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육신의 아버지들 중에는 아내를 버리거나 자식들을 버리는 비정한 아버지가 더러 있다. 가족들에 대하여 무책임한 아버지, 방탕하게 살아가는 아버지, 되는 대로 막 사는 아버지, 도대체 한심한 아버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쓴 어느 유치원 학생의 일기장 내용에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좋다. 언제나 친절하고 자상하시니까.
나는 집에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맛있는 음식들을 꺼내 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인형이랑 장난감이 있어서 좋다. 내가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나는 집에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해 주니까.
그런데 아빠는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개의 아버지들은 헌신적으로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아버지이시다. 해와 달과 그 많은 은하계의 모든 별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작품이다. 지구의 오대양 육대주가 모두 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 안에서 조성되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계절들이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하나님이 운행하신다. 바다의 민물과 썰물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 가운데 들락거린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과 벌과 나비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 안에 있다. 이처럼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의 뛰고 달리는 짐승들과 배로 기어 다니는 것들과 아주 작은 곤충들과 벌레들도 다 하나님 아버지가 기르시고 먹이신다. 바다의 물고기들과 플랑크톤과 요즘 문제 많은 해파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가 만드셨고 그 생명을 이어 가게 하신다.
욥기 38장에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아버지이시다. 특별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며 섬기고 살아가길 원하는 성도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
“가을의 기도”로 유명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시인 김현승(金顯承,1913~1975)은 “아버지의 마음”이란 시를 이렇게 읊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이것은 이 땅의 건강한 생각을 가진 가정의 자상한 아버지상을 노래한 것이다. 어찌 이런 정도의 표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으랴.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과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눈 감아 주시고 덮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온갖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의 영과 혼과 육체의 모든 필요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감싸시고 얼싸 안으시고 어깨 위에 목말을 태우시며 우릴 기분 좋게 하시고 지도하시며 깨우쳐 주시고 때로 사랑으로 책망하시며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안타까워하시며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열망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좋은 것, 귀한 것, 맛있는 것, 아름다운 것, 복된 것을 주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긍휼을 덧입고 살아가도록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위험할 때 건져 주시고 병들었을 때에 불쌍히 여기시며 고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 할 때에 밤을 새워서라도 나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시며 낙심했을 때에 힘을 주시고 피곤해 할 때에 안식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너무나 유명한 비유 말씀인 본문은 유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병들고 지친 빈손으로 남루하게 해진 옷을 입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 둘째 아들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형편없는 아들이라도 나무라지 않고 사랑과 용서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소개하는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나가서 남의 나라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창녀와 함께 허랑방탕하며 흥청망청 살다가 빈손 들고 돌아온 동생이 못마땅하여 툴툴거리고 서 있는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큰 아들의 못 마땅해 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서 동생을 용납하고 의리 있게 아버지의 집에서 더불어서 함께 살아갈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큰 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하신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인 것이다.
‘나의 등 뒤에서’라는 제목으로 준비된 아빠곰과 새끼 곰의 실화를 동영상으로 잠시 보자. 달려드는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부터 사랑하는 새끼 곰을 보호하는 아빠 곰의 위용을 보라.
하나님 아버지는 달려드는 사탄의 사나운 이빨과 발톱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고 품에 얼싸 안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 내시고 죄를 깨끗하게 하시며 영생하게 하시는 존귀하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큰 아들은 오늘 날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산 적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버지의 포도원과 감람 밭에서 일했고 아버지의 양과 염소와 소 떼를 돌보며 살아 왔다. 큰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잡수시는 식탁에서 함께 먹었고 아버지의 누우시는 장막에서 함께 잠을 잤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고단하게 일하실 때 늘 그 곁에서 함께 일했고 아버지가 힘들어 하시고 고민스러워 하실 때에도 늘 그 곁에 있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났고 아버지가 누우실 때 함께 누웠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달랐다. 철이 들까 말까 한 나이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밭과 들에서 일하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언제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주어야 하는지, 언제 포도나무에 꽃이 피는지, 언제 포도열매가 풍성히 익어 추수하게 되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양과 염소와 소가 무얼 먹고 사는지 어디서 맑은 물을 찾아 마시며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둘째 아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집에서 뒹굴며 언제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분깃을 일찍이 나누어 달라고 졸라 대기 시작하였다. 유산을 달라는 말이다. 유대인의 법으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때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몫의 유산을 미리 각각 나누어 주었다. 12절 끝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유대인은 장남에서 두 몫을 주고 둘째에게는 그 나머지의 절반을 준다.
오늘의 긴 비유 말씀을 가능한대로 짧게 정리하여 그 교훈을 깨달아 보자.
자유(自由)를 주시는 아버지
아직 철이 덜 들었는데도 작은 아들의 유산 분배 요구를 들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요구하면 들어 주실 만큼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 소원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그런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시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그 자유 의지를 갖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은 나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내 안에 있는 자유를 선용할 줄 알아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내게 주어져 있는 이 정도의 건강, 이 정도의 재능, 이 정도의 지식, 이 정도의 지혜, 이 정도의 능력, 이 정도의 역량, 이 정도의 믿음, 이 정도의 자질과 역량 그 모든 것들이 가만히 살펴보면 내게 주어져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선택이 사실은 아니다. 하나부터 열 가지, 백 가지 모두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공급해 주셔서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져 있는 동산, 부동산, 집과 자동차와 돈과 그 어떤 재물이라도 내가 노력하여 마련한 것일지라도 그런 축복을 공급해 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 본문의 그 둘째 아들을 보라. 아들이란 신분이 자기 선택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첫째가 아니고 둘째라는 신분도 자기 선택이 물론 아니다. 12절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했다. 이 둘째 아들도 알기는 안다. 자기가 요구하는 분깃이란 것이 자기 분깃이 아니라 원래는 ‘아버지의 재산’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걸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재산은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에게서 분깃으로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복음 3장 38절 말씀처럼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아들은 그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장차 돌아 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차제에 두 아들의 분깃을 각각 나눠 주었다.
아버지를 떠나 살던 아들의 불행(不幸)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며칠 만에 아버지께 작별하고 재물을 몽땅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 버렸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30절 표현을 보면 그 많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렸다. 하루하루 낭비하며 살다 보니 그 많던 재산인데도 다 날아가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쉽게 생긴 재산은 쉽게 날아가 버리게 마련이다. 14절에 보면 그 많던 재산을 다 없앴다.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가 머물던 그 나라조차도 크게 흉년이 들었다. 어디 가서 한 끼니 얻어먹기조차도 막막해지고 말았다. 창세기에 보면 그렇게 재산이 많던 야곱인데 그의 나이 130이 되던 해에 가나안에 큰 흉년이 계속되자 그의 자손 70명이 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힘겨워 지는 순간이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는 애굽에까지 동냥하러 찾아 내려가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부자는 없다. 돈 있으면 몸이 약하고 몸은 건강한데 재산 없는 집들이 한두 집이 아니다. 재산은 느는데 자식이 없기도 하고 자녀는 많은데 지질이 가난한 가정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을 먹여 살린 것은 과거에 옷 벗겨 팔아 버렸던 동생 요셉이다. 요셉이 먹여 살린 것이 아니라 요셉이 믿던 하나님 아버지가 먹이시고 입혀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함부로 평가하며 불신앙 가운데 살면 안 된다. 추운 겨울나기 어렵다고 봄에 심을 씨앗까지 다 삶아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린 주일 신앙이나 십일조 신앙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 당장 좋다고 주일 날 애들 데리고 놀러 다니면 안 된다. 당장 급하다고 십일조 갖고 이것저것 해결하며 살면 안 된다. 우리 조상들이 쓰던 속담 중에 “아무리 급하다고 바늘허리 묶어 쓰나”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살아서 되는 법이 없다.
여기 둘째 아들을 보라. 제 맘대로 살았다. 먹고 마시고 입고 눕고 쓰고 드나드는 모든 출입과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범사에 아무 규약도 원칙도 없었다. 그야말로 요즘 끔찍한 사회 범죄의 주인공들처럼 막 사는 인생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재산 나눠 받아가지고 제 할 짓 다 하며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 단 돈 십 원도 없이 다 없어질 때까지 다 먹고 다 퍼 마시고 막 써 버렸다.
1905년 11월 17일 러시아와 싸워 이긴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을사 보호조약을 맺은 국치일이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1903년 12월에 이미 한국을 일본의 권세 아래에 둘 것을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그에 따라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지금의 서울인 황성을 점령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이른바 공수동맹을 맺고 러일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조선에서 손을 떼었다. 이후에 고종황제가 제1차 한일 협약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구실 삼아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하려고 달려들었다.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 안에 있던 당시의 도서관인 중명전에서 고종 임금이 주재하는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 안으로 쳐들어가서 노골적으로 고종 임금과 내각을 위협하고 공갈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들은 참정대신 한규설을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이 장면을 바라보며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이렇게 빼앗긴 국권이 5년 후인 1910년 8월 22일에 한일 합방에 까지 치달았다. 당시의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일본의 제 3대 한국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앞에서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잃어버리게 된 날이다. 이 조약의 내용이 8월 29일에 공포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36년간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올해로 그 102년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우리는 102년 전의 악몽과 같은 일본 정부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발전해 갈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이요 감사하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힘이 없으며 지배 받게 되어 있다. 막 살면 건강이든 재산이든 권력이든 그 어떤 힘이든 사라지게 마련이다. 본문의 둘째 아들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는가. 주어진 유산이라도 관리할 줄 모르면 빈털터리 되고 마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손의 바닥과 잔등처럼 가깝다. 행복할 때 관리하고 지킬 줄 알아야한다. 행복할 때 불행을 막을 줄 아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돼지우리에 누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을 수 없는 형편 가운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이다. 쥐엄 열매란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콩과 식물인데 그 열매가 달짝지근한데 사람은 먹지 않고 짐승의 사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 참담한 형편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된 이것이 희망이다. 이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이것이 축복의 새로운 시작이다.
회개(悔改)하고 돌아오는 용기(勇氣)와 환영(歡迎)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비어 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식탁은 언제나 비어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아버지의 집에는 편안하게 누워 잠 잘 수 있는 방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아 아는 것이 은혜다. 17절에, 생각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 축복과 회복의 시작이다. 18절에,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의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고백을 할 용기가 생기는 것이 은혜 받는 시작이다. 19절에, 대개 누구나 이런 형편이 되면 심리적으로 비관하고 자기를 비하하게 된다. 자기 스스로 탄식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포자기하게 된다. 거지가 되었지만 분명히 신분상으로 아버지의 아들인데 스스로 중얼거리고 있다. 자기는 이제 아들이 아니고 품꾼의 한 사람 정도로 여기고 있다. 20절에 드디어 일이 벌어 졌다. 용기를 내어 제 나라로 돌아갔고 아버지가 계신 고향 마을 입구까지 들어섰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알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유명한 기독교 화가인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 - 1669)의 그림으로 그 장면을 상상해 보자. 렘브란트는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평생을 성경을 연구했고 역사적인 성화들을 수 없이 그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소장품이 230만점 이상이나 된다. 소장품 하나당 1초씩만 감상해도 무려 640시간이나 소요된다. 한 작품을 일초씩 감상하려고 해도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보아야 한느 분량이다. 그 중에 최고 걸작이 바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이 그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다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회개하는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에 감동을 받아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떠나서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캐나다의 ‘라르슈 공동체’에 들어가 장애우들을 섬기는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시력을 잃어가는 듯한 애수에 젖은 눈매와 감옥에서 금방 나온 듯한 삭발한 아들의 머리카락과 다 해어진 옷과 다 낡은 신발과 사랑스런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과 같은 오른 손과 투박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아버지의 왼 손을 따로 그려 넣으므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이요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동시에 묵상하여 그림에 담은 렘브란트의 깊은 묵상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20절의 “멀리서도 먼저 알아 봤다, 측은히 여겼다, 달려갔다, 껴안았다.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다 적극적인 사랑이며 풍성한 사랑이며 능동적인 사랑인가를 절절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들을 불러서 선언하는 것이다. 이아들은 종이 아니라 돌아온 둘째 아들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이 둘째 아들의 살아온 과거를 묻지 않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로운 신을 신기는 것은 사랑스런 아들의 완전한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의 자상하고 넉넉한 배려인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즐거워하면서 잔치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 잃어 버렸다가 되찾은 아들! 그것이면 족하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만 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 왔으니 반갑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집을 찾아 왔으니 반가울 따름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큰 아들과 같은 판단하는 마음, 비판하는 마음, 나무라는 마음, 책망하는 마음, 섭섭해 하고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접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무조건 좋은 것 입히고 신기고 귀한 반지 끼워 주며 살진 송아지 잡아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런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마땅히 날마다 즐거워하고 언제나 기뻐하며’(눅15:32) 행복한 나날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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