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다. 중국 전한(前漢)때에 제 9대 임금(B.C74-49)인 선제(宣帝)때에 조충국이란 76세의 노장을 임명하여 보내게 되었다. 서북쪽의 테벳 계통의 강족의 침입을 막아 내라는 임금의 명령 앞에서 연세 많은 것을 주저 하는 왕에게 대답한 장군 조충국의 말로 알려진 표현이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듣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늘 예수님의 곁에서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비유의 말씀들을 들었고 또한 예수님이 행하시는 각종 기사와 이적들을 직접 보았다.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 지고 벳세다 광야의 그 많은 무리들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고도 12광주리가 넘치도록 남는 기적의 현장을 보면서 살아갔다. 제자들과 예수님 곁의 무리들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며 지냈다. 예수님의 곁에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의 연속이었다.
듣는 것으로 지식과 정보를 더하고, 듣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가기 때문이다. 각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청하여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대학의 석좌 교수로 모시기도 하고 국제적인 포럼을 하고 세미나의 특강을 듣고 강연회를 하기도 하는 경우가 거기에 있다. 물론 책으로 만날 수도 있고 연구 자료로 만날 수도 있지만 직접 그 본인과 만나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늘 말씀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의 방법은 비유였다. ‘parable' 즉 ‘비유’(比喩)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내용 속에 담긴 진리 전달 방법의 특별한 의사 전달법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比喩)를 통해서 천국을 교훈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는 바로 ‘씨 뿌리는 비유’일 것이다. 누가복음 8장은 그 ‘씨 뿌리는 비유’에 이어서 ‘등잔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비유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 길가나 바위나 가시 떨기나 좋은 땅은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 비유를 해석하신 예수님의 해석에 보면 각 종류의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하는 씨앗은 누구나 다 받았다.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일단 듣기는 다 들었다.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다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 즉 복음의 말씀을 들은 자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관한 교훈이다. 길가의 마음으로 비유된 사람의 마음은 공중의 새들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쪼아 먹어 버리는 것처럼 마귀가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씨앗을 쪼아가 버렸다는 해석이다. 그 다음에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은 습기가 없기 때문에 말라 버렸다. 그 뜻은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듣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깐 믿다가 금방 시련을 당하면 배반하고 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인 가시 떨기에 씨앗이 떨어 졌다는 것은 가시가 자라나면서 그 씨앗을 기운을 막아버린 경우이다. 그 뜻은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집착과 세상 향락으로 인해서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 좋은 땅이란 백배의 결실을 맺는 마음이다. 이는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잘 듣고 지킬 뿐만 아니라 인내하고 잘 견뎌서 풍성한 결실을 맺은 상태를 말한다.
예수님은 이 같은 비유의 해석 후에 곧 이어서 ‘등잔의 비유’라고 제목 붙이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복음 전파사명의 소중함을 또 다시 새롭게 교훈해 주셨다.
요즘이야 전기불의 혜택 속에 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시대에는 어디나 다 등불을 사용하였다. 물론 그 등불을 켜는 기름의 종류야 서로 다를지라도 말이다. 우리나라도 등불이 사라진지 그렇게 오래된 나라가 아니다. 바로 한 세대 이전 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집집마다 등불을 썼다. 교회에 가도 밤 예배 때에는 등불을 밝혔다. 등(燈)의 유리가 연기로 검게 지저분해 지면 청소 담당하는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그 유리를 깨끗하게 닦아서 다음 예배를 준비하는 것도 분주하고 늘 하는 일 들 중의 하나였다.
등을 사용한 역사는 오래다. 예수님도 그런 비유를 들어서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이다. 등불을 켜서 잘 보이는 곳에 두어서 방안이 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냐. 등불을 켜서 무슨 다른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평상 아래의 낮은 곳에 두어서 빛이 잘 비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했다. 집집마다 그리고 공공장소의 가장 잘 보이는 곳 즉 가장 잘 비칠 만한 곳에 등불을 높게 두어서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이 그 등불의 빛을 환하게 보도록 했다.
이웃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자의 빛을 보도록 살아가라.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빛은 감출수가 없는 법이다. 빛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 빛이 세상에 비치었으나 깨닫지 못하는 점이었다.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먼저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였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9-14)
우리나라가 오늘 날처럼 복을 받는 이유도 이 복음의 빛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1885년 4월 5일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부활절 날 아침에 도착하여 팔도강산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그 시작이 오늘 날의 한국 교회를 만든 것이다. 내가 태어난 강화도 작은 섬에도 선교사들이 이 마을과 저 마을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사랑방 전도가 번져가서 이제는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우리 고향 교회에 1906년에 스클랜튼 선교사가 지나간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로 강화도 읍내와 주변 마을을 비롯하여 교회가 새롭게 생기고 또 생겨서 이제는 섬마을의 작은 한 교회가 다섯 곳의 교회가 되었다.
캄보디아는 과거에 죽음의 땅 즉 킬링필드였다. 폴 포트라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라 안의 지식인과 능력 있는 이들을 모두 다 죽였다. 그의 원 이름은 샐로스 사르(Saloth Sar, 1928-1998)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에 반대하던 독립운동가요 군인이었다. ‘Political Potential’에서 유라하여 폴 포트라는 별명이 본명처럼 붙어진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라고 부른다. 1975년에서 1979년의 민주 캄푸차정권 시기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라는 무장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학살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공화국의 론 놀이 세력이 약해져 해외로 망명한 사이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수도 프놈펜에 크메르 루즈가 입성했다. 국명을 민주 캄푸차로 개칭한 크메르 루즈는 혼란한 국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도시 주민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키는 등의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내세웠다. 기존의 산업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기업인과 유학생과 부유층과 구정권의 관계자와 심지어 크메르 루즈 내의 친 월남파까지도 반동분자로 몰아서 모조리 학살했다. 근거 있는 희생자 수가 나오기 전까지 12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다. 1980년 통계로는 2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1986년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610만 명의 국민의 희생되었다고 나온다. 보통 학자들은 집계되지 않은 사람과 이 시기에 기아로 사망한 사람의 수를 합하면 당시 캄보디아 인구 700만 명의 3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달한다고 본다.
그 땅에 세계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킬링필드가 힐링필드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복음이 들어가면 그 복음은 빛과 같아서 어둠을 삼키고 상처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아픔을 보듬고 슬픔의 재가 변하여 화관 즉 꽃의 관을 쓰도록 치유하고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 예수님의 그 복음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 빛은 사랑의 빛이요, 믿음의 빛이요, 소망의 빛이요, 기쁨의 빛이요, 평화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 되어 등대처럼 언제나 사방을 비치고 또 비치는 것이다.
우리 고향 마을의 나를 가르쳐 주신 교회학교 선생님이었던 한규창 장로의 아들 한선종 선교사도 감리교 목사가 되어서 캄보디아에 부천제일교회를 통하여 파송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금번에 미국 방문 길에 전화 통화하게 된 친구 목사의 딸은 약학대학을 다니는데 콘웰 대학에 유학한 캄보디아 선교사의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것이란 소식도 들었다.
부디 바라기는 가정마다 교회 안에서 이 복음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진리의 빛으로 영접하여 그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빛의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어둠을 이기며 빛의 사자로 살아가는 거룩한 복음 운동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를 소망한다.
502장 찬송의 가사 대로 살아가자.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존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빛의 사자들이여” 라는 제목의 이 찬송은 J. E. Lewis 작사하고 J. E. Jones이 1886년에 작곡한 찬송으로 알려져 있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선한 사역 위하여 힘을 내라 주 함께 하시겠네
주의 크신 사랑을 전파하며 복음의 빛 비춰라
주님 부탁하신 말 순종하여 이 진리 전파하라
산을 넘고 물 건너 힘을 다해 복음의 빛 비춰라
동서남북 어디나 땅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
눈 어두워 못 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후렴)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삼가 지켜 행하라.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아! 이런 말씀이 있구나”하고 지식을 더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비유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만 한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고 하셨다. “부뚜막의 소금도 입에 넣어야 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다. 성경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되 생활 속에 차근차근 실천해 나가는 신행일치의생활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수많은 진리의 말씀들을 지켜 행할 때에라야 복된 것이다. 1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다. 듣는 태도가 중요하다.
16절의, 빛을 비추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들은 자가 전하여야 한다. 주변에 계속하여 그 빛된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사명이다.
17절은, 복음의 비밀이 때가 되어 세상에 온전히 들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의 빛을 가리지 말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낱낱이 전하라는 분부를 하신 것이다.
18절은, 그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에 때라서 결과 즉 열매가 달라지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누가복음 8장 4절에서 15절까지에서 ‘씨를 뿌리는 비유’라 말씀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어떤 인생은 평생을 길가처럼 살다가 마는 인생도 있다. 또 어떤 인생은 바위와 같고 가시 떨기와 같은 인생으로 살다가 생을 끝마치는 인생도 있다. 예수님은 이 평범한 비유를 통해서 좋은 땅 인생으로 살아가라고 촉구하신 것이다.
어느 부모가 아들딸 낳아서 애써 길렀는데 그 아들딸이 길가와 바위와 가시떨기 같은 인생으로 흐지부지한 인생을 살다가 역사 속에 사라지길 바라겠는가. 누구나 어느 가정이나 아들딸들과 손자손녀들이 복음을 알고, 진리를 알고,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가 되어서 축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는가.
인생은 청지기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에는 ‘은 열 므나 비유’로 등장한다. 누가복음 19장 11절에서 27절까지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 말씀이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가려고 먼 나라로 갔다. 그 종들 열 명을 불러서 은 열 므나를 주었다. 므나는 유대인의 화폐 단위로 노동자 3개월의 품삯정도 금액이다. 로마의 100데나리온 정도이다.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장사하라” 그런데 백성들이 그 왕 될 사람을 미워해서 서로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소문을 냈다.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왕이 열 명의 종들을 불러서 그 동안 어떻게 장사하여 이익을 남겼는지 물었다. 그 때에 첫째 종이 나와서 “주인이여 여기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하고 자랑스럽게 왕 앞에 내어 놓았다. 주인이 말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칭찬하고 후대해 주었다. 둘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노라고 보고하였다. 그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또 한 종이 왕 앞에 나아왔다. 그는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아니한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하고 말했다. 주인이 말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말했다.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자에게 주라.” 사람들이 말했다.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엄히 명령하였다.
이것이 비유의 힘이다. 이 비유를 깨달아 알고 믿고 순종하며 따르며 살아가는 인생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과 문명이 복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거역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마다 어둠의 영이 덮치는 불행이 있었다.
지난 2012년 7월 20일에 미국 덴버 콜로라도에서 벌어진 극장의 총기 난사 사건을 보라. ‘배트 맨 3’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려고 극장에 몰려 든 관객 들 12명이 죽고 58여명이 총상을 입었다고 하지 않는가. 범인 제임스 홈즈 한 사람의 불행이 아니지 않는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의 영이 덮치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남들도 불행해 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라고 강조하신 것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는 영생 복락이 주어지지만 듣지 않고 지켜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거룩한 가정을 이루라.
‘등불의 비유’와 전혀 다른 내용이긴 하지만 누가복음 8장 19절에서 21절에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골고루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예수님 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 때에 어떤 이가 이 소식을 전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부모형제와 골육친척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거룩한 가정 즉 성가정(聖家庭)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신 교훈의 말씀이시다. 세례 요한을 낳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은 거룩한 가정 즉 성가정이었다. 예수님을 낳아 키운 나사렛 마을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도 물론 성가정이었다.
구약의 노아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 즉 성가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어도 노아 부부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는 달랐다. 홍수 심판 이전에 방주 안에 들어갔고 홍수 심판을 피하고 이기는 주인공 가정이 되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이 12아들을 낳으며 이루어간 가정은 거룩한 가정을 이루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가는 은혜의 가정, 축복의 가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나안에 불어 닥친 극심한 기근 속에 야곱의 가족이 겪던 경제 위기를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이 끌어안았다. 요셉은 애굽의 고센 땅을 아버지 야곱과 70여명의 형제들과 조카들에게 배려하였다. 하나님은 요셉의 손길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장차 가나안에 세워질 거룩한 언약 민족의 기초를 만들어 가고 계셨다.
가족이 소중하다. 가정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병든 베드로의 장모님도 문병 가시던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몰라라 했겠는가. 본문을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셨다. 그러니 어머니 마리아가 나중에 남편 요셉으로 인하여 낳은 그 동생들 중에서 야고보와 유다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자라나지 않았겠는가. 저들 야고보와 유다와 같은 동생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흠모하고 본받아서 나중에 초대교회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되었다.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쓴 주인공들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들이지 않는가.
금번 미국 방문과 함께 지난 주에 뉴져지연합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성회였다. 신앙위원장을 맡은 이규용 권사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다. 전주고등학교를 나오고 전북대학교 사범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교편 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가서 배링튼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인 MBA 과정을 마쳤다. 오래도록 뉴져지에 살면서 맨하튼에서 사업을 해왔다. 외아들 한국이를 신앙으로 잘 키워 맨하튼의 유수한 기업에서 CFA 자격을 가진 어엿한 사회인으로 배출했다. 믿음 좋은 가정의 가장으로 내외간에 아들 이름도 ‘대한민국’의 앞 두 자를 따서 ‘대한’이라고 지었다. 동생을 낳으면 ‘민국’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외아들만 주셨다고 했다. 집회 중에 3번 식사를 같이 하며 교제할 수 있었다.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글들을 모아서 책도 두 권 냈다. 한 권은 한글로 한 권은 영어로 냈다. 이번에 그 두 책을 모두 선물로 받아서 읽어 보았다. <아들아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라>는 책을 냈다. 영어 번역본의 같은 책도 선물로 주었다. <Letter from a Father to His Beloved Son>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 교회에는 저술하는 분들도 여러 분 계셔서 4권의 책을 선물로 받아 왔다. 아버지 이규용 권사는 책에서 아들에게 “준비된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과 함께 하며 좋은 습관을 가지고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며 자신 안에 있는 바벨탑을 허물고 주 안에서 형통한 자의 삶을 가꾸어 가라. 아름다운 사람으로 감사하며 겸손하게 외로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바쁠수록 기도하며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사랑에 빚 진자답게 주변 사람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최후의 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라. 하나님의 기쁨에 속한 자답게 과학과 신앙과 인간의 지혜를 균형있게 다루어 가며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거라.”하는 틀의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 한국인 아버지 상을 세상에 드러낸 좋은 책이었다. ‘가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분량에서 그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가 띄우는 편지 한 장이 누군가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리움에 애타는 이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다면 너는 주저 없이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띄우거라.”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폭염기에 다가올 가을을 생각하며 경상남도 통영이 낳은 시인 김춘수(1922-2004)님의 ‘꽃’이란 시를 생각해 보라. 아버지 이규용 권사도 이 시를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생활 속에 실천되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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