기 시작한 단면 중의 하나이다. 유대의 관리와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인 그 중앙에 사도들을 죄인 취급하여 불러냈다. 그리고 질문하였다.(행4:7)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 때 대답하기 위하여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나섰다. 항상 베드로의 성격과 기질과 믿음 상태가 드러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베드로는 침착하고 담대하게 말하였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행4:8-10)
그리고 베드로를 성령 충만하게 만든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차근차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은 붙잡히고 옥에 갇힌 죄인의 말이 아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의 위대하고 힘찬 복음적인 설교의 선포시간이 되었다. 너희 모두가 도대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역사의 진실을 몰라서 그러하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너희 모두는 알라.’고 정한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다. 유대의 관리들과 대제사장들은 앞장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 저들은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걸인이 건강해 져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을 고치고, 회복하고, 힘 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강건하게 하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김선태 목사(1941-)는 앞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이다. 그는 10살 때인 6.25 전쟁 때에 불발탄을 잘못 만졌다가 그만 실명하고 말았다. 피난 가지 못한 동네 아이들과 뚝 섬에서 놀다가 불발탄이 폭발해서 현장에서 7명의 친구들이 죽고 자기만 양쪽 눈을 실명 한 채 살아남았다. 전쟁 중에 두 눈을 잃은 불행이 시작되었다. 얼마 후에는 공산당의 폭격으로 부모님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전쟁은 계속되고 오고 갈 데가 없었다. 친척들도 외면하는 구박덩어리가 되었다. 음식 쓰레기통을 더듬거리며 뒤져서 먹고는 식중독에 걸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전쟁 중의 겨울에 한데서 지내다가 동상에 걸려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계속해야 했다. 살았다 하나 산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해에는 잠 잘 곳이 없어 더듬어서 남의 집 나뭇광에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그 나무가 모두 옻나무였다. 온 몸에 옻이 올라서 진물이 나고 가렵고 열독이 나고 숨이 끊어지기 직적인데 어느 할머니가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정성스럽게 치료해 주고 기도해 주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그 할머니의 도움으로 옻병에서 고침 받았다. 그 할머니의 말씀이 “나는 가난하고 못 배운 노인이지만 너는 앞을 못 보더라도 악착같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축복의 말씀을 듣고 그 노인의 집을 떠났다. 그는 고아원에서도 잠을 줄여 가며 점자를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했으나 대학에 갈 길이 묘연했다. 5. 16 혁명 정부에서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대학 가는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는 문교부에 32번이나 장학관을 찾아 갔다. 갈 때마다 문전 박대를 받았다. 한번은 또 다시 문교부 장학과를 찾아 갔다. 자기는 공부할 기회를 못 갖더라도 후배 중에 자기 같은 불운한 이들이 공부할 기회를 열어 놓아야 하겠다고 작심을 하고 시각 장애인도 대학 공부할 기호를 달라고 작대기를 휘두르며 농성을 벌였다. 그 때 마침 문교부에 출입하던 기자들에게 자신이 알려지게 되면서 기자들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제도적으로 시각 장애인은 국가고시를 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문교부 장관 특전으로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정상인들과 함께 시험을 봐서 숭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후에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헬렌 켈러와 같은 삼중고의 여인도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면서도 3개의 박사 학위를 받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자기도 그런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회는 왔고 미국 맥코믹 신학대학원에 유학해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중에는 명예 철학 박사, 명예 신학 박사 학위까지 받아서 그가 청년기에 소망하던 대로 3개의 박사 학위를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2012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도 언론마다 그의 승리 인생을 다시 다루었다. 올해 71살인 그는 실로암안과병원의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는 지하 4층, 지상 8층짜리, 2500여평의 안과 전문 병원이 있다. 실로암안과병원이다. 그 병원은 1986년에 개원한 이래로 지난 26년 동안 3만 6천명의 눈을 개안 수술한 세계적인 병원이다. 그동안 실명 위기의 환자 35만 명을 무료 안과 진료해 주었다. 46인승 버스를 개조해서 전국을 찾아다니면서 무료 안과 진료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1,000명이 넘는 앞을 못 보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 병원 원장인 김선태 목사는 시각 장애인이다. 그의 공로가 세계에 소문나서 2007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서 1958년에 록펠러 재단이 증여한 재단으로 형성된 세계적으로 명예로운 상이다. 김선태 목사는 실명한 후에도 어려서부터 주일이면 반드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구걸한 돈 중에서도 새 돈을 구별해서 십일조를 드리며 어린 시절과 청년의 날을 보냈다. 세계는 그를 한국이 낳은 헬렌 켈러라고 별명 붙여 부르고 있다.
예수 이름으로 건강해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병이 낫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과 태도가 건강해져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잘 믿기 시작하면 그런 기적과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 한 사람 겨우 예수 믿고 잘 살다가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내가 체험한 예수님, 내 안에 들어와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과 진리와 사랑의 힘이 물결치듯이 내 주변에 점점 번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그 이름 권세를 제대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면 내 삶이 바꾸고 내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하고 선언하고 선포하고 시인하고 새로운 인생을 주 예수 이름 그 권세를 의지하여 힘차고 활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김선태 목사가 가장 좋아 하는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
예수님의 생애에 비밀이 있고 예수님의 이름에 신비가 있다. 예수님이 이름이 들어간 나라와 민족마다 복을 받았다. 예수님을 영접한 가정과 인생마다 달라졌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은 분이셨으나 나중에 집 모퉁이의 가장 소중한 머릿돌이 되신 분이시다. 시편 118편 22절에 보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고 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개인마다 가정마다 그런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시편의 그 다음 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23)라고 했다. 지금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연세 많은 장인 안나스와 그 문중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쳐 증언하고 있다.(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렇다. 우리 주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은 초라하고 흠모할 만한 외모가 없으심 마른 땅에서 나온 연한 순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짐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아 주셨다.
벤살렘 교회를 건축하고 한국에 부흥회 인도 차 방문해서 성구를 수출해 가고, 길가의 안내표석도 한국에서 크게 보령 오석으로 제작해서 큰 글씨의 한국말 교회 이름과 작은 글씨의 영어 표기로 제작해 갔다. 그 때 같이 주문 제작해서 태평양을 건너 뱃길로 가져 간 것이 머릿돌이었다. 새 성전의 머릿돌을 제작하여 그 벽 속에 당시 교회의 자료들을 타임캡슐로 제작하여 넣고 봉인하여 머릿돌로 가린 기억이 새롭다.
예수님도 시편 118편의 이 말씀을 마태복음 21장 33절에서 46절까지에 인용하신 적이 있으시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런 삶을 사신 주인공이시다. 주인이 보내는 종들마다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고 또 때리고 돌로 치고 죽였다. 나중에는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도 포도원 밖으로 쫓아내고 죽여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을 대제사장 가야바가 앞장서서 그렇게 죽였다. 유대의 온 문중이 다 나서서 담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켜 죽였다. 당연히 죽어야할 강도 바라바는 살려주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붙잡아다가 때리고 못 박아 죽였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신구약 성경의 주인공들이 다 그러하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룻, 한나, 다윗, 예레미야, 다니엘 등 하나님이 쓰신 역사적인 인물들은 다 버려진 돌과 같은 운명에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요긴하게 쓰임 받은 인생들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러한 인생들의 고난 받는 삶의 중심에 오셔서 인간이 당할 모든 육체적인 고난과 고통을 다 당하신 후에 죽이시고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요 믿는 자들의 영원한 머릿돌이시다. 노아 때 세상 사람들은 마음으로 이미 노아를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 안에 넣어 살리셨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 그의 가는 길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동네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중을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은 인생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는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였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늘 우물 샘을 파면 원주민들에게 빼앗기는 나약한 이삭 같아 보였지만 이삭의 나중은 점점 존귀해져 갔고 창대해져 갔다. 그가 나중에 판 샘물인 르호봇의 샘 줄기는 이전에 팠던 샘 줄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 축복의 샘 줄기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활 중심에 함께 계셨다.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다. 지팡이에 보따리 하나 꽂아 메고 출발했던 야곱의 나중은 창성해 갔다. 야곱은 버려진 돌 같은 인생에서 건물 모퉁이의 머릿돌 같은 인생으로 다듬어져 갔다. 요셉도 마찬가지다. 그의 배 다른 열 명의 형들은 가히 추종할 수 없는 날들을 살아갔다. 하나님은 요셉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요셉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은 그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요셉을 점점 형통하게 이끌어 가셨다.
다윗도 그랬다. 베들레헴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나던 이새의 8번째 아들인 막내 다윗을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으시고 장차 나라의 왕이 될 자로 세워 가셨다. 당시에 사울이 임금이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은 사울에게서 떠나서 소년 다윗에게로 향하고 계셨다. 사무엘 하 5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버려진 것 같고, 지금 형통하지 못하고, 지금 우울하고, 지금 답답 하고, 지금 잘 되는 일이 별로 없고, 지금 나약한 인생이라고 결코 초조해 하거나 포기 하지 말라.
야구도 9회 말까지 가야 경기다운 것이다. 축구도 전반전에서 잘 안됐다고 너무 초조해 하면 안 된다.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전반전에 너무 잘 되고 득점 많이 했다고 자만해도 안 된다. 나중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오직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고난의 풀무를 거쳐서 정금처럼 다듬어 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살자.
인생이 마치도 야구 경기와 같고 축구 경기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물론 월드컵 축구를 해도 8강, 4강을 거쳐 우승 후보로 올라가기 까지 험난한 경기의 숨 막히는 실력 경쟁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연극도 결코 제 1막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 2박도 있고, 제 3막도 있다. 신앙생활은 환경의 변화나 내 주변의 남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문제다. 나 자신이 나의 신앙을 어떻게 지키고 관리하고 유지해 나가느냐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가 그렇지 않나. 그렇게 나약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비겁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던 베드로가 지금 가야바와 온 유대 관리들의 문중이 다 모인 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버림을 받았으나 버려진 돌과 같은 인생이었으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에 세워진 영원한 머릿돌이 되게 해 주셨다.
구원(救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임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임하는 것이다. 본문의 베드로의 증언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9절과 12절에 구원이란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하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열어 놓으신 유일하고 영원한 구원의 길이시다.
<당신이 축복입니다>는 책을 쓴 숀 스티븐슨(Sean Clinch Stephenson,1979-)은 세계적으로 특별한 희귀 질병을 갖고 미국에서 태어났다. 뼈가 계란껍데기처럼 쉽게 부서지는 희귀병인 ‘골성형부전증’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실제로 200번도 넘게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으며 늘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야 한다. 열 살 때 다 자란 키는 90cm다. 몸무게는 20kg이다. 숀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지는’ 수백 번의 고통을 겪으며 깨달은 것들을 간증한다. 누구나 스스로를 더 귀하게 여기고 아끼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남자’라고 소개하는 그는 사설 심리치료소를 운영하는 심리학자이고 전 세계적으로 저명한 스타 연설가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늘 축복으로 가득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는 가장 축복받아야 할 순간인 탄생의 순간에 의사로부터 차라리 24시간 안에 죽는 편이 더 낫다는 치명적인 선고를 받았던 주인공이다. 다른 저서로는 <How Youth Can Succeed>가 있다. 2011년 7월 22일, MBC 스페셜을 통해 한국 언론에 소개된 적도 있다.
그는 말한다.
오늘이 힘들어도 축복입니다.
아직 끝이 아니기에 축복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축복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날들이 축복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는 또 말한다.
“할 수 없는 것 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행복은 선택이다.
행복한 일이 일어나서 행복한 것은 참 행복이 아니다.
스스로 행복을 느껴라.”
숀은 그런 몸으로도 하루에 100번씩 팔 굽혀 펴기도 하고 100번씩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역기도 한다. 그리고 그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격려와 용기를 주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수많은 시민들과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그를 직접 만나보고 그에게 상담 받기를 원하고 그의 강연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신앙이 무엇인가. 예수 이름 안에서 구원 받은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라. 그리고 날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그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증거하며 살아가라. 절대로 자신을 자학하지 말라. 숀 스티븐슨의 아버지는 아들 숀에게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가르쳐 주었노라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기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소망 중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자. 예수님께서 버려진 돌이 집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셨듯이 우리 각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고 행복한 하나님의 아들딸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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