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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표적이신 예수(눅11:29-36)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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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8-12 22:28 조회 23,883 댓글 0
 
영국의 역사학자였던 E. H. 카는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속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 내용이 책으로 정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역사학 입문서이다. 그는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그 과거와 현재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지난 2012년 8월 10일에 현직 대한민국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하였다. 8월 15일 광복절 67주년을 닷새 앞두고 있었던 일이었다. 우리나라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독도를 직접 방문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어느 해보다도 한일 관계의 첨예한 갈등과 복잡한 외교 관계의 미묘한 대립을 보면서 다시 광복절을 며칠 앞으로 맞이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란 이름으로 끌려가서 온갖 수모와 학대를 당한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해결이나 보상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지지부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살아계신 분들보다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훨씬 많다. 그와 같은 정신대 문제 즉 일본군대 종군위안부 문제를 현 미국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 여사는 2012년 7월 초 국무부 고위 관리로부터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미국의 모든 공식 문서와 성명에 ‘위안부’(comfort women)란 칭호대신에 ‘강제적인성노예’(enforced sex slaves)란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란 좋은 말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의 역사 관계는 매우 가까운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좋은 사촌이 아니라 항상 최악의 긴장 관계 속에서 갈등 구조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지난날의 역사가 그걸 입증해 준다. 섬나라인 일본은 항상 대륙 침략의 야욕에 붙들려 있었다. 아시아 대륙의 동북단 끝에 위치한 반도 국가인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언제나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항상 극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긴긴 세월을 지내왔다. 결국 불행한 순간이 역사 속에 찾아 왔다. 일본은 철저하게 대한민국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악한 이웃국가였다. 고종 13년이었던 1876년에 한일수호조약에 체결되었다. 소위 불평등조약이란 조약이다. 1894년과 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은 조선을 누가 지배하느냐는 목적을 갖고 벌인 전쟁이었다.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 또한 한국과 만주를 분할통치해 보려는 야욕을 갖고 두 나라가 벌인 전쟁이었다. 그 후로 제 1차 세계 대전과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에 이어 세계 제 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이미 조선은 1910년에 일본에 합방되고 말았다. 그리고 36년의 긴긴 세월을 식민지화 했다. 독립을 위한 애국지사들의 죽기를 각오한 희생적인 노력이 컸으나 해방과 독립의 날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란 끝이 없이 전개되는 선과 악의 싸움의 연속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계신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세상을 평가하시길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규정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세상은 아무리 좋은 점수를 주시려고 해도 선한 세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악해 있었던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
이미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고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는 기사와 이적과 표적의 소문이 이성과 저성, 이 고을과 저 고을에 파다하게 퍼져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미 가시는 곳마다 각종 표적으로 넘쳐났다. 그런데도 당시의 악한 세대들이 여전히 예수님께 새로운 표적을 구하고 있었다.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다. 참으로 악한 세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바로 앞 장면에도 보며 귀신에 들려서 말을 못하고 지내던 불쌍한 사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그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로운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목적은 예수님께 대하여 악의적인 편견을 갖고 모함하고 시비 걸려는 못된 마음이었다. 심지어는 저들 중에는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표적이 바알세불을 힘 입은 것이라고 악담하였다. 바알세불이란 파리 떼를 다스리는 신이다. 모세 때에도 바로 임금 앞에 나아갔을 때에 점점 완악해져 가던 바로 앞에 내렸던 네 번째 재앙이 파리 재앙이었다.  물이 피가 되는 재앙, 개구리 재앙,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에 이어서 벌어진 재앙이 파리 재앙이었다. 출애굽기 8장 24절에 보면 바로의 왕궁과 신하들의 집과 온 애굽 땅에 파리 떼가 들끓어서 황폐해져 갔다. 사람들은 그 파리를 다스리는 신이 바알세불이란 신이라고 불렀다. 그 모든 10가지 재앙으로 통해서 교훈하는 바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선언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갖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실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근본이셨다. 그러하신 예수님께 여전히 새로운 표적을 구한 것이다. 그 목적은 표적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비 걸고 곤경에 빠트려 보려는 악한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나 거슬러 올라가는 노아 때에나 오늘 날이나 세상은 여전히 악하고 악하다. 요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소식을 보라. 끔찍하고 악랄하고 참담하고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비극적인 악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의 이 세대가 악하다는 지적은 인간이 악하다는 지적이시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이 세대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인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과 계명의 말씀을 준수하지 못하는 타락한 민족으로 살아 온 날들이 많았다. 그와 같은 모습은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하는 사도 바울의 언급에 보면 인간이 참으로 악하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근거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한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롬1:29-31)라고 하였다.

요나의 표적과 예수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의 백성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왜 요나의 표적인가. 구약 요나서에 등장하는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을 말씀하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방 백성들의 도성인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심판하시겠다고 하니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게 하여 제비 뽑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켜 삼일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하였다. 요나는 그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 밤낮을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요나서 3장에 보면 그 기도의 긴 내용 전문이 실려 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은 마치도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던 3일과 같은 의미를 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반복해서 언급하신 것이다. 요나서는 4장 분량의 아주 짧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잠시 앉아서 읽으면 금방 읽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과정 과정은 매우 심각하고 깊이가 있다.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간 처절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겨우 살아 날수 있었다. 하나님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져서 육지에 오르게 해 주셨다. 장면마다 신비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일인들 못하실 일이 있을까. 하나님은 혼비백산하여 겨우 살아나서 육지에 토해진 채로 있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하셨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결국 요나는 순종하시 시작했고 사흘 길을 다니면서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도 그런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나가 처음에는 못마땅하고 싫었지만 나중에는 물고기 뱃속경험 사흘 후에 순종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심판 명령을 전하러 다녔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선지자의 몫이다. 그 전파된 복음을 듣던지 안 듣든지 하는 것은 백성들의 몫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고 교훈했다. 그렇다. 요나 선지자의 때에나 예수님 당시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요나의 삼일 전도로 니느웨 성민이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표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리라는 말을 전해들은 니느웨 성민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다 굵은 베옷을 갈아입고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니느웨의 왕과 신하들은 백성들과 양과 소 떼에 이르기까지 어른 아이 모든 사람과 짐승들까지 먹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기 시작하였다. 왕도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아서 금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성민들에게 선포하였다. “하나님께 부르짖자.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자. 손으로 행한 강포한 일에서 벗어나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계획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시고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실 지 누가 알겠느냐”고 온 백성들에게 금식 기도를 독려하였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임금으로부터 온 백성들과 짐승 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  재앙을 내리시려는 심판 계획을 멈추셨다. 회개를 촉구하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던 요나인데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가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는 하나님 앞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매우 싫어하며 성을 내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요나를 가리고 있던 박넝쿨 그늘에 벌레를 동원하셔서 그늘을 거두어 가시는 표적으로 요나의 속 좁은 편견을 나무라셨다. 지쳐 하던 요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

하나님은 요나의 삼일 물고기 뱃속 표적 경험이 니느웨에 복음 전파의 기회를 다시 갖게 하고 온 니느웨 성민들을 구원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당시에나 기독교 역사 이천년이 지난 오늘 날에나 그리고 앞으로 주님이 다시 심판 주로 오실 날까지 영원토록 예수님만이 이 악한 세대의 유일하신 표적의 근원임을 증거하고 또 증거해 나가실 것이다.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고 요나보다 더 크시다고 선언해 주셨다. 그렇다. 솔로몬의 시대에는 솔로몬이 큰 임금이요 주변 열강들이 주목하던 지혜의 왕이었다. 누가복음 11장 31절에서 말씀하는 남방여왕이란 스바 여왕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열왕기 상 10장에 나오는 역사를 인용하신 것이다. 스바는 오늘 날 아라비아 남쪽에 위치한 예멘 쯤에 해당하는 국가였다. 솔로몬 당시에 그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는 그 멀고 먼 길을 예루살렘에까지 찾아 가서 솔로몬 임금을 만나고 직접 지혜의 말을 듣고 배우기를 열망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솔로몬의 때에 남방 여왕의 열심을 인용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이 그들의 곁에 가까이에서 표적을 행하시면 각양 은혜로운 천국 비유 말씀을 교훈하시는 예수님을 박대하고 배척하고 불신하는 모습을 통탄해 하신 장면이다. 그러므로 심판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본문 말씀에 31절과 32절에 각각 ‘심판(審判) 때에’라고 하셨다. 심판 때가 되면 죄를 죄 있다고 정죄할 순간이 분명히 있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민족이든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민족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요 요나보다 더 크신 분으로 깨달아지고 영접되고 그 분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는 데로 까지 변화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하시도록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개인, 그런 가정, 그런 교회, 그런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시작이다.

솔로몬 때에는 잠언과 지혜의 왕 솔로몬을 제대로 알아보고 남방 여왕 스바 여왕이 그 먼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것처럼 그런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하는 고백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고 주변도 구원하게 된다. 요나는 예수님과 비교하면 완전한 구원의 그림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요나의 회개 선포로 니느웨 성민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임하는 곳에는 온처하 만민들 중에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들 중의 그 누구라도 모두 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저들 백성들의 바로 곁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표적만 계속하여 구하며 예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 악함을 보신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단언해 놓고 구원을 촉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를 합친 지혜와 구원의 능력보다 천배, 만 배 비교할 수조차 없이 더 크고 크신 완전한 지혜의 근본이신 분이시며 완전한 구원의 본질이신 구주이시다.

내 안에 복음의 빛으로 드러나셔야 할 예수
예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의 빛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임했다. 그러나 악한 세상은 그 분이 빛이신 것을 깨달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거역하고 배척하고 못 박아 죽였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다. 다시 또 반복되는 등불의 비유 말씀은 그런 안타까운 예수님의 심정을 잘 전해 주는 비유의 말씀이시다. 그 어느 누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는 자가 있겠는가. 바닷가의 등대는 등대 그 자체로서 모든 뱃사람들과 항해사들에게 등대인 것처럼 예수님은 온 집 안에 등불로 불이 밝혀져서 집 안을 골고루 비출 수 있는 높은 곳에 세워지셔야 할 등불 그 자체이신 분이시다.

과거에 앞을 못 보는 어느 철학자가 언제나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하지 않는가. 남들이 그를 흉보고 깔보고 무시하려 하자 그 철학자는 말하기를 “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등불입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등불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은 다른 등불이 필요 없으신 원 광명 그 자체이시다. 그런 주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밝게 비추이는 빛이 되길 원하신 것이다. 그 등불은 마치도 몸의 눈과 같은 것이다. 눈이 잘 보이면 온 몸이 밝고 만일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운 것과 같은 원리요 같인 이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질문하셨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누가복음 11장 35절의 이 말씀을 주목하라. 내 속에 불이 켜져 있는가 혹은 꺼져 있는가. 내 속에 있는 빛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인가 아니면 어둡고 침침한 이름뿐인 빛인가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네 속에 있는 빛”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양심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양심이 무디어지고 화인 맞고 나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회칠한 무덤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무덤의 겉에는 하얀 회칠을 해서 그럴싸하지만 속에는 송장이 썩는 무덤이란 말이다. 우리 인간의 양심의 빛이 꺼져 버리거나 어두워져 버리면 그렇게 되고 만다.

어렸을 적에 전기가 없던 환경에 나중에 강화도 섬에도 전기가 들어 왔다. 그래 보아야 방마다 전구 하나씩을 밝힌 정도였다. 겨우 20W짜리 백열전구를 밝혔는데도 그 이전에 사용하던 등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밝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형광등이란 것을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백열전구보다 몇 배나 더 밝고 환하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은 모두가 LED 조명으로 교체 해가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내 신앙 양심의 빛이 점점 환해지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운 임금이었으나 그의 나중은 그의 마음속에 빛이 점점 빛을 잃는 불행한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그렇게 짐승이 많고 풍요로운 재산가였으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색한 삶을 살아가던 중에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고 마는 불행한 재산가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늘 반복되는 묵상이지만 가나안 아이 성 전투 때의 아간의 불행이 자기 마음 속에 구원의 빛이 어두워져 버린 불행한 주인공이었다. 당장은 눈앞에 있는 시날 산의 외투와 금 덩어리 은 덩어리가 귀해 보이지만 그것에 눈이 가리어지면 스스로 불행해지고 가족도 불행해 지고 마는 것이다.

이는 마치도 십일조 신앙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살림하랴, 애들 가르치랴, 애들 학원비 대랴, 아파트 마련한 할부금 갚아나가랴, 자동차 마련하고 보험금 내고 정기 검사료 내고 자동차 기름 사 넣어야 하고 끝이 없이 날마다 달마다 쓸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100을 벌어 100을 다 써도 부족한데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 그런 식으로 살아 가다가 보면 결국은 노아 때에 세상 사람들이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시집가고 장가가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브라함 때에 당장 물이 범람하고 풍요로워 보이던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던 조카 롯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이것이 사사 삼손의 어리석음이요 임금 사울의 불행이요 임금 아합과 이세벨의 미련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마음 속에 불을 스스로 밝혀 보려고 하면 점점 더 마음과 삶이 답답해져 갈 뿐이다. 그러나 내 안에 그 분에 들어오셔서 내 마음을 밝혀 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광명과 예수님이 비추어 주시는 그 환한 빛으로 인해서 36절의 말씀처럼 내 인생이 온전히 밝아지는 그런 은총의 삶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잔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의 생애가 그러하였다. 뉴욕에서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잘 믿는 소년기를 보냈다. 가난하게 컸지만 철저한 십일조 신앙으로 부모에게서 배웠다. 19살에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를 설립하였다. 24살 때에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시작하였는데 사업이 너무 너무 잘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미국 전국 주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텐더드오일 회사를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록펠러가 50대에 들어섰을 때에 병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미라처럼 빼빼하게 말라 가고 있었다. 의사는 그에게 앞으로 일 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 때에, 1890년에 지금의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미 당시에 6,000만 불 이상을 투자하여 세운 대학이다. 그 후에도 3억 5,000만 불 이상을 기부하였다. 그 외에도 잔스 홉킨스, 예일, 하버드, 컬럼비아 대학 등 24개 대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생애 후반기에 록펠러 재단을 만들고, 록펠러 의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모든 재산을 쏟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사업에 앞장섰다. 잔 록펠러가 1909년부터 준비하고 5천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위탁하는 서류에 서명까지 했지만 록펠러가 기대한 미국 연방 정부의 인가증이 나오지 않고 시일을 끄는 바람에 1913년 뉴욕 주의 법인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나이 74살 때의 일이다. 록펠러 재단은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카네기재단과 포드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혀 온 복지 재단 중의 하나이다. 설립 이후 무려 20억 달러 상당의 자금을 전 세계 수천 명의 수혜자에게 제공하였다. 1만 3천 명에 가까운 록펠러재단 특별연구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 후로 잔 록펠러는 98살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방에 실천하였다. 저들 연구원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전 세계에서 록펠러 재단의 설립 취지를 빛내는 삶을 살아 왔다. 록펠러 재단이 내걸고 있는 주요한 과제는 기아를 근절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대학을 발전시켜 유능한 인재를 사회에 배출하고 미국 국내외의 기회균등과  문화적 발전이다. 최근까지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신흥국에 대한 원조를 계속해 가고 있다.

잔 록펠러를 오늘 날 세계적인 인물로 배출한 배후에는 유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엘리자 데이비슨의 신앙 가르침이 컸다. 그의 어머니가 늘 가르친 신앙생활 10가지 강조가 나중에 유서에 적혀져 있었다.

첫째,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둘째,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셋째, 주일 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라.
넷째, 오른 쪽 호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구별하였다가 하나님께 드려라.
다섯째,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여섯째, 아침마다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실천해 가라.
일곱째,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여라.
여덟째, 아침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라.
아홉째,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열 번째,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지금의 빌 게이츠가 재산가요 재산을 나누는 기부에 앞장서고 있지만 당시로 하면 록펠러의 재산은 지금의 빌 게이츠의 재산보다 13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잔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뉴욕 맨해튼 북서부에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자락에 리버사이드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신실한 가정의 신앙 교육이 집안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나라를 밝히고, 시대를 밝히고, 열방을 향하여 후대에 두고두고 하나님의 사랑의 빛과 예수님의 구원의 빛을 비추는 등불처럼 밝혀 온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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