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쌀이나 온갖 곡물들을 판매 할 때에 저울에 달아서 팔고 산다. 이미 일정한 포장에 정확한 무게를 달아서 밀봉하여 운반하기 쉽게 해서 판매한다. 그러나 과거에 시골의 5일장이 열릴 때에 읍내 시장에 가보면 곡물을 되나 말에 담아 팔았다. 요즘이야 무게 중심으로 저울에 달았지만 이처럼 과거에 저울 사용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부피 중심으로 사고팔았다. 그 되에 콩이나 팥이나 수수나 좁쌀을 사고 팔 때에 곡물을 되에 담고 밀대로 싹 밀어서 되 위로 올라오는 것을 밀어 내 버리고 한 되 두 되 부피를 측정하여 팔고 사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주인은 정한 분량만 주려고 하고 손님은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려고 실랑이를 했다. 또 그 되나 말을 담을 때에 소복하게 담아서 더 이상 담기지 않을 정도로 잔뜩 담아서 한 되 두 되 혹은 한 말 두말 그 량을 정하여 팔고 사던 때가 있었다. 그 때에 인심 좋은 주인이나 혹은 손님이 좀 더 달라고 간청하면 한 움큼을 듬뿍 더 집어서 자루에 넣어 주고는 하였다.
시장에서 곡물을 파는 상인은 한 움큼 더 주는 것을 인색해 하거나 혹은 후한 인심처럼 여기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복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시고 넉넉하게 주시고 남도록 주시고 끊임없이 계속하여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최근에 새벽마다 다시 대하는 창세기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축복해 주신 최초의 말씀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는 창조주요 섭리주이시다. 홍수 심판 후에 노아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창9:1-2)
아브라함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좀 더 구체적이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창26:23-24)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아직 번성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그 다음 절에 보면 이삭의 신앙과 삶이 소개된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26:25)
자,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첫째, 제단을 쌓았다.
예배에 비중을 두는 생활을 계속한 것이다.
둘째,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기도와 찬송 생활에 활력이 넘쳤다.
어제 새벽 기도 대신에 이른 아침 시간에 성전 공사 현장에 둘렀다. 층층이 둘러 보고 기도하고 돌아오는데 어느 70대 초반 쯤 되는 여자 분에 잠바에 털모자에 목도리에 마스크를 쓰고 둘레 길에서 내려오면서 혼자 크지 않은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광채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428장 찬송 1절)
셋째, 장막을 쳤다.
자기 가족과 종들의 삶의 처소를 마련한 것이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넷째, 우물을 팠다.
양과 소와 약대를 치던 목축문화 즉 족장 문화 시대에 주인이 종들과 더불어 우물을 팠다는 말은 산업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 장면을 보여 준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시냇물이 흐르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척박한 땅을 파들어 가며 샘물을 마련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는가. 로마서 12장 10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다. 남의 집 감나무 밑에 드러누워서 홍시가 내 입에 떨어져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감나무 묘목을 심고 가꾸고 키워서 스스로 하늘의 축복을 가꾸어 가는 열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복을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탕으로 성경을 묵상해 보면 이삭의 아들 야곱도 마찬가지고 야곱의 아들들 중에 11번째 아들인 요셉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창세기 32장 10절 끝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던 야곱이 형 에서가 400명의 무장 세력을 앞장 세워서 보복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 앞에 급하게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고 말하며 빈털터리로 출발했던 자신이 이십 여 년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갈 때에 산허리를 덮는 어마 어마한 양떼와 소떼와 약대의 떼를 이루었나를 고백하고 감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최근의 우리나라 황소 즉 최고 우량 종우 한 마리 값이 10억이 넘는다는 사진 보도와 설명을 보았다. 야곱은 당대에 큰 축복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들 중에 애굽으로 팔리어 갔던 요셉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17살 때에 벌거벗겨 진채 애굽에 노예로 팔리어 갔던 요셉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13년 후인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나. 그리고 110살에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자그마치 80년 동안 당시 최고의 문명 거대 국가였던 애굽의 총리로 지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복을 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이 오늘 날 살아 계신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 모두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모세의 광야 시대와 여호수아의 가나안 시대와 사사 시대와 사울 왕과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를 끝으로 점점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나라는 남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나뉘었고 블레셋과 앗수르에 의하여 남북이 다 망하고 말았다. 모조리 다 포로로 끌려갔고 70년간의 비운의 바벨론 포로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스룹 바벨과 예수아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총을 경험하며 선조들의 시대에 빼앗겼던 땅 이스라엘에 되돌아 갈 수 있었다. 당시 바사 제국은 속국인 이스라엘 나라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열매들을 수탈해 갔다. 각종 세금으로 다 뜯어 갔다. 생활이 참담하고 비참한데 가뭄과 병충해와 특히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논밭과 포도원이 극심하게 황폐해 가고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와 학개와 스가랴가 앞장서서 영광스럽게 회복될 메시아 왕국을 선포하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B. C 537년에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100여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의심만 커갈 뿐 마음과 뜻을 모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 운동은 쉽게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저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회복을 꿈꾸었고 인본적인 변화를 기대하였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더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회복의 날ㅇ늘 기다리며 회개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는커녕 당장의 안일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 온갖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백성들의 신앙을 제대로 지도하고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조차도 좋은 제물로는 자기 배만 채우고 썩고 병든 제물로 제사하는 타락상을 보였다. 제사하고 예배드리기는커녕 하나님의 제단을 더욱 더럽히는 죄악을 일삼고 있었다.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성전이 올바른 제사의 중심이 아니라 온갖 죄악의 온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자연히 백성들의 봉헌 생활은 등한해져서 십일조나 봉헌물을 드리는 일을 등한히 여기고 무시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예배 생활과 헌신 생활이 타락하자 순식간에 가정이 무너져 가고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었다. 신앙이란 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세우지기가 어렵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것은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다 마찬가지이다. 가정이 병들자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고 강제로 이혼을 요구하는 등 여기저기서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앞장서서 이방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가정 회복 운동을 벌였지만 하루 이틀 만에 회복될 일이 아니었다.(말2:10-16)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저들의 타락상을 지적하시고 한탄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말2:11),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말2:13)고 하셨다.
이 같은 암울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본문이 포함된 3장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 말라기 3장 1절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렇다. ‘내 사자(使者)’란 세례 요한을 일컫는 예언이고 ‘언약(言約)의 사자(使者)’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이시다. 여기 말씀 중에 ‘갑자기’라는 말씀은 이전 성경에는 ‘홀연히’라고 했다. 이 말은 ‘즉시, 곧’이라는 의미보다는 ‘생각하지 못한 때에’라는 뜻이다.
마치 일본에 빌붙어 살던 이들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해방이 은근히 지연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오늘 날 남북한의 통일 문제도 입으로만 통일을 원하지 내심으로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세력이 있단 말이다. 말라기 당시의 백성들의 모습이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다 식어 버린 상태였다. 영적으로 나태하고 안일한 상태에 젖어 있었다.
영광의 주께서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학개 선지자나 스가랴 선지자도 한 결 같이 예언하고 있었다. 학개서 2장 7절에 보면,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고 학개서 2장 9절에서 다시 반복하셨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2장 10절에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 중심, 예배 중심,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 십일조 중심, 봉헌물 중심으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선포하신 것이다. 세상도 적당히 사랑하고 하나님도 적당히 사랑하는 방법이란 없다. 예수님도 산상 수훈에서 그렇게 교훈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또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다.
십일조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국민의 의무를 다할 때에 국민의 특권과 혜택이 주어지고 보장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십일조와 봉헌물 신앙을 신앙의 척도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절대 명령이다. 십일조는 아브라함도 드렸고 야곱도 드렸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일조의 계명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다. 레위기 27장에 보면 구체적이고 자세한 십일조 생활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레위기27:30-32) 또한 민수기 18정 21절에는,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규정해 주셨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正義)와 긍휼(矜恤)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는 말씀으로 십일조 생활을 명실상부하게 철저히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자 그러면 본문에서 십일조 생활을 잘하면 이런 축복을 받게 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 창고에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면 이러 이러한 축복을 주시겠다고 했다.
하늘 문을 여시는 복.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고 하셨다. 복은 땅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늘 문을 열어 주셔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복이다. 땅에서 얻는 복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땅에서 얻는 복은 불에 타는 복이요 물에 떠내려가는 복이요 독감만 걸려도 죽을 수도 있는 복이요 강도가 쳐들어오면 비참해 지고 도둑이 들어오면 사라져 버리는 복이다. 땅의 복은 마치도 봄날의 꽃과 같은 것이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말이 있지 않나. 이 땅에서 추구하는 복은 어느 나른한 봄날 꿈을 꾸고 깨는 것과 같은 것이다. 꽃이나 권력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세상에서 이 땅에서 얻는 복은 그런 것이다. 참다운 복, 영원한 복을 받으려면 내 인생과 내 가정과 내 가문과 내 자손과 내 교회와 내 민족과 내 나라의 앞날에 하늘 문이 열려야 한다.
아프리카의 르완다(Rwanda)는 역사적으로 소수 투치족이 다수 후투족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후로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우간다로 망명한 투치족은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결성하고 르완다를 침공했다. 이로써 내전이 발발했으나 정부와 RPF가 1993년 8월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내전은 일시 중단되었다. 지금까지 5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죽고 100만 명 이상의 후투 족이 이웃 나라로 망명하였다.
우리나라 남북한의 밤하늘을 찍은 항공사진을 본 적이 있지 않나. 남한은 환한데 북한은 깜깜하다. ‘우주에서 본 남북한’이라고 인터넷을 찾아보라. 하늘 문이 닫힌 곳이 북한 땅이다. 우린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가정도 개인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같은 아파트에 같은 평수의 공간에 살아도 한 집은 천국이고 한 집은 지옥이다. 왜 그런가. 무엇이 다른가. 하늘 문이 열려야 한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또는 그 어느 교회이든 제대로 되려면 하늘 문이 열려야 한다. 지난 토요일 밤에 흰 눈에 내려서 천지를 다시 덮었다.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처럼 축복은 땅에서 찾고 은행에서 찾고 주식 시장에서 찾고 금은보화를 넣어 둔 금고에서 찾고 헬스클럽에서 찾고 컨트리클럽 멤버십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복, 원천적인 복, 영원한 복, 참 만족을 주며 진정한 평화를 주는 축복은 하늘 문이 열릴 때에 임하는 축복이다. 그 축복이 열린 하늘 문에서 내려와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십일조의 비밀을 안 세계의 부자들>(박은몽 지음)이라는 책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벤저민 프랭클린, 윌리엄 콜게이트, 존 워너메이커, 존 록펠러,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 콘래드 니콜슨 힐튼, 한국도자기 창업자 김종호 회장, 참존 화장품의 김광석 회장에 대한 생생한 간증이 넘쳐 났다.
지난 2013년 1월 10일에 천국환송을 받은 고 최창근(1914-2013) 장로의 일대기를 보라. 그는 1914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한 후 신의주제일교회 담임 목사였던 한경직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다.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38년 견직물 도매업을 하는 삼원상사를 설립했다. 이후 1960년대 섬유업을 통해 사업을 크게 일으켰으며 1956년 한국무역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월남한 후에는 50년을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사도 바울 곁의 바나바처럼 평생을 주의 사역에 힘썼다. 후배 김경로 장로는 “고인은 큰 나무요 뿌리 깊은 거목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울창한 그늘에서 힘을 얻었다”면서 “다툼을 멀리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살았던 삶 속에서 그는 기드온협회 초대 한국지부장을 맡으면서 전국에 5천만권의 성경을 무료로 배포했고, 기독실업인회와 찬송가를 하나로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사업적으로 성공한 최 장로는 숭실대 이사와 숭의학원 이사장, 영락학원 이사장, 보성학원 이사장 및 명예이사장, 아세아연합 신합대 이사 등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또 그는 한국국제기드온협회 초대 회장,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 군복음화후원회 부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부회장 등 선교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한국 기독교 선교의 큰 족적을 남겼다. 최 장로는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당시 약 8만평 규모의 부지를 기증하는 등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벌이며 선교 및 교육 사업에 3,000억 원 이상을 쾌척하고 에녹처럼 100년을 다 살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최창근 장로 그의 생애는 하늘 문이 활짝 그 위에 열린 생을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간 인생이 되었다.
보호해 주시는 복.
메뚜기의 피해를 막아 주신다. 그리고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다.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익기 전에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다. 그 포도나무 열매가 마지막까지 잘 익도록 보호하는 손길이 누구의 손길인가.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128:3)고 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 시편 127편 1절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고 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면 지금 잘되는 것 같아도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당장 아까운 마음에 온전한 십일조 신앙을 갖지 못하고 그걸 아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재정 관리가 아니란 말이다. 10년을 모으고 평생을 아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고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돈이든 재물이든 부동산이든 건강이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잘되어야지 하나님 벗어나서 잘 되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하듯 속여서 잘되려 하고 하나님 외면해 가면서 잘 되 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본인이든 자식이든 재산관리든 부동산 관리든 당장 손 안에 있고 주머니 안에 있고 통장 안에 있든지 주식으로 쌓여 있든지 잘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포도나무 열매와 토지의 소산에 메뚜기나 한재가 덮치지 않아야 나중에 가서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기한 전에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나.
미국의 왕실이라 불리는 명문가 중의 명문가로 꼽히던 케네디(Kennedy)가(家)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공산당 선언이 나온 해인 1848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위스키 통을 만드는 사업을 했다. 그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가난을 이겨내려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서 술집을 차렸다. 금주령이 내렸던 시절에 영국의 술을 밀반입해서 떼돈을 벌었다. 그는 주 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아들을 열심히 공부시켰다. 그래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Joseph Patrick Kennedy,1888-1969)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장이 되었고, 증권거래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유리회사 주가 조작과 영화사업과 경마장 사업으로 재벌이 되었고, 영국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J. F. 케네디(J. F. Kennedy, 1917-1963)는 43살에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가의 형제들은 승승장구했다. 상원의원도 되었고, 법무장관도 했다. 하원의원도 2명이나 있다. 여기까지 보면 케네디 가문은 분명 성공한 가문이다. 그런데 그 뒤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J. F. 케네디의 형 조지프 케네디는 1944년에 공군 조종사로 베를린 공습에 참여했다가 격추당해서 죽었다. J. F. 케네디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2년 만인 1963년에 45살에 암살을 당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68년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예비 선거운동 도중 로스앤젤레스에서 피살됐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누이동생 캐슬린도 1948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여동생 로즈 메리는 어린 시절 받은 뇌수술이 잘못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지내야 했다.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장남인 케네디 2세는 1973년 암으로 절명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 데이비드는 28세 때인 1984년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휴양지 호텔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데이비드의 동생 마이클도 1997년 콜로라도의 한 스키장에서 가족들과 스키를 즐기던 중 39살에 사고로 숨졌다. 케네디 대통령의 외아들 존 F. 케네디 2세는 부인과 함께 1999년 7월 16일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 구입한 단발 비행기를 직접 몰고 가다가 비행기 고장으로 추락하여 죽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위스키 통을 제조했고 할아버지는 술집과 술 도매상을 해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은행업과 주식과 영화사업과 경마장으로 돈을 벌었다. 그의 아들들은 늘 1등이 되라고 강요받았고 그렇게 1등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손자들도 다 죽었으며, 지금은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케네디만 살아남아 있다. 그 어느 누가 케네디의 가문을 쉽게 부러워 할 수 있겠는가.
이방인들이 복되다고 하는 복.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2)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규칙이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재정적으로 나를 억압하시려는 규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언약이시다.
어린 쌍둥이 아들에게 아빠가 100원짜리 동전 10개를 주고 그 중에서 하나를 달라고 하니 싫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아들은 그 중에 한 개를 달라고 하니 “이것 10개 다 아빠 것인데 얼마든지 가지세요.”하고 대답하며 10개 모두를 아빠한테 내어 밀었다. 쌍둥이인데도 어려서부터 너무 달랐다. 마치도 말라기 1장 2절과 3절에서 언급하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처럼 달랐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놓인 신앙의 관계와 인격의 관계와 물질의 관계의 정도를 측정하는 시금석과 같은 것이다. 전원이 끊기면 아무리 휘황찬란한 샹델리어가 우리 집 응접실에 매달려 있어도 쓸모없게 되고 만다. 십일조는 마치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확인하는 휴즈와 같은 것이다. 휴즈가 끊어지면 전등이나 전열기구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증명과 고백이 십일조신앙인 것이다.
우린 십일조 신앙의 영원한 모범인 잔 록펠러(J. Rockfellor, 1839-1937)를 길러낸 그의 어머니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 보자.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섭겨라.
오른 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구별하였다가 하나님께 바쳐라.
누구와도 원수를 맺지 말아라
예배 시간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드려라.
주일 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라.
남을 도울 힘이 있거든 힘껏 도와라.
아침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잠자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여라.
“나의 성공의 비결은 십일조 신앙이다. 6살 때 어머니가 해 주신 교훈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십일조 정리하는 직원만 40명이었다. 늘 예배 시간 40분 전에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였다. 교회의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절대 순종하였다. 목사님의 마음을 섭섭하거나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55살 때에 기관지, 신경계통 질환, 위궤양, 소화 불량, 불면증,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모든 털이 다 빠지는 피부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당시 하루 사업 수입이 100만 불이었다. 그런 그가 병실 복도에 걸려 있는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퇴원비 없어 퇴원 창구 앞에서 봉변 당하는 환자의 퇴원비를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기적이 일어났다. 다 죽어가던 그의 건강이 좋아진 것이다. 그 이후 43년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이 되었다.
그는 1937년 5월 22일 98살을 살고 5명의 자녀와 15명의 손자손녀와 11명의 증손자증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4,928개의 교회를 건축하였다. 시카고 대학교를 세웠다. 100년 동안 7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다. 1901년에 세운 록펠러 연구소는 “말라리아 백신, 발진티푸스 백신, 황열병 백신, 유행성 뇌막염 치료 혈청, 결핵약, 소아마비와 폐렴 백신을 개발하는 업적을 남겼다.
원주기독병원 원장이요 원주 맹학교 이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원주제일감리교회 장로였던 문창모(1907-2002) 장로는 평생을 “좋습니다. 합시다. 냅시다.”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본문은 말씀했다. 모든 이방인이 복되다 하리라.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면 세상 사람도 알고 존경한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강처럼 흐르길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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