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운 순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간다. 성령 받고도 늘 기도하며 살아가던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40년간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걸인이 고침을 받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진 그 뒷이야기가 본문 말씀이다. 베드로의 설교 형식인 본문에 신약에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는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했으나 영어 성경에서는 ‘새롭게 되는 시간’(times of refreshing)이라고 했다. 헬라어로는 아납쉬식스(ajnavyuxi")라고 하는데, “바람으로 서늘하게 한다, 상쾌하게 한다, 원기를 회복한다, 강하게 한다, 경감시킨다. 해방한다, 휴식을 준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사용되었다. 한 마디로 하면 구원의 결정적인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와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나 유다가 경험한 구원의 은혜 체험이 다 이런 순간인 것이다. 성 어거스틴도 토마스 아켐피스도 요한 웨슬리도 모두 다 이런 구원의 감격의 순간을 경험하고 한 시대 쓰임 받은 주의 종들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교회 역사에 소개되는 주기철, 손양원, 길선주, 김익두 이 분들이 모두 이 같은 새롭게 되는 날이요 상쾌하게 되는 날이요 변화와 자유와 해방과 쉼을 주시는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고 성령의 원기를 회복해서 복되게 존귀하게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병들었던 몸이 건강해지면 어느 순간에 고통이 떠나가고 평안한 쉼이 찾아 오고 몸과 마음이 일순간에 상쾌해지지 않는가. 가난이나 궁핍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재물과 돈이 생기면 그 가난과 궁핍이란 것이 아침볕에 안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지게 된다. 마음의 고통이나 번민이나 슬픔이나 초조함이나 우울함이나 괴로움이나 답답함이나 고민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들이 어둠이 살아지고 광명한 아침이 찾아오듯이 어느 순간에 싹 살아지고 내 마음 속에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소망과 평안과 안식이 찾아오는 순간에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일순간에 싹 살아지고 마는 것이다. 새롭게 되는 날, 새롭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과거에는 난지도가 서울 시민들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 매립장이었지만 지금은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영산홍을 비롯한 각종 꽃나무와 아름다운 크고 작은 나무들과 산책로가 가꾸어지고 심지어는 골프장까지 건설된 전혀 새로운 곳으로 변모한 것처럼 말이다. 지리적으로 새로워지고, 시간적으로 새로워지고, 환경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회복의 은총을 받는 순간에 과거의 그 모든 더럽고 추하고 부끄럽고 악한 죄악들이모두 다 싹 살아지고 마는 것이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24살인 최주희 양은 앞장서서 2012년 1월에 그 추위를 무릎 쓰고 1,000여 미터에 이르는 벽화를 그려 내는 일에 앞장섰다.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주변에 동기를 부여했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나서서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건대 앞에 놀러가려는데 좋은 곳 좀 추천해달라고 물을 때마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최양은 건대 앞은 술 마시고 밤마다 시끄럽게 놀기에는 좋지만 친구들에게 추천할 만한 재밌고 유익한 장소가 거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특히 밤마다 매춘을 권장하는 낯 뜨거운 전단 쪽지들과 각종 지저분한 쓰레기로 뒤덮인 거리를 볼 때마다 답답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이 자주 가는 건대 앞 카페 인근 거리를 직접 바꾸기로 결심했다. 최양은 과거에 미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된 브라질 출신의 26살 난 청년 아티스트 다닐로 제팔리토에게 “우리 학교 앞 거리 담벼락에 함께 벽화를 그리자”고 제안했다. 마침 한국에서 자신의 전시회를 열 계획이었던 제팔리토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제팔리토와 최양의 친구들이 합류하면서 벽화 작업단은 10명으로 늘었다. 페인트도 독지가들의 힘에 의하여 마련하였다. 겨우 내내 추위를 무릎 쓰고 벽화 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지난 날 벽에 눈길을 두기 민망한 장면으로 덕지덕지 붙여져 있던 나이트클럽의 성인 광고 등이 모두 사라진 전혀 새로운 거리로 변모했다. 한 여대생의 작은 꿈과 생각이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복음의 힘이란 이런 것이며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힘과 기적의 시작이다. 본문의 배경은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10절까지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걸인으로 지내던 걷지 못하는 불쌍한 장애인이 베드로의 선언에 의하여 걷게 된 기적의 사건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늘 평소에도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는 했다. 하루는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 기도를 위해서 성전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날도 여전히 미문 앞에서 만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다른 날과 다르게 확신에 찬 믿음으로 치유와 회복을 비는 선언을 하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 때에 그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많은 백성들이 그 걸인이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모두 다 크게 놀라고 있었다.
마침 기도를 마치고 성전을 나서던 베드로와 요한을 알아보고는 그 고침을 받은 걸인이 붙잡으며 베드로를 통해서 고침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여기 솔로몬의 행각이란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편에 있던 곳으로 평소에 랍비들이 이곳에서 제자들이나 백성들에게 종종 성경의 교훈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그 때에 그 곳에 모여들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는 백성들에게 베드로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그렇다. 매우 당연한 설명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 중에 어떤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마치 내가 고친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이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각 사람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믿음을 통해서 기사와 표적을 보이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영광스런 일들 중에서 그 어느 크고 작은 한 가지라도 그 영광을 스스로 가로채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만 한다.
베드로는 마침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솔로몬의 행각 곁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을 전한 내용 중에 특별히 19절 말씀에 보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정한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전하는 새롭게 되는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 하실 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11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리어 가신 예수님께서는 흰 옷 잎은 두 천사들을 통하여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때에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었다. 벧새다 광야의 배고프던 이만 여명의 무리들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부르게 먹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해 주셨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기적도 베풀어 주셨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일들이 넘쳐 났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 하시고 승천 하신 이후에 오늘 날 까지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곳 마다 새롭게 되는 일들이 넘쳐 났다. 그와 같은 일들은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과 늘 드리는 기도 중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항상 ‘새롭게 되는 날’(times of refreshing)이 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인 것이다. 베드로는 선포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times of refreshing may come from the Lord)
그 새롭게 되는 날이란 물론 각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 조금 씩 다 다른 크고 작은 소원일 것이다. 과거에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보라 그 날이”라는 제목의 복음 성가가 있다.
보라 그 날이 곧 다가 오리라
생명의 주 예수 영광중에 오실 날
네가 그것을 곧 보게 되리라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리라.
이런 가사의 복음 성가이다. 당신의 그 날이란 어떤 날인가. 당신이 새롭게 되길 원하고 바라는 그 날이란 어떤 날인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새롭게 되는 날이란 어떤 날인가.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조상들의 하나님.
베드로는 저들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였다. 예수님을 고난과 죽으심의 자리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되어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한 순간에 멈추는 섭리가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언급하는 조상 대대로 역사하시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하필 종이라고 하였을까. 이사야 52장 13절에 보면,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의 형통 중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을 끝없이 미워하고 대적하고 죽이려 하였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동족인 저들 유대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다.
너희가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넘겨주었다.
너희가 빌라도가 놓아 주려는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님을 거부하였다.
너희가 도리어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 주도록 불의한 요구를 하였다.
너희가 생명의 주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사야 52장 13절의 예언처럼 종의 상태에서 고난의 자리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형통하게 받들어 높여서 지극한 존귀하고 영화로운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셨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영화로운 회복인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영원한 영화를 덧입고 하는 성도의 영화를 회복의 선물로 선물해 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 같은 복음의 사실을 몰라서 비방하고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를 체험한 이후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나중의 온 생애를 다 바쳐서 순교자의 영광스러운 길로 나아가지 않았는가.
그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定)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義)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榮化)롭게 하셨느니라.”
고 했다. 그렇다. 영화롭게 하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나중 최고의 영광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사시다가 영화롭게 부활 승천하신 영화로우신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음의 쓴 잔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면서 드린 마지막 기도가 나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기도인가. 성도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을 이런 믿음으로 살다가 이런 기도를 드리고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으로서 제대로 영광스럽게 잘 살면 때가 되면 나라에서 그의 공덕을 인정하여 국가적인 포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무공훈장이나 표창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개인과 가족과 가문에 영광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후에라도 잘 못 살면 포상을 백지화하거나 표창한 일을 백지화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군대의 장군이라고 이등병으로 강등하는 경우도 있다. 불명예 제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어떤 관료나 공무원이나 행정가나 군인이나 그 어떤 기업가나 그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영화를 구하는 생을 매 순간 사셨던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17장 4절과 5절에 보면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는 담담한 기도의 내용 속에 그런 심정과 평소의 신앙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엄숙하고 숙연한 임종 직전의 기도인가. 성도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이 같은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의 주를 살리신 하나님.
동족 유대인들은 동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생명의 주님을 다시 살리셨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다. 그렇다. 베드로가 증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의 성령 받은 첫 설교 중에도 그런 고백을 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다. 베드로가 증인이요 요한이 증인이요 예수님의 또 다른 열한 제자들이 모두 다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과 예수님의 아우들이 다 이 일의 증인이다. 이 일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 생명의 주님을 유대인들이 죽였다. 가야바와 안나스가 앞 장 서고 역대 대제사장들과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공모해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러나 생명은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 생명은 죽여도 사는 것이다. 생명보다 더 강한 죽음, 생명보다 더 힘이 센 죽음이란 없다. 생명은 처음부터 생명이요 영원히 생명인 것이다. 생명은 본질이며 바탕이며 근본이며 생명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이길 수 있는 어둠이란 이 땅 어디에도 없다. 생명을 이길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전혀 없다. 생명보다 더 강한 것은 언제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때 비겁했고 두려웠고 무서웠고 그래서 피하고 도망가고 숨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 생명의 능력을 회복한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담대하게 죽으셨던 생명의 주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권능을 선포하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보다 강한 것이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은 영원한 것이요 끝이 없이 무궁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고 증언하고 있다.
그 생명의 주님으로 인하여 기적이 일어났다. 이 일이란 태어난 후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일어서서 걸어 보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구걸하던 장애인을 주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고쳐 주신 그 일을 말한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고 했다. 40년간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완전한 회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전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고, 베드로 곁에 모여들어서 심히 놀라워하는 중에 이 같은 베드로의 힘찬 복음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하였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베드로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 예수님의 이름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기도하고, 믿고 선포하고, 믿고 찬송하고, 믿고 살아가야 한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라는 제목의 351장 찬송 2절에 보면,
원수마귀 모두 쫓겨 가기는 예수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주를 찬송합시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고 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갖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며 선포하며 나아갈 때에 기사와 표적이 날마다 순간마다 넘쳐 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고 찬양하고 믿고 나아가야 한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환경 보고 주저앉지 말고 굳건한 믿음으로 앞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지침이 없고 날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과 같은 새로운 힘이 공급될 줄로 믿는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알지 못해서 짓는 죄가 있다. 17절이 그런 내용을 언급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때가 되면 이룩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계획과 섭리를 말씀하시고 때가 되면 그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능력과 권세가 있으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도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알려 주셨던 말씀하신 말씀들을 때가 되어 이루셨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을 살아가야 과거와 다른 새롭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될까. 본문의 19절 말씀이 그러한 사실들을 교훈하고 있다.
첫째, 회개하여야 한다.
둘째,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대답이고 비밀이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를 용서 받고 죄 없이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갈 때에 각 사람의 영혼에 새롭게 되는 날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실낙원>(The Paradise Lost)을 쓴 영국의 시인이며 작가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회개는 영원한 궁전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라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면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가득하게 좌정하시고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충만하게 된다. 그리할 때에 주님 안에서 온갖 지혜와 권능과 은총과 평화가 골고루 임하게 되어 새롭게 되는 날을 살되 영원히 그런 축복을 누리는 천국 백성의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20절 말씀처럼 주님께서 구원받을 성도들을 위하여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이다. 또한 이는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들을 온전한 만물의 회복(回復)으로 완성하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주님의 재림을 통한 회복의 은총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고 했다. 우리 다 각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이 같은 날을 은총의 선물로 받아 누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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