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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시는 하나님(창50:15-21)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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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10-09 00:26 조회 20,051 댓글 0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답고, 힘이 있고, 감동적인 것은 ‘용서’라는 것이다. 용서는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에덴의 범죄하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다시 살게 한 힘이 하나님의 용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짐승의 피 흘린 가죽 옷을 입고, 용서 받은 새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마지막 기도 중의 하나가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용서를 받고, 용서를 체험하고 나면 인간다워진다. 원래의 좋고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용서는 죄와 악의 상태에 버려진 인생을 선한 인생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용서란 막연한 사랑을 생활 속에 구체화하는 놀라운 힘이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인간은 용서의 은총에 의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이다.

폴 마이어를 주목하라. 그는 평범한 집 아들로 자라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려고 이 곳 저 곳에 취업 원서를 접수했으나 무려 57번이나 취업 면접에서 퇴짜를 맞고 말았다. 남들 같으면 기가 죽고 실망해서 자포자기하고 말텐데 그 후에도 끈질기게 노력해서 반드시 성공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보험 상품 판매였는데 몇 년 후인 27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의 목표를 이렇게 정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방법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선행을 행하는 것”

그는 청년의 때부터 평생을 수입의 절반을 하나님과 세상의 그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목표를 지켜 오고 있다. 그는 자기의 성장 환경이나 주변 여건을 적극적인 신앙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소화하고 바꾸어서 좋은 쪽의 변화를 이끌어 내며 자신을 발전 시켜 온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책, <기부왕 폴 마이어의 좋은 습관 24가지>, <폴 마이어의 성공시크릿> 같은 책은 누구나 읽어도 도전이 되고 참으로 좋은 책이다.  교육, 컴퓨터, 소프트웨어, 금융, 부동산, 인쇄, 제조, 항공 등 40여 개가 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인재교육기관 LMI(Leadership Management International Inc.)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교육프로그램은 세계 70여 개국에서 23개 언어로 번역, 배포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의 쓴 책과 저작물과 기록물들의 판매 인쇄만도 20만 불이니까 우리 돈으로 2조에 육박한다. 70-80년 전에 록펠러가 있었다면 오늘 날을 폴 마이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가 주로 자주 사용하는 말들은 “희망, 변화, 신념, 능력, 열정, 도전” 이런 단어 들이다. (hope, change, conviction, ability, passion, challenge) '목표의 설정이 인생을 성공으로 만들어 간다.“고 했다. 지금 한인으로서 미국 벨 연구소의 CEO가 된 김종훈 사장의 인생 성공 철학도 그런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면 때가 되면 그 목표한 자리에까지 그 목표가 나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야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바탕으로 사랑과 용서와 베풂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서 위대한 성공을 이룩한 기독교 사업가인 폴 마이어의 책 중에 <용서의 심리학>이란 책이 있다.  갈등과 대립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용서'를 통해 지혜롭게 해결함으로써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행복한 인생의 안내서요 성공적인 삶의 지침서와 같은 책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저자인 켄 블랜차드는 이 책을 접한 후에 “한 번만 읽지 말고 책을 읽고 또 읽으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해서라도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라”고 적극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내용은 특히 남에 대한 원한과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불행을 넘어서서 구원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용서의 힘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사랑과 용서가 지닌 부드러운 힘을 통해 악을 선으로 바꾸고, 원수를 친구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중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이런 것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아버지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분노를 초래한 사람이 친척 중 한 사람일지라도 있으면 절대로 예외를 두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유일한 동서인 오토 이모부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아버지는 이모부에게 “내 집에서 독일어를 사용하지 말게. 내 말을 어기면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줄 알게나. 이제 우리는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영어를 사용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토 이모부는 또 다시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모부는 더 이상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오토 이모부는 우리 집이 있던 도로 끝에 차를 멈추어야 했고, 이모는 그곳에서 약 100미터를 걸어와서 우리와 함께 만찬에 참여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이모부는 차에서 혼자 기다려야 했다. 나는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몰래 뒷문을 빠져나와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모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뒤쪽으로 잽싸게 달려간 다음, 다시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에게 추수감사절 음식을 전해주곤 했다. 아버지의 여자 형제는 모두 셋이었지만, 그 가운데 미국에 건너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에 고모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우리 집에서 불과 40마일 떨어진 곳에 살았다. 고모는 내 생일날에 내 귀가 크다며 우스워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고모와 모든 대화를 단절했다. 그 후 35년 동안, 아버지는 고모가 가까운 곳에 살았던 유일한 친척이었는데도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 태도는 아버지 자신은 물론, 우리 가족을 거북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용서를 베풀 줄 몰랐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친구와 어울려 논 적이 있었다. 헌데, 바로 다음 날 아버지는 나에게 그 친구와 다시 놀지 말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그 친구의 아버지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 이유를 내세워 친구하고는 물론이고, 그 집안사람들 가운데 누구와도 어울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용서를 거부했던 아버지 때문에 친구관계가 단절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불굴의 의지를 배웠다. 근면한 노동윤리도 아버지에게 배웠고, 항상 발전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기상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훌륭한 스승이자 본보기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서를 모르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아버지는 7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당한 뒤에 유명을 달리했다. 아버지가 7년 동안 맞은 진통제의 일종인 ‘데메롤’ 주사만 해도 5천 번이 넘는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질병에 시달렸던 원인이 용서하지 않는 태도에 있었다고 추측한다.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모두를 용서했다.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저녁상을 차렸다. 그 음식을 만드는 데는 거의 하루가 다 소비되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몹시 상한 듯이 보였다. 아버지는 저녁식사 시간을 화풀이 시간으로 삼기로 작심했는지, 식탁보 네 귀퉁이를 척척 접어 음식과 접시를 모조리 싸 담아 뒷문 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에게 냄비를 집어던지며 맞서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 아버지와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곤 했단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성경구절 하나를 인용하더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을 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마 18:22)라고 덧붙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은 나의 마음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어머니가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용서를 선택했다. 어머니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삶보다 용서하며 사는 삶을 원했고, 그로 인해 늘 평화와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렇듯, 나는 양극단을 경험하며 자랐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좋아했다. 지금도 부모님의 가르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용서의 문제만큼은 분명한 선택이 필요했다. 즉, 용서하는 삶과 용서하지 않은 삶, 둘 중에 더 나은 쪽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나는 열여섯의 나이에 모두를 용서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둘 중에 더 큰 평화와 기쁨을 주는 삶을 깨닫게 되었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처럼 용서 받아야 할 때에 적절한 용서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깊은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십년 이십년 혹은 평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용서받는 것도 은혜이지만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 할 때에 내 안에 안식과 평화와 행복과 감사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제도나 법을 바꾸는 것은 쉽다. 환경이나 여건을 바꾸는 것도 그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바뀌어야만 하고, 바뀌기를 소원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악이 선으로 바뀌고, 거짓이 진실로 바뀌고, 불의가 정의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여야만 한다.

아무리 역사가 바뀌고 세상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인간성 즉 죄와 악과 허물의 문제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 세 가지의 단어가 모두 다 등장한다. ‘죄(罪), 악(惡), 허물’이란 표현 말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어쩌다가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야곱의 아들들이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증손자들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나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 아들 이삭도 사십에 장가들어 육십에 겨우 쌍둥이 아들들을 낳았다. 아니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게 해 주신 것이다. 그 쌍둥이 형제 중에서 에서의 동생인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계승되어 갔다. 야곱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두 아들들을 낳았다. 그리고 외동딸 디나를 낳았다. 그 열두 아들들 중에 세 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난 서로 배가 다른 열 명의 아들들이 작당을 해서 또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 요셉을 발가벗겨서 애굽에 팔아 버린 사건이 있었다. 오래된 사건이다. 오늘 여기 창세기 50장은 아버지 야곱이 연세 147세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이후의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다.

아버지 야곱을 장례한 형제들의 마음에 큰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왔다. 과거에 열 명의 형제들이 의합하여 음모로 동생 요셉을 애굽에 인신매매로 노예시장에 팔아 버렸던 주범들이기 때문이다. 죄라는 것은 세상의 법에서는 무슨 공소시효(公訴時效)가 지나서 무혐의(無嫌疑)가 된다든지 하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스스로의 양심에 호소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죄는 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내가 생각에서 잊고 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죄인 것이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을 장례 마친 후에 그런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는 혹시 애굽의 바로 임금 곁에서 출세한 총리로 있는 동생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해서 과거에 저지른 죄의 값을 물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같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던 형님들을 끌어안고 가족 대 화합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 주인공이 바로 총리 요셉이다.

세상에는 사람이 노력하거나 열심히 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죄와 악과 허물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공급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힘이다. 용서는 인간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신비한 힘이다. 

용서(容恕)의 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의 품에 안긴 후에 열 명의 형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동생 요셉의 앞에 나와서 하나같이 무릎을 꿇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날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다.

요셉은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형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17절 끝에 보면 열 명의 형들이 나란히 동생인 총리 요셉의 앞에 엎드려서 용서를 구하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이런 인사를 받을 때에 과거로부터 가슴에 묻어 두고 지내오던 별의별 감정들이 복 바쳐 오르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민망하고 착잡한 순간인가.

그 때에 울음을 참고 억제하며 요셉이 형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이것이 무슨 말인가.

창세기 45장에 보면 애굽에 칠년간의 대풍으로 큰 풍년이 계속된 후에 칠년간의 흉년이 시작되던 둘째 해에 야곱의 열한명의 아들들이 애굽에까지 먹을거리를 마련하려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제 일차로 애굽에서 식량을 구해 가지고 가나안의 아버지 야곱에게로 되돌아갔던 열 명의 형들이 두 번째로 요셉의 친 동생인 베냐민까지 데리고 내려갔던 애굽에서 열두 형제들이 만났을 때의 장면과 대화 내용이 나온다. 

그 때에 요셉은 자신이 22년 전인 과거에 형들의 손에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 갔던 동생 요셉인 것을 밝히면서 대성통곡하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때 동생 요셉이 형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들보다 먼저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형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 곳 애굽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창45:5-8)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반응인가.

그리고 이어서 요셉이 형들 앞에 밝힌 세 가지의 놀라운 고백과 선언이 있다. 창세기 45장 8절 끝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요셉 자신을 임금 바로 앞에서 바로왕의 아버지요 온 집의 주요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는 고백이요 선언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요셉이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설명이 필요하다. 요셉은 임금 바로 곁의 총리였지만 그의 역량이나 능력의 실제는 왕, 그 이상이었다. 실제로 임금 바로는 나라 통치의 모든 권한을 일체 다 총리 요셉에게 위임하였다. 애굽의 온갖 국가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통치하는 요셉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애굽을 다스리셨고 요셉을 통하여 장차 선민 이스라엘로 번성해 갈 아브라함의 후손을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그런 면에서 요셉은 자신이 바로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감히 사용한 것이다.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날 저지를 죄와 악으로 인하여 벌벌 떨면서 동생 요셉의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열 명의 형들의 한결같은 요구는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에 한 바탕 울고 난 요셉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창세기 50장 20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형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형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얼마나 큰 사람의 성숙한 모습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악을 용서하셔서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형들을 용서한 것은 요셉의 마음이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용서의 힘인 것이다.

구원(救援)의 은혜(恩惠).
용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원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의 은총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미 형들을 두 번째 만났을 때에 요셉이 대성통곡하면서 형들에게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큰 구원을 이루려 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요셉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 용서는 주님을 닮아 살아가는 길이다. 요셉은 흉년이 칠년이나 계속되던 때를 위하여 애굽 민족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원하고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과 조카들과 가족들을 모두 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봉장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님 또한 이 땅에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용서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하고 나면 이런 삶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노아는 자신과 그의 여덟 식구를 홍수 시대의 심판으로 구원받게 하였다.
나이 팔십이 된 호렙산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동족 히브리 민족을 바로 임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내는 시대적인 구원의 선봉에 서서 쓰임 받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베들레헴의 대 지주였던 보아스는 남편과 아들 둘을 잃은 슬픔과 고난의 여인 나오미와 젊은 시절에 남편 잃고 불행해진 룻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베들레헴의 양을 치던 소년 다윗은 가족과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으로 살아갔다.

다 도망가고 숨고 피하였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롯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 와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순교자의 길을 걸어 갈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총을 힘입은 자들만이 가족과 세상과 교회의 안과 밖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에 촉매제가 되고 쓰임 받게 되는 것이다. 핍박자 사울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다메섹의 부르심과 변화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중매자로서 평생을 쓰임 받은 것을 보라.

죠세핀 캠벨(Josephine P. Campbell, 1852-1920)은 미국 남감리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남부의 텍사스에서 태어나 21살 때에 조셉 켐벨 목사와 결혼하였다. 남편과의 사이에 일남 일녀를 두었으나 결혼 생활 칠년 만에 남편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차례대로 아들딸을 모두 다 잃은 슬픔을 연속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우울하고 불행한 그와 같은 날들을 추스르고 “앞으로의 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헌하는 삶을 살겠다.”고 기도하고 결심한 후에 시카고에 있는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해서 간호원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에 남감리교의 해외여선교부의 파송으로 중국 상해 지역에서 선교하는 활동을 십년간 하다가 1897년 10월 9일에 다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아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그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를 시작한 곳은 왕궁 밖에 내시들이 주로 모여 살던 내자동 주변이었다. 자골이라 불리던 그 곳에서 여학생 3명, 남학생 2명을 불러 모아서 5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 날 배화여자대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학생이 38명으로 늘어났고 그 다음해에는 선교비의 후원으로 학교 안에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Louise Walker Chapel)도 건축하였다. 여기서 시작된 것이 오늘 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이다. 캠벨 선교사는 그 때 14년간 배화 학당의 초대 교장을 지냈다. 캠벨 선교사는 이처럼 교육 사업뿐만 아니라 자기처럼 여성으로 전도에 힘쓸 수 있는 전도 부인을 양서하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66살에 모처럼 자신의 조국인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던 그는 병을 얻었고 약해진 몸으로 다시 한국 선교를 위해서 이 땅에 되돌아 왔는데 결국은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면 이 땅에서 평생을 선교하다가 이 땅에서 잠든 그의 묘지가 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다시 그 누군가가 구원을 받도록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섬겨 나가는 것이다.

요셉은 죽을 뻔 한 청소년기의 위기를 뛰어 넘고 노예 생활의 고난을 극복한 후에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으로 애굽의 총리까지 된 후에 늘 그의 마음에 가득 찬 생각이 이것이었다.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자신으로 하여금 애굽과 아버지 야곱과 형들과 그 모든 가족을 구원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은 것뿐이라는 겸허한 믿음 말이다.

돌보는 위로(慰勞).
공동번역 성경은 창세기 50장 21절을,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렇다. 미워 팔아버렸던 동생 요셉이 이렇게 대단하게 출세한 애굽의 권력자로 있는데 만약에 동생이 자기들을 용서하지 않고 보복하거나 앙갚음하기로 하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은 생각조차 하기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생 요셉은 지난날의 형들의 그 ,모든 죄와 악과 허물을 일체 다 용서하고 지내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지금이지만 형들과 조카들과 모든 가족들을 자신이 책임지고 돌봐 드리겠다고 까지 약속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형들의 가슴은 메어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악을 저지르며 살아 왔을지라도 회개하고 자녀 되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녀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면 구원의 은총과 돌보시는 넉넉하신 공급과 혜택을 충만하게 입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요 자녀 된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께 간구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언제나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아버지시오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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