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잘 되게 해 주시는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 번성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줄 아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형통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마다 형통하게 하시는 분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말을 받았다. 2. 언제까지 그런 투로 말하려는가?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바람 같네그려. 3. 하느님께서 바른 것을 틀렸다고 하시겠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옳은 것을 글렀다고 하시겠는가? 4. 자네 아들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으므로 그분께서 그 죗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네. 5. 그러니 이제라도 자네는 하느님을 찾고 전능하신 분께 은총을 빌게나. 6. 자네만 흠이 없고 진실하다면 이제라도 하느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자네가 떳떳하게 살 곳을 돌려주실 것일세. 7.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8. 옛 어른들에게 물어보게나. 선조들이 찾았던 길을 깨쳐보게나. 9. 태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우리가 안다면 무엇을 알겠는가? 땅 위에 사는 우리의 수명은 그림자와도 같은 것, 10. 그들이 가르치고 일러준 말을 배우고 깊이 생각하여 한 말들을 되새겨보게.”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이 성경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편 1편에도 보면, “복있는 사람은.....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다. 이런 표현은 다윗의 시편인 37편 말씀에도 나온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1-2)라고 했다. 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끈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37:9)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악인은 당장 망하고 의인은 언제나 흥한다고 정의하는 데도 아쉬움은 남는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하게 행동하고 불의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온갖 탐심 가운데 성공과 출세와 권세와 명예에 사로잡혀서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살면서도 잘되고 형통한 사람들을 보며 신앙적인 회의에 빠질 때가 없지 않다. 반면에 너무나도 선하고 착하게 살며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가면서도 욥과 같이 고난과 질병과 어려움 가운데 사는 이웃들도 없지 않다.
본문은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중에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한 말이다. 친구 빌닷의 말인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옳은 말인 것 같지만 매우 위험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
욥기 6장과 7장에 실린 욥의 항변의 글을 보면 재난을 당한 후의 욥은 거의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괴로움을 겪으며 몸은 병들고 마음은 피폐한 상태에서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 그런 욥에게 엘리바스에 이어서 위로한답시고 말하는 빌닷이 언급한 내용은 무엇인가. 3절에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본문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성경적으로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나 지금 이런 재난 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 욥에게 찾아가서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자, 빌닷이 욥에게 언급한 이 같은 대화의 내용 그대로를 빌리면 그러면 욥의 십남매가 다 죽고 그 많던 짐승이 다 몰살당한 것이 욥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공의란 말인가. 7장 3절에 보면, 욥은 재난을 당한 후에 여러 달 째 심한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지내고 있다. 밤마다 고달픈 슬픔에 휩싸여 지내고 밤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고 있다. 7장 5절과 15절에 보면, 그의 살을 구더기가 파 들어가고 뼈를 깎는 고통 가운데서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욥에게 찾아간 친구 빌닷이 친구랍시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정의’ 혹은 ‘하나님의 공의’ 운운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 아닐 수 없다.
3절의 ‘굽게 한다’는 말은 ‘왜곡하다.’ 혹은 ‘불의하게 하다’는 뜻으로 공정하지 못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이나 공의가 옳지 못하단 말이냐고 욥이 엘리바스에게 대답한 말의 꼬리를 잡고 친구 빌닷이 항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판하시며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의 판단과 분별에는 오차가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의와 불의, 선과 악, 참과 거짓을 판단하시고 심판 받을 자와 상급 받고 구원 얻을 자를 구별하시는 심판주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언제나 의로우시며 언제나 진실하신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되 의로운 인생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빌닷이 말하고 있는 3절의 언급은 옳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곤경으로면 그런 말들이 전혀 욥에게 위로도 되지 못하고 귀에 들려지는 말이 못 된다는 아쉬움이 크다.
욥의 친구 빌닷은 이 세상을 도식적인 도적주의 안목으로만 보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과 공의는 전혀 굽은 판단이 아니며 굽은 공의가 아닌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 만민은 모두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사망 즉 죽음을 피할 인생은 단 한 인생도 없다. 물론 인생이 그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시90:10)고 하였으므로 단지 누가 얼마나 더 사느냐 혹은 덜 사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누가 장수하느냐 혹은 누가 일찍 세상을 앞서 떠나가느냐의 문제 앞에는 할 말이 없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어떤 형편, 그 어떤 이해 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4장에 보면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욥4:17-20) 그렇다. 이런 말씀 앞에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의 속성을 부인할 자가 그 어디 있으랴.
아픈 자를 싸매시며 상한 자를 고치시고 환난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맞다. 우린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빌고 간구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찾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욥은 괴로워하고 있고 차라리 죽기를 바랄 정도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구더기가 살을 파 들어가는 육신적인 고통 가운데 이미 처절한 재난을 당한 지 여러 달이 흘러가고 있다.
재난은 언제라도 있었고 어디라도 있었다. 재난 앞에는 나라이든 개인이든 차이가 없다.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주요 섬 중 하나인 혼슈(本州)의 북동쪽 해안에서 강진이 발생했다. 일본 센다이(仙台) 대지진 혹은 도호쿠(東北) 대지진이라고도 한다. 이 지진은 육지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으며 지진성 해일인 쓰나미가 몰려와 일본의 많은 해안 지역을 휩쓸어버렸다. 특히 혼슈 북동부의 도호쿠 지방에 지진 피해가 집중되었다. 규모 9.0의 지진이 강타했다. 지진의 진앙지는 일본의 동쪽 130km 지점으로 진원지는 서태평양 해저 아래 깊이 약 24km 지점이었던 것으로 관측되었다. 이 지진은 일본 해구를 경계로 맞닿아 해저를 파고들며 가라앉고 있는 태평양 판과 유라시아 판의 경계에서 침입대가 파열되어 발생했다. 이 같은 재난으로 일 순간에 24, 500여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어려움을 다 보며 겪으며 살아간다. 근현대사의 그 엄청난 수의 전쟁 희생자나 그 아픔은 그만두고라도 말이다. 가령 자연 재해로만 그 통계를 보아도,
1556년 중국 명나라때인 산시 대지진 83만 명 사망,
1920년 12월 중국 하이위안 대지진 20만 명 사망.
1923년 9월 관동(간토) 대지진 사망 14만 2천800명,
1970년 5월 페루 침보테 지진사망 7만 명,
1976년 7월 중국 탕산 대지진 사망25만5천명,
1990년 6월 서부 이란 지진 사망5만 명,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진과 쓰나미로 사망 22만7천898명,
2005년 10월 북부 파키스탄 지진 사망 8만6천명,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 지진 사망 8만7천587명,
2010년 1월 아이티 지진 사망7만2천명 사망 등 세계 처처에서 끝이 없는 재난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나 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인이든 가정이든 지역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재난과 질병과 전염병과 전쟁과 테러와 각종 교통사고와 범죄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겸손하게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요나서에 보면 어린 아이만도 12만 명이나 살아가던 니느웨 성을 심판하실 생각을 되 돌이키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선지자 요나는 한 달 동안 니느웨 성을 이 곳 저 곳 찾아다니며 하나님이 장차 니느웨 성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을 전해들은 니느웨 성민들은 임금으로부터 모든 백성들과 소와 양을 비롯한 짐승에 이르기까지 먹지 않는 것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심판을 예고하시던 하나님은 니느웨 성민들의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민들을 용서하기는 것을 싫어한 선지자 요나는 기도 중에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
“주께서는 은헤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다.”(욘4:2)
하나님의 생각은 요나의 생각과 다르시고 엘리바스나 빌닷이나 욥의 생각과도 다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생각과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재난이 많은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늘 보호하시는 은총과 축복을 겸손하게 감사하므로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죄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
욥의 친구랍시고 욥을 찾아 와서 위문하며 말하는 빌닷의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4절의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 두셨나니”라는 언급 말이다. 설령 이러한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친구인 빌닷이 욥의 곁에 방문해서 할 말은 아니다. 우리는 욥의 열 남매들이 큰 아들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함께 다 죽은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가령 하나님이 저들을 그 자리에서 데려 가셨더라도 말이다. 인간은 생명의 탄생과 그 한 생명의 죽음을 인간의 편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물론 재난을 겪거나 시험을 당하거나 고난을 겪을 때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 갈 수는 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감히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함부로 언급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감히 욥의 자녀 십 남매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최근 언론에 공개된 1983년 10월 9일 현지 시간 오전 10시 28분에 일어난 버어마 아웅산 테러의 참사 장면을 담은 흑백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동남아 6개국을 순방 중이던 당시 대통령 전두환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장관과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등 17명의 정부 요인이 순식간에 피 범벅이 된 채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테러에 의한 재난으로 희생된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61살에 숨진 이범석(1922-1983) 외무장관의 누이동생이 권사였는데 광림교회 부 목사 시절이던 1991년에 사건 8년이 지난 후인 때에도 자랑스러웠던 친정 오빠 고 이범석 외무장관의 죽음을 애도하는 회고담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서울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평양에서 생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법정대학 예과를 수료하였다.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편입학하여 졸업하고 다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기독교인으로서 적십자활동을 통하여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1951년 미국적십자사 국제사업 한국대표가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에 의거한 전쟁포로송환교섭을 위하여 국제적십자단 한국수석대표로 참가하여 1년 동안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1957년에는 국제적십자회의 한국대표와 다음 해에는 청소년지도자국제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9년에는 재일교포북송저지를 위하여 제네바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처지를 잘 대변하였다. 그는 점점 외교능력을 인정받아 1961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서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에는 주 유엔한국대표부 및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외교관이 되었다. 1965년 외무부 의전실장을 거쳐 1970년 주튀니지특명전권대사로 일하였다. 남북대화가 중요시된 때인 1972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돌아와 그해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76년까지 부총재로 계속 연임되는 동안 남북문제에 헌신하였으며 그러한 경력이 인정되어 1980년 국토통일원장관에 기용되었다. 1982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서 1983년 외무부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서남아 및 오세아니아 주 순방외교 때 대통령을 수행하다가 미안마에서 아웅산묘소테러폭발사건으로 순직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죄와 죽음을 연관 지어서 생각한다. 또한 성경은 죄와 죽음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룬다. 그러나 인간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아벨도 죽었고 아론도 노아도 죽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야곱도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벨의 죽음과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죽음을 해석하는 성경적인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아도 죽었고 노아와 같은 당대를 살던 수많은 인류가 홍수의 심판 앞에 다 죽었다. 홍수 심판 때에 살아남은 자들은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다. 홍수 심판을 이겨 낸 노아와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명의 며느리들도 나중에 다 차례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죽음을 죽느냐가 중요하다. 문제는 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느냐 혹은 영원히 지옥에서 심판을 받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고 선언하셨다.
독립 운동가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18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었다. 대한제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 앞잡이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에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그 다음 해에 31살 젊은 나이 때에 류순 감옥에서 사형 당하였다. 대한민국 독립을 꿈꾸던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해방되던 해 2월 16일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28살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졌다. 그는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윤영석(尹永錫)이다. 어머니 김룡(金龍)과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와 문익환도 이 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다가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에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년과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하였고 친구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윤동주의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는 교정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1985년부터 월간문학사에서는 윤동주를 기리는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어려서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장수하다가 죽기도 한다. 문제는 탄생과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죄 사함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서시’(序詩)는 이렇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려고만 하지 말고 생명과 죽음을 다루시는 하나님 안에서 내게 주어진 매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불의하고 간계한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었고 사도 야고보도 헤롯의 칼에 죽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순교하였다. 초대 교회 집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히브리서 11장 37절에 보면, 돌에 맞아 죽은 이들과 톱에 켜서 죽임 당한 이들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때때로 가난과 질병과 사고와 재난과 죽음이 나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고 시험하는 신앙의 과정일 수 있다. 남다른 고난의 삶을 살아갔던 고난의 사람 욥은 나중 욥기 23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재난 속에서 드리는 인간의 기도와 태도.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오해하기도 하고 착각하기도 하며 점점 두려워하거나 무서운 마음을 갖기도 한다. 욥기 23장 2절과 3절의 말씀을 미리 보면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으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고 읊조렸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 보면 욥의 친구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제안한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찾으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라.
청결하고 정직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시작은 미약하나 다시 나중을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
본문인 욥기 8장 5절부터 7절까지를 ‘표준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스쳐 지나가는 모든 마음을 헤아려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안에서 나중이 점점 크게 잘 되고 창대하며 번성해가는 은총과 회복을 기도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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