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예수를 믿지 않는 부인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 왔다면 지금 쯤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차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의 한 사람으로 살아 올 수 있었고 또한 목사로 부름을 받아 주님의 몸 된 거룩한 교회를 섬기며 성도 여러분을 목양할 수 있는 부르심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과 은총과 축복하심이 아닐 수 없다.
신구약의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처럼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 그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갔던 믿음의 선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고향 마을인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 심지어는 죽이려고 까지 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8-30)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저들에게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 쫓고 바람과 파다를 잔잔하게 하셔서 풍랑 속에서 제자들을 안전하게 하신 소문은 마을과 마을, 이 도성과 저 도성으로 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가고 있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누가복음 5장 1절에 보면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 와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다고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인 게네사렛 호수가에 몰려드는 무리들을 피하여 호수 가에 있는 배 한 척에 오르셔서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도록 띄워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리들에게 전하셨다. 그런데 그 배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부 베드로의 배였다. 그 배의 주인인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제자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곁에 몰려드는 무리들의 기대와 관심은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배고픈 무리들이 예수님이 축사하시는 감사 기도를 통해서 어린아이가 들고 나온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배 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등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그대로 따르기에는 부담스러운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은 무리들이 따르는 것 같았지만 때가 되면 저들은 제 각기 흩어져 갈 뿐 남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요한복음 6장에도 보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 그러니까 한 이만 명 정도의 무리들을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배부르게 먹이고 그 밤에 바다 위를 걸어서 풍랑 가운데 고생하는 제자들 곁에 다가 가셔서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던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이튼 날 바다 건너편의 무리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갈릴리를 건너서 맞은 편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무리들을 향하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겼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는 교훈을 말씀하셨다. 이 교훈을 잘 깨닫기 부담스러워 하던 무리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반응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이 말에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나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1-63)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때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부르신 이후였다. 잘 관찰해 보자. 제자로 부르신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의 몫이요 오늘 날로 하면 내 몫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제자이긴 제자인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다. 이 사건과 대화 이후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곁을 떠나갔다. 요한복음 6장 66절에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하였다. 여기 말씀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 말고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보려고 따라다니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짐작하여 알 수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질문하셨다.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하고 대답하였다. 이 날 이후로 예수님 곁에는 주로 열 두 제자들만 남았다. 그러나 그 중에 가롯 유다는 나중에 마귀에게 붙잡혀서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불행한 제자. 이름뿐인 제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부르심이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제자가 된다든지 혹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된다든지 혹은 집사나 권사나 속장이나 교사나 목사로 부르심을 받는 일은 참으로 신중하고 두렵고 부담되고 떨리는 신앙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3년 여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여 마치시기 까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수를 늘려가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던 것만 같다. 적은 수의 제자들이 어서 수많은 무리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어떤 전략을 짜시거나 거창한 선교 전략이나 전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신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열두 명은 참으로 평범한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전파하시는 일을 위하여 엄청난 무리들을 동원하시거나 군사력이나 정치적인 힘을 동원하시지 않았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세상적인 기준이나 인물 평가로 보면 별로 대수로워 보이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제자 열두 명을 택하여 저들에게 기대를 걸고 계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방법이셨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로부터 질문을 받으신 적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니느라.”(눅17:20-21)
달걀 안에 생명력이 있으면 때가 되면 어미 닭의 품에 안겨 생명, 즉 병아리가 태어난다. 민들레 홀씨들이 힘이 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지만 그 씨앗 안에 생명력이 있으므로 온 천지를 민들레 꽃 밭으로 뒤 덮는 것이다. 겨자씨가 눈에 잘 보이지 않은 정도로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으므로 심겨지고 자라나기 시작하면 때가 되면 새들이 날아와서 깃들만한 큰 나무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때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다. 약하여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비겁해 보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 충만을 받고 나니까 세계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서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정병들이 되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 대하여 문안한다. 그리고 본문인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부르심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부르심이란 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열두 사도의 부르심과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 성도들을 부르신 부르심을 보면 지혜로운 자와 능한 자와 문벌 좋은 자라서 부르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오히려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성도된 우리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신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의 자랑은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랑 뿐이어야 한다. 예레미야 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고 하셨다.
그렇다. 성도된 우리들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어떻게 실현되는 가를 보며 오직 그와 같은 일들만 깨닫고 자랑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택하심과 부르심은 그 과정에 단계가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을 골고루 다룬다. 그 내용이 서로 달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령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51절까지에 기록된 열두 제자들의 부르심의 장면을 보면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회심의 부르심이다.
둘째, 사역의 부르심이다.
셋째, 사도로서의 부르심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맨 처음에 구원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만유의 주님이시오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신 것을 인정할 때에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기간 동안 저들은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가령 베드로, 안드레, 빌립, 나다니엘 같은 이들은 세례 요한을 추종하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고 예수님을 소개 할 때에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요한복음 1장 44절에 보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세다 사람이었다. 저들이 한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 씩 선택하여 부르심으로 제자가 된 것이다.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기 전까지는 “소를 샀다, 결혼 하러 가야 한다, 밭을 샀다.” 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는 무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육지를 향하여 무리들을 가르치신 적이 있다. 그 전 날 밤에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초청하셨다. 그 말씀에 순종한 시몬인 베드로가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렸을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아 올렸다. 곁에 있는 다른 동료들의 빈 배까지 이끌어다가 그 배에도 가득하게 물고기를 나누어 실을 정도였다. 그 현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하고 고백하였다. 이것이 회심의 부르심인 것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다 같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1)고 했다. 이것이 사역의 부르심인 것이다.
누가복음 6장 6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회당 안에서 고친 치유 사건으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미움을 더욱 받게 되었다.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하고 의논하고 있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산에 가셔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아침에 산에서 내려 오셔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택하셔서 ‘사도’라고 이름 붙여 주셨다. 누가복음 6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이 ‘사도로서의 부르심’인 것이다. 예수님은 저들 열 두 제자들을 둘씩 짝 지어서 훈련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저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 또한 주셨다.(막6: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을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눅9:10) 전도하고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일어났던 권능에 대하여 예수님께 자세하게 보고하였다.(눅9:10, 눅10: 17)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곁에 있었고 예수님도 개인기도 시간 이외에는 늘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교제하고 늘 함께 먹고 마시고 늘 함께 휴식도 하고 늘 함께 배우고 늘 함께 예수님의 사역을 일일이 지켜보았다.(막6:30-34) 또 하나의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루어졌다.
네 번째는 순교의 부르심이다.
열두 제자 중에 가롯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열 한 제자는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순교자의 길을 갔다. 그 중에 사도 요한 만이 장수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 사도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혹독한 고난을 당하여야만 했다. 나중에는 밧모라는 작은 섬에 유배당하는 쓸쓸하고 고독한 시간을 이겨내야만 하였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기초이다. 오늘 날 우리는 순교는 아닐지라도 순교자의 신앙정신으로 주를 섬기고 복음을 전파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겨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부르심의 때.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이 때에”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말씀만 관찰해 보아도 그런 내용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셨다. 그리고 갈릴리 회당에서도 가르치셨고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기 시작하셨다. 한 번은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안식일을 옛 고향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키셨으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마을 한편에 있는 낭떠러지로 끌어다가 밀어 버려 죽이려고 까지 했다. 그 후에도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나병환자도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별의 별 환자들의 병을 다 고쳐 주셨다. 여기저기서 귀신도 내어 쫓으셨다. 결국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큰 배척을 받으셔야 했고 저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기 시작하였다. 누가복음 5장 21절에 보면,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하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초긴장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때를 찾아 예수를 죽일 생각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긴장감이 팽배하여 가던 어느 시점에 예수님이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A. B. 브루스(A. B. Bruce) 같은 성경학자는 <열두 제자의 훈련>(The training of the twelve)이란 그의 책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리셔서 함께 하신 시간은 삼년이 아니라 일 년 반 정도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 하셨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붙들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을 예견하셨다. 그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날마다 저들을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비유로 천국을 교훈하시고 수많은 기사와 이적과 치유와 귀신 추방과 죽은 자라도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셔 하나님의 권능이 어떻게 임하는 가를 보여 주셨다. 필요하면 이만여명의 광야에 모인 무리들을 어린아이 한 끼 음식인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놓고 감사 기도하셔서 배불리 먹게 하시고 오히려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도 보여 주셨다. 왜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급하셨다. 그러므로 부르신 열 두 제자들을 이스라엘에 죄 사함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고 교회가 탄생하게 하는 성령 받을만한 사도들로 예비하시고 준비 시켜 가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할만한 사명자로 세워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는 중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점점 더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적하며 적개심을 갖고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 대신에 열두 제자들을 훈련하고 가르치시는 데 집중하셨다.
예수님은 미움과 시기와 핍박이 극성을 부리던 때에 하루 한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열 두 제자들을 훈련하고 장차 다가올 주님의 죽으실 날을 준비시키려 하셨다.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다. 세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보았고 배척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회개의 초청을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의 가치나 겸손하고 온유한 자의 삶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없었다. 예수님이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에 대하여 보고 들어서 잘 알면서도 그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단지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입지와 권력이 위협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죽여 없앨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이천 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다. 또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4:5) 세상은 악하고 시간과 세월은 쏜 살 같이 지나간다. 시간과 세월은 막대기나 가시채로도 막을 수가 없다. 성도요 제자요 임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을 소중하게 여기며 시간과 세월을 아껴 때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부르심을 받은 자의 임무와 사명.
구라파의 중세 시대 교회에 가 보면 400년 혹은 500년씩 된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시대 이후에 세워진 교회의 거대한 예배당 안에 열두 사도들의 웅장한 부조물들이 세워져 있다. 저들은 대부분 갈릴리의 어부 이거나 세리 출신이거나 평범한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저들은 제사장 가문의 후손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명문가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런 저들을 지나치리 만큼 동상과 부조물로 거대하게 장식한 것을 보면 심히 마음에 부담이 된다. 오직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하셔야 하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자칫 잘못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로채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2-1536)은 영국의 웨일스 슬림브리지 출신의 기독교인이다. 그는 최초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 영어 번역을 위해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번역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1492년 태어나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한 틴들은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강의할 만큼 명망을 얻은 학자였던 그는 불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에도 능통했던 언어의 달인이었다. 그의 업적에 의해서 최초의 활자 영역본 성경이 나온 것이 1525년이었다. 영국의 기근을 구제할 곡물선에 6,000여부가 숨겨져서 밀수된 신약 본은 발각되어 수거됐으나 영국역사와 근대 영어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국 그는 1536년 10월 6일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죄목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유배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44살 때에 목 졸려 사형을 당하고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성경의 번역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사형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주님이시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말씀을 남기었다. 그의 사형 이후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영어 번역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영국의 왕 제임스 1세 때에 학자 54명을 동원해 1611년 완역한 성경은 거의 80%가 그의 번역을 기초로 한 것인데 흠정역 성경(KJV)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순교하였으나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선교의 사람이 되었다.
지난 삼년간 우리 공동체가 겪은 일들과 광야 체험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 여기까지 부르심을 받아 나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분명한 사명과 임무가 있다.
지난 수요일 밤에 우리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 곳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리셔서 세상에 쌍쌍이 내어 보내실 때에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더불어 주셨다.(마10:8) 그 열둘을 예수님은 ‘사도’라고 칭하셨다. ‘사도’란 ‘보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사도’라는 ‘아포스톨로스’(ajpovstolo")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최근에 대통령 당선인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나도록 중국에 본인을 대신해서 친서를 들고 가서 전달하는 특사를 보내지 않았나. 보낸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이 세상을 구원할 ‘사도’로 보내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도’란 ‘특사, 사자, 대사, 대표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도의 진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받으므로 그 진가가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사도의 임무와 사명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서 교회인 성도들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 보면,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열두 제자인 사도들은 예수님 이후에 활동한 최초의 기독교교사요 설교가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저들을 “거룩한 사도”(엡3:5)라고 칭했다. 부르심을 통하여 끝이 없는 임무와 사명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된 이들에게 그 임무와 사명 수행에 부응하는 생각한 적이 없는 은총과 약속된 상급과 축복을 분명히 주실 것이다. ‘사도’란 표현은 누가복음에만 여섯 번, 사도행전에는 서른 번 이나 나온다. 사도들은 제자들로서 평범한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저들에게 부여된 임무와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교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불길처럼 세워져 가며 주를 믿는 성도들이 처처에 수 없이 세워져 가는 것을 통하여 긍지와 보람과 존경과 영예를 누리게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현세에서부터 물 붓듯이 부어 주셨다. 열두 제자들은 부모와 가족을 떠난 헌신을 통하여 복음 안에서 만난 수만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영혼 추수의 감격과 저들과 복음 안에서 형제자매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순교자의 길을 간 저들의 나중 축복은 상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상급이 되었다(눅18:29-30)
복음성가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를 함께 부르자.
나를 제자로 부르신 주 예수님.
열두 제자를 사도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오늘 날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교인 정도에 머물지 말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 속회 편성에 이름 실린 정도로 살지 말고 제자요 사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훈련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 전파자요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시범을 보이시며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이신 후에 대적자들에게 붙들리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도망가고 숨어 지내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사랑의 고백을 다시 받아 내셨다. 그리고 사십 일 만에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약속해 주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마태복음 28장 19절과 2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하셨다. 가서 무엇하라고 하셨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서로의 모습을 보며 속상해 하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 열두 제자들도 그랬었다. 예수님이 붙잡히고 십자가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완전 실패처럼 보였다. 그런데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가고 숨어 버렸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 나서서 만나셨다. 소심하고 비겁하고 나약했던 저들이 성령을 받고나니까 지난 이천년 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이 대답이다. 성령 받아야 담대해지고 성령 받아야 참 제자가 된다.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주님의 담대한 참 제자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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