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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라(욥11:1-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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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1 22:20 조회 22,611 댓글 0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고난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패망이나 슬픈 비극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다가 보면 피할 수 없는 재난을 겪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이 지진이나 쓰나미나 전염병이나 테러나 화재 사건이나 산업 재해나 의료사고와 같은 불행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중증 장애나 몹시 허약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샴쌍둥이 같은 경우를 보라. 몸은 둘인데 머리가 하나도 붙어 있는 상태에서 탄생되는 아기들의 경우 말이다. 물론 현대 의학이 저들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위험한 생의 출발인가.

반복되는 묵상이지만 욥은 하나님을 잘 믿던 인물이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여기며 살아 왔고 당시 동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이의가 없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실 정도였다. 욥기의 시작을 보라.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더라.”(욥1:1) 뿐만 아니라 2절과 3절에 보면 이 사람은 욥은 자녀와 복과 재물의 복을 골고루 넘치도록 받아서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3절 끝에 보면,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했다. 오늘 날로 하면 인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권 인구 30억 명 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상징적인 훌륭한 인물이었다. 상을 받기로 하면 노벨 평화상도 타고 막사이 상도 타고 템플턴상도 모두 다 탈 만한 남들이 인정해 주고 알아주고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세계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주인공이었다. 욥기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도 욥의 그와 같은 신앙을 인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 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런 욥이 지금 칠남 삼녀의 십남매가 하루에 한 자리에서 큰 아들의 생일 잔치 상 앞에서 다 죽었다. 11,500마리의 양과 소와 낙타와 나귀도 다 죽고 다 없어졌다.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자기 몸도 구더기가 파 들어가는 중병에 걸렸다.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 피투성이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되었다.

부인도 남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핍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겪고 있는 욥의 가정사는 욥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부부가 다 함께 큰 충격 가운데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참담해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욥기는 그 모든 상황을 욥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오늘 말씀은 세 번째 친구인 소발이 욥에게 해 주는 말이다. 구구 절절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나 지금 당하고 있는 욥의 곤경으로 하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말을 계속 쏟아 놓고 있다. 그러나 여하튼 욥의 친구 소발이 하는 말을 가만히 묵상하다가 보면 그 말들이 오늘 나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이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 욥이 재난을 당하기 전에 살아오면서 누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던 사람이었다. 아니 지금 몸이 몹시 병들고 그 많던 열 자식 다 한꺼번에 한 자리에서 죽고 그 많던 짐승들이 다 사라져서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욥은 번민하고 갈등할 뿐이지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을 등진 것은 아니다. 욥은 몸과 마음이 몹시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잃어버린 채 그의 생각이나 마음이 뻥 뚫려 버린 채 허탄하고 허망한 상태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쏟아 내는 세 친구들의 말은 욥이 겪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적절한 말들은 아닐지라도 오늘 날 우리는 여전히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시 생각하고 묵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소발은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그 어떤 상황과 형편이라도 일일이 다 아시고 다 돌아보신다”고 주장한다. 맞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이 땅의 그 많은 인생들의 일 거수 일 투족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까지라도 다 아신다. 하나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전능자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그 무엇을 숨기고 가릴 수가 있으랴. 본문의 서두에서 주장하는 소발의 논리가 그런 내용들이다. 그러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재난의 형편은 그 누가 찾아 갈지라도 무조건 위로하고 무조건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며 무조건 작은 힘이라도 되어 주어야 할 상황이 아닌가. 또한 이 어려운 지경에 그 누가 다가가서 그 무슨 말로 위로한들 위로가 되겠는가. 그런데 친구랍시고 지금 친구 소발이 하는 말은 회개의 촉구인 것이다. 욥의 당하는 형편은 모두가 다 오해 투성이로 엉켜 있다. 시체 말로 “오해를 푸는 방법은 삼해를 빼면 이해가 된다.”는 썰렁한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욥의 주변을 보면 사탄도 욥의 부인도 욥 자신도 욥의 세 친구들도 모두 다 오해에 오해가 쌓이는 복잡한 오해의 연속 가운데 여전히 욥이 재난의 현장에 처절하고 고독하게 버려져 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한결 같은 오해는 “욥이 당한 재난은 욥이 지은 죄의 결과”라는 잘못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속에 담긴 친구 소발이 언급한 말들을 무조건 무시 할 수만도 없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쉽게 판단하시고 상과 벌을 그 때 그 때마다 내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70억이 넘는 인류 중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평생 재물 쓰는 일에 불편이 없고 소득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소비 하는 것만이 미덕인 것처럼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런 그 누구라고 해서 부러워할 것은 없다. 인간의 삶이 그 재물의 넉넉한 데 기준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내 몸 건강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건강을 너무나 과신하며 살아가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인간은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요즘처럼이나 복잡다단한 세상에서는 하루에도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흥망성쇠를 하나님 손 안에 맡기고 겸손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잠언 3장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아마도 우리가 욥의 지경이 된 다면 99. 9%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환경을 저주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인생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욥은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동방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받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겪은 재난과 폐허 앞에서 재기한 신비한 신앙의 주인공이다. 그는 열 자녀를 하나님 앞으로 먼저 다 보내고 그 엄청난 슬픔을 가슴에 묻고 완전히 폐허가 된 산업을 다시 일구어서 이전의 목축업보다 갑절의 산업을 일구어 낸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우뚝 세워졌다. 그렇게 남편을 욕하고 나무라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하던 부인의 마음을 추스르고 완전히 병으로 다 죽어 가던 자신의 몸에 회복의 은총을 다시 입고 일어났다. 다 죽어가던 욥에 다시 살아 난 것이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겪은 열 자식 죽은 슬픔과 재산 다 날아가 버린 완전 패망의 폐허를 딛고 그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일곱 명의 아들들과 세 명의 딸들을 더 낳고 살아갔다. 욥은 완전 폐허를 딛고 재기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욥기 42장 끝에 보면 그와 같은 장면을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복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내 건강, 지금의 내 가족 형편, 지금의 내 사회생활, 지금의 내가 누리고 살아가는 그 모든 형편들이 어떠한 상황이든지 내 노력과 내 수고와 내 지혜와 내 열심과 내 성실의 열매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물론 자기 노력이 수반되어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 않고 거두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내 생명, 내 건강, 나의 가족 관계, 나의 직장, 나의 산업, 나의 소득, 나에게 마련된 생활의 모든 공간과 여건들, 내 주변의 인간관계 그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 분명히 있다. 지금 욥이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지만 욥 자신이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울타리 되어 주셨던 복을 부인하는 것 아니다. 욥기 42장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 후에 손자들까지 사대의 후손을 다시 보면서 140살에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늙고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는 말씀이 욥기의 마지막 구절이다. 야구는 1회, 2회 시작해서 9회까지 경기가 계속된다. 축구는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고 때로는 경우에 따라서는 연장전이 있다. 연극도 제 1막이 있고 제 2막과 제 3막이 이어진다. 욥은 축구로 하면 전반전과 후반전과 연장전을 골고루 뛰면서 생애의 별의 별 고난과 우여곡절을 다 소화하고 다 뛰어넘고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인간이 슬픈 일을 겪거나 재난을 겪기로 하면 욥과 같은 참담하고 망연자실한 재난을 겪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의로 인해서 축복의 열매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 부족하고 다 의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고 했다.

그렇다. 누가 감히 지금 욥이 겪고 있는 이 슬픔과 재난을 함부로 비판하고 판단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서로의 형편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과거 중세에 구라파의 ‘쎄티스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의 규약을 어기고 죄를 지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쎄티스 수도원의 선배 수도사들을 부끄럽게 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같은 불명예스럽고 부끄러운 죄의 문제를 판단 받기 위해서 당시에 유명한 선배 수도사인 ‘모세 압바’ 수도사를 모셔다가 젊은 수도사의 죄의 문제를 판단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모세 압바 수도사가 잔등에 큰 모래 주머니를 메고 나타났는데 그 모레 주머니에 구멍이 뚫려서 줄줄 모래가 뒤로 새는 것이었다.  의아하게 여긴 수도사들이 물었다. 그 때에 모세 압바 수도사가 대답하기를 “나의 죄가 내 뒤에서 이 모래처럼 흘러 내려도 나도 잘 모르는데 어찌 남의 죄의 문제를 판단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수도사들은 이 날 이후로 다른 동료 수도사의 죄의 문제를 다 덮고 더 이상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용서를 구하면서 수도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의로운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다. 또한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소망이요 진리인 것이다.

사실, 그러므로 오늘 욥을 찾아온 세 번째 친구인 소발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엄청난 재난 앞에 고통당하고 있는 욥에게 친구랍시고 해줄 말은 아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 소발의 해 준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
전심(全心)으로 기도(祈禱)하며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라.
13절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제 마음의 고삐를 잡고 그에게 손을 내 밀게”라고 하였다. 깨끗한 마음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두 손을 내어 밀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재난의 현장에서 혹은 폐허로 무너져 내린 사고의 현장에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구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구조대원들의 노력을 보지 않는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고난, 무슨 재난, 무슨 재앙, 무슨 사고, 무슨 슬픔, 무슨 역경, 무슨 당황스러운 어려움을 당할 지라도 날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고 두 손을 내어 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난과 질병과 시련과 환란에서 건져 내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는다. 물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쉽게 다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지내 놓고 보면 고난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감히 고난을 원하겠는가. 그 어느 누가 엄청난 재난이나 극심한 질병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고 다 당하면서 살아간다.

지금 친구 소발은 욥에게 말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두 손을 들라”고 청한다. 옳다. 그렇다. 지금 이와 같은 재난의 현장에서 어디로 피할 것이며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는가.  “주님여 이 손을”이라는 복음 성가를 불러 보자.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우리 주님은 아버지가 되셔서 아들딸인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재난과 아픔과 질병과 어려움 가운데 나를 내어 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찾아오시고 돌아보시고 붙들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건져 주시고 회복해 주시며 힘을 공급해 주시는 사랑의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다.

죄악(罪惡)과 불의(不義)를 멀리하라.
14절에 “손에 있는 죄악”이란 손과 발로 행하는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손으로 행하는 죄와 악은 마음의 악한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으로 마음과 생각과 생활 속에 짓는 모든 죄악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그런 고민 가운데 기도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래서 다윗은 계속하여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0-11)

그렇다. 지금 욥의 고민이나 친구 소발의 생각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는 그런 마음의 경황이 없다. 몸은 병들고 몇 달째 재난을 당한  슬픔과 참담하고 어안이 벙벙한 아연실색할 상황 앞에서 비통해 하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 누가 감히 죄악과 불의를 멀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의 태도를 모를 이가 있겠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2절에 보면,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생활이다. 욥의 친구 소발은 욥에게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고 권한다. 소발의 논리대로 하면 지금 세상을 떠나 부모 앞에서 다 함께 죽음을 맞은 십남매의 불행이 욥의 집안에 들어 와 있던 드러나지 않은 불의의 결과요 심판이란 말인가. 물론 재난을 겪으면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말하거나 그런 말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말인가 말이다.

욥기 1장 5절에 보면 욥은 지나칠 정도의 신앙 양심에 붙들려 하나님을 제대로 잘 섬겨 보려고 씨름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자녀들이 모여서 생일잔치라도 하고 나면 아버지 욥은 자녀들을 일일이 불러서 성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이면 아들딸의 수대로 하나님 앞에 짐승을 드려 번제하였다. 그리고 욥은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는 하였다. 그렇게 철저하던 욥의 신앙생활인데 지금 이런 이해  하기 어렵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개인이나 가정에도 불행이나 재난은 있다. 413장 찬송, “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자인 스패포드(H. G. Spafford, 1828-1888)는 미국 시카고에서 성공한 사업가요 변호사요 교수요 무디 목사님 곁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던 교회의 일꾼이었다. 1871년 10월 10일에 시카고 시내가 다 불타는 대 화재(Great Chicago Fire)가 발생하였다. 스패포드가 43살 때의 일이다. 그의 재산뿐만 아니라 온 도시가 다 불타 버렸다. 완전 폐허가 되었다. 그 재난 후에 아내와 네 딸들을 구라파로 여행 시켰다. 자기도 함께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교회 일에 매여서 나중에 출발해서 유럽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스패포드의 아내와 네 딸을 태운 배가 대서양 상에서 타이타닉처럼 조난을 당해서 네 딸은 다 죽고 아내만 겨우 구조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패포드가 황급하게 아내를 만나러 떠났다. 깜깜한 밤바다를 지나는데 선장이 사고 현장을 설명해 주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하고 착잡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로 아내를 만나러 가던 남편 스패포드가 네 딸들을 모다 다 잃은 그 깜깜한 밤바다를 지나는데 마음속에 이상한 평화가 찾아 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날 밤에 칠흑 같이 어두운 밤바다 위에서 배 안에서 쓴 찬송 시가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와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본인이 아니고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스패포드는 이 놀라운 평화를 노래하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의하여 감싸지는 위로요 평화였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413장) 찬송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기의 악 때문에 재난을 겪고 누군가가 자기의 선행으로 인하여 큰 복을 받는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세상을 바라다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의 밭에 해와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시니까 말이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삶의 밝은 회복(回復)을 소망(所望)하라.
엘리바스나 빌닷과는 다르게 소발은 욥을 판단하고 비판 하던 중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겠는가. 15절의 ‘그리하면’이란 말이 은근히 욥에게 과거의 죄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악에서 떠나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것을 권면하던 소발이 입을 열어서 말한다. 17절과 18절에,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며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이 쉬리라”고 말했다. 누가 이와 같은 희망을 거부할 것이며 누가 감히 이와 같은 회복의 순간을 꿈꾸지 않겠는가.

지금은 비록 욥이 온 몸이 상하여 고통 가운데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임하고 나면 편안하게 눕게 될 것이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고 덕담하였다.

지금은 이렇게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비통하고 참담한 재난 가운데 아연실색하고 있지만 이 재난의 아픔이 다 지나가고 과거의 욥이 누리던 신앙의 기쁨과 존경 받던 영화를 다시 누릴 날이 되 찾아오리라는 축복의 말인 것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변치 말아야 할 것이다. 베토벤은 합창 교향곡을 작곡할 때에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가 찾아 왔다. 괴테는 그의 명작 파우스트를 완성할 당시에 더 이상 눈이 보이질 않았다. 오늘 날의 송명희(1963-) 자매도 우리와 같은 정도의 신체 건강을 평생토록 단 하루도 누리지 못했으면서도 “공평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높여 드릴만한 안정된 믿음이 있었다.  ‘나’라는 제목의 찬송시 말이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이렇게 시작되는 그의 유명한 그 찬송시 말이다. 온 몸이 교통사고로 불탄 하나님의 딸 이지선 자매가 여전히 감사하고 여전히 기뻐하고 여전히 활력 있고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  닉 브이치치를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삶으로 지탱해 주는 힘은 어디서 공급되는 힘인가.

18절을 공동번역은, “자신을 잃지 말게 아직 희망이 있다네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자리에 들게” 19절을 공동번역은, “자네의 단잠을 깨울 자가 없을 것이며 많은 사람이 자네 앞에서 굽실 거릴 것일세” 라고 번역해 주었다.

그렇다. 지금 어떤 재난, 어떤 슬픔, 어떤 충격, 어떤 사건 앞에 있을지라도 내가 겪은 과거가 나의 장래마저 삼켜버리지 못하게 하여야만 한다. 엄청난 물난리로 가족을 잃고 살림살이가 진흙탕 속에 뒤범벅이 된 재난의 현장에서도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하면 흙탕물 속에서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서 쓸고 닦고 고치고 정돈해서 새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서도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어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까지 사자 굴속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다니엘을 발견하고 더욱 더 놀랜 것은 다니엘이 아니라 그를 사자 굴속에 던져 넣었던 다리오 왕이었다.

지금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가. 희망을 버리지 말자.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꿈꾸자. 하나님은 지금 친구 소발을 통하여 욥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 복고 평안히 쉬리라”(욥1:18) 이는 지금 욥이 겪는 재난의 상황으로 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장래 예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욥을 그런 회복의 날들로 인도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시니까.

믿음 소망 사랑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현실을 사랑해라. 지금의 내 현실을 미워하거나 부인하려 하지 말고 끌어안아라.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희망을 버리지 말아라. 하나님은 그 희망을 반드시 열매 맺게 해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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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와 감사(마6:2..최고관리자
"감사해"최고관리자
"바울의 소식"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최고관리자
"누군가 널 위해 기..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