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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초대교회의 성령강림(행2:43-47)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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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6-12 02:06 조회 21,405 댓글 0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한스 큉의 책에서 강조하는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 3가지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령의 피조물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떠나서는 해석할 수 없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요 성령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성령의 피조물이 된 이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이 곧 교회요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강조이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탄생은 성령 강림으로부터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 마음 속에 강림하여 성령으로 빚어지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령의 피조물이 될 때라야만 내가 진정으로 교회인 성도가 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된 것이다.

<영적 가면을 벗어라>는 책을 쓴 복음주의적인 심리학 교수요 신실한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인 래리 크랩의 <교회를 교회되게>라는 책 제 4부에 보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는 주제로 진정한 교회의 4가지 특징을 강조한다. 그 첫째가 ‘진리’(眞理)다. 그의 강조대로 교회는 진리에 목말라해야하고 부활의 진리위에 세워져야 한다. 성경적인 진리요 안개 속 같은 세상을 성경의 진리가 표지판이 되는 교회여야 한다. 그 둘째가 ‘영성개발’(靈性開發)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잘 발견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가 ‘공동체(共同體) 중심’이다. 또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 중독에서 하나님 중독으로’변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앞에 목회자와 교회 오래 섬긴 고리타분한 직분자들이 있다. 지난 2011년 6월 10일 아침에 열린 한국복음주의 협의회 조찬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한 전주 안디옥교회 원로 목사인 이동휘 목사(77)의 설교 첫 마디는 “목사님 예수님 잘 믿으시오.”였다. 이는 한경직 목사께서 평소에 후배 목사들을 만나면 자주 권면하던 표현으로 전해 온다. 왜 이런 인사를 해야 할까. 예수를 잃어버린 교회, 예수와 관계가 점점 적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쓴 소리가 아니겠는가.

오늘 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점점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성령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대적인 아픔과 고민을 개탄하는 인사가 아니겠는가. 이동휘 목사는 “예수님이 33살에 모든 것을 이미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기 해체 작업이 있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내려놓아야 은혜도 받게 되고, 능력도 임하게 되고, 성령도 받게 되고, 방언도 하게 되고, 치유도 임하고 ,회복도 임하고, 은사도 받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탄생은 신자의 신앙의 고백에 기초한다.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보면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물으신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축복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敎會)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 예수께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를 향하여 네 신앙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무리들이 곧 교회인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예수는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사십일 만에 하늘로 승천하여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올라가셨다. 그 때에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탄생 순간이다. 그 기도하던 무리들 가운데 베드로도 있었다. 이미 예수께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敎會)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받았던 베드로이지만 그 동안도 우여곡절이 참으로 많았다. 예수께서 붙들리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그 날 그 참혹한 주님의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는 주님 곁에 없었다.

나중에 주님 부활 하신 후에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갈릴리에 돌아가서 밤새 고기 잡으려 하던 베드로를 새벽녘에 불러 내셔서 떡과 물고기를 구워 먹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관계의 회복을 기대하시던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나중에 성령 보내실 때에 베드로는 그 기도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많은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초대교회 탄생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무리들 한 가운데 성령이 임하자 저들은 서로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곳에 임한 성령의 현상은 강력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저들은 서로 다른 언어의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 때에 천하 각국에서 모여 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이 모여서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모여든 각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제 나라 말로 알아듣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현장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서로 놀라며 당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면서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때에 사도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요엘서의 예언의 말씀을 유창하게 인용하며 주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말세에 성령을 받으면 자녀들은 예언하게 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너희가 핍박하여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말씀을 듣던 무리들 중에서 마음에 찔림이 와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가 더욱 담대하고 일목요연하게 복음을 제시하였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이때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다. 성령이 임한 강력한 첫 증거였다. 이 날 이후로 성령 받은 120성도들이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로 사귀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면서 헤어기를 아쉬워하였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성령 받은 교회 공동체의 8가지 특징을 정리할 때에 ‘나는 성령의 사람인가'하는 질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하나님 신앙, 예수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외경심이 없다면 믿음이 병든 것이다. 출애굽기 3장의 호렙산 떨기나무가 불이 붙던 환상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발에서 신을 벗었다. 그 때에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민수기 20장에 보면 가데스 지경을 통과하던 광야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앞에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바위 앞에 섰던 모세는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이 너무 없었다. 당시의 모세의 믿음은 병든 믿음이었다. 결국 모세는 반석 앞에서 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 혈기를 억제 하지 못 한 채로 반석을 지팡이로 딱딱하며 두 번이나 두드렸다. 물론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백성과 짐승이 배불리 먹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곧 이어졌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20:12)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책망한 내용은 두 가지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식어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가데스 지역의 모세나 아론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와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의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정도가 이 끝에서 저 끝처럼 달랐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두려워 할 줄 아는 생활이다. 그래야 임한 성령이 계속하여 역사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 성령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사도들로 인한 많은 기사와 표적.
성령 받은 무리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기도 생활을 계속하자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사와 표적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령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늘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만나 고침을 받게 하였다. 늘 만나던 거지 앉은뱅이인데 그 날은 달랐다. 아니 그 거지가 다르게 보였다. 눈에 뜨인 것이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선포가 기적을 일으켰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렇게 말하고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다. 그 후로 베드로는 가는 곳 마다 기사와 표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는 사도로 사용하신 증거이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기사와 표적을 구하자. 성경의 표현대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능력이 임하도록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성령 충만을 간구하자. 이것이 교회다운 교회요 성도다운 성도다.

다 함께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신자의 연합.
성령 받고 나니까 성도들의 경제관이 달라졌다. 서로가 내 물건 네 물건하고 너무 생활필수품의 사용에 집착하지 않고 다 함께 서로의 생활을 통용하는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졌다. 생필품을 공동 소유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졌다. 물론 성령 받은 사람은 게으르거나 노동과 수고와 땀 흘리는 데 등한하면 안 된다.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성실한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장사도 하고 상업도 하고 생산직이든 유통업이든 그 어떤 일이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며 살아가야 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의 물건을 통용했다는 말은 누구는 열심히 일하여 벌고 모으고 누구는 남이 벌고 마려해 놓은 것 쓰기만 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서로 더불어 성실하게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되 서로가 지나치게 자기 것 만 고집하지 않고 다 함께 생활의 필요를 해결해 가는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을 이루러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산과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공동체 생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어 쓰는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 날도 교회나 선교 단체나 자선 사업의 기구나 학교 발전 기금과 장학기금을 위해서 적지 않은 거액의 헌금을 하거나 기탁을 하는 이들의 미담이 계속되고 있다. 인생은 아침 햇볕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지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요 예수님의 몸 된 성도요 성령 충만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지나치게 재물과 재산과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가면 안 된다. 성경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기대하심도 못된다. 선하게 벌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선하게 쓰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재산 헌납 운동에 앞장섰던 주인공이 사도행전 4장 36절 이하에 나오는 바나바이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다. 구브로라는 섬에서 태어난 레위족이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이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다. 저들 부부는 소유를 팔아서 다 바치려고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값의 얼마는 남편이 감추었다. 그 감춘 사실은 아내도 알게 되었다. 감추고 남은 것의 일부를 갖다가 사도 들 발 앞에 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남편 아나니아를 책망했다.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하고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는 책망이었다. 아나니아 부부의 행위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책망이 이어졌다. 베드로의 그와 같은 책망을 받고 있던 남편이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즉각 장례하고 말았다. 세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남편이 죽고 장례가 끝난 것도 모르고 베드로 앞에 나타났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하고 베드로가 묻자 “예 이것뿐입니다.”하고 삽비라가 거짓말로 대답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고 말했는데 아나니아의 부인 삽비라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고 말았다. 또 다시 젊은이들이 들어 와서 삽비라의 죽은 시체를 메어다가 남편 곁에 장사지내고 말았다. 이 소문이 예루살렘 주변에 퍼져 가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재산과 재물에 집착해서 잘 된 인생이 어디 있는가. 신앙생활의 특징은 어느 크고 작은 물질이든 그 어떤 재산과 재물이든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이 자란다. 그래야 믿음이 믿음다워진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장 2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세의 고통의 때를 살아가는 인간의 특징이라고 했다. 돈과 재물이 없이는 살수 없는 세상이지만 돈과 재물과 재산에 집착하면 그 때부터 인생은 초라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른 재앙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도와 공동체와 성령을 속인 거짓에 눈이 가리어져서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와 초대교회 공동체를 속인 거짓과 위선이 불러들인 화와 심판의 대표적인 사건이 아닌가.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 사랑과 주 예수님 사랑과 주의 몸 된 교호와 성도 사랑으로 돈과 재물과 재산과 모든 물질을 사용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누릴 줄 아는 인생으로 재물관과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변하게 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는 생활이란 천국 생활 같이 않은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이 환상적이지 않는가. 한두 주 교회 빠져도 별 불편 없고 와도 좋고 안 와도 좋고 성도들 간에 만나도 좋고 못 만나도 그만이고 이런 상태는 성령 충만 받은 상태가 아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날마다 성도 생각 교회 생각 주의 일 생각에 꽉 차서 매사를 성전 중심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모여 기도하고 모여 찬송하고 모여 말씀 듣고 모여 은혜를 나누며 서로를 마음 합하여 사랑하고 섬겨가는 그런 천국 생활이 전개 되는 것이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음.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성전에 모여 있든지 집 안에 모여 있든지 서로가 마음이 통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와 감격과 소망과 은혜가 넘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앤드류 머레이의 <성령님의 임재연습>이란 책에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으로 인하여 즐거울 수 있는가”하는 제목의 묵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성령 받고 살고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특징은 즐거운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즐겁게 살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갈망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복음의 말씀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말씀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복음과 진리로 인한 용기 있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어는 믿는 여성이 남편을 잘못 만났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가정을 등한히 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핍박하며 비윤리적으로 살았다. 결국 견디다 못하여 헤어진 아내는 어렵고 힘겨운 날들을 살아갔다. 20여 년 전 일이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당시에 200만원을 친정아버지에게 전했다. 의미 있는 곳에 쓴다며 친정아버지는 젊은 딸의 힘겹게 마련한 돈 200만원을 선교지로 보냈다. 필리핀 팔라완섬의 바닷가 마을에 아름다운 시멘트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15년 전 쯤의 일이다. 지금 그 딸은 재혼하여 목사의 아내가 되어 미국에서 행복하게 주의 사역을 하고 있다.  성령 안에 사는 하나님의 사람은 교회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그 마음의 즐거움의 근원이 달라  지게 된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는 장소의 문제보다 성도 간에 가족 간에 세상에서 서로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기쁘고 그래서 즐겁고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평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받는 칭송을 받음.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미하는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는 영이시다.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찬송하기를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라고 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계7:12) 이처럼 하나님을 잘 찬미하며 살아가면 세상의 온 백성들로 부터도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초대 교회 7집사의 특징이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6장 2절에 보면 디모데도 칭찬 받는 사람이었다.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심.
교회와 성도들이 한 지역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주께서 날마다 구원 받는 무리들을 더하게 해 주실 것이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9장 42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욥바 지역에서 죽은 여 제자 다비다 즉 도르가를 살렸을 때에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했다. 사도행전 16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에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에서 전도하는데 그 지역의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했다. 반울 사도가 에베소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12명의 세례 받고 성령 받는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울은 그 곳 회당에서 석 달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기도 했다. 결국은 2년을 머물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그 근동 지역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의 손으로 능력이 나타나고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갖다가 병든 자에게 얹어도 병이 떠나고 귀신이 떠나는 기적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7명의 아들들이 악귀에 들려서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을 빙자해서 이적을 행하려다가 악귀에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는 누구냐”(행19:15)고 오히려 책망을 받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처럼 또 다른 악귀 들린 자들이 7명의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뛰어 올라서 눌러 버렸다. 결국 7명의 아들들은 몸을 상한 채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게 되었다.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술하던 사람들이 마술 책을 몽땅 모아다가 불살라 버리는 일도 생겨났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고 했다.

그렇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는 기도 가운데 부흥하고 성장하고 시대적인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올해도 환경을 극복하며 성령 충만한 성도요 성령 충만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인공이 모두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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