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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서 구원할 자(욥34:21-37, 마1:18-2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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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2-02 21:42 조회 22,858 댓글 0
 
어느 시대에나 인류의 최대 관심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물론 현세적인 의미로는 가난과 질병과 위험과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할 수 있다. 경제적인 구원, 정치적인 구원, 환경적인 구원, 심신의 자유가 주어지는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의 구원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 지구촌의 문제는 분배의 문제이다. 한 나라나 민족이나 부족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가 점점 심각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남아나 남미의 열악한 경제 환경 가운데 있는 나라들이나 아프리카의 적지 않은 나라에서는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생활용수와 식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답답하고 안타까운 환경에서 쩔쩔매며 연명하듯 살아가는 이웃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몸의 건강이란 것도 그렇다. 당장 내 몸에 큰 이상이 없을 때에는 의약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지만 일단 질병에 걸리고 나면 내가 찾아 갈수 있는 거리 안에 의사나 약사나 병원이나 약국이 없을 경우에 난감한 처지에 방치되고 말게 된다. 금번에 네팔에서 선교하는 후배 선교사의 선교 편지를 받아 보았다. 전기가 하루에 16-17시간씩 단전되다 보니까 생활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다. 낮과 밤 할 것 없이 수시로 전기 공급이 끊기니 말이다. 그나마 전혀 전기 혜택에 없는 지역이나 도시를 생각하면 그것도 감사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돈 3-4만원이면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한 달 끼니를 해결하고 학용품도 충분히 공급하고 교통비와 교육비까지 해결 할 수 있는 비용이라고 한다. 저희 가정은 6-7년 전에 굿네이버스의 선교단이 탄쟈니아 선교합창단원을 모시고 지역 교회를 순례하던 그 밤에 선교 지원 요청서를 작성한 이후로 매달마다 통장에서 일정액이 저들 선교 단체로 자동이체 된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선교 헌금에 참여하고 성찬 헌금에도 참여하여 선교와 구제에 작은 힘이지만 지속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다. 당장 배가 고픈 자에게는 한 덩어리의 빵과 한 모금의 우유가 구원일 수 있다. 당장 벌거벗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한 벌 옷이 구원일 수 있다. 미국 뉴욕시의 맨하튼의 겨울은 우리나라 서울 이상으로 추운데 그 맨하튼에 신발을 신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홈 리스에게 운동화를 사서 신겨준 미국 경찰에 관한 미담이 세계의 언론에 보도 되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 선행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려고 해도 알려지게 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훈훈하고 따뜻하게 해 주는 법이다. 금번에 ‘한나어머니기도회’를 마치는 기념으로 생필품과 학용품등을 모아서 필리핀 선교 오지에 보내는 운동을 벌이는 한나어머니기도회 스텝들의 자선 활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일들이 나라 안과 밖을 향하여 자주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1885년이니까 127년 전의 일이다. 빛바랜 줄무늬의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올이 다 드러나 보이는 허름한 홈스펀 양복을 입은 연세 많은 남편이 보스턴에서 기차를 내려 약속도 없이 하버드 대학교 총장의 외부 사무실로 어릿어릿하며 걸어 들어갔다. 총장 비서는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이 같은 시골 촌뜨기들이 하버드는 물론이고 케임브리지에서 조차도 볼일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남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으나 "총장님은 오늘 하루 종일 일정이 바쁘십니다. 예약이 없이는 만나 뵐 수 없습니다." 비서가 딱 잘라 거절을 하였다.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부인이 대답을 했다. 결국에는 지쳐서 돌아가겠거니 하고 비서는 몇 시간 동안 그들을 모르는 척 했는데 그들은 전혀 지칠 줄 몰랐고, 오히려 비서가 당황하게 되었다. 늘 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결국 총장에게 알리기로 했다. "잠깐만 만나주시면 곧 갈 것입니다." 비서가 총장에게 말했다. 총장은 화가 나서 한숨을 쉬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지체 높은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들과 일일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으나, 총장실 문 밖의 외부 사무실로 가서 그들을 잠깐 보기로 했다. 저들 부부의 초라한 옷차림으로 인해 총장실 사무실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총장은 거만하고 굳은 표정으로 위엄을 부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부인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에겐 하버드에 일 년을 다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는 하버드를 대단히 사랑했고, 무척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약 일 년 전에 여행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 남편과 저는 캠퍼스 내에 그 애를 위한 기념물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총장은 어이가 없었다. "부인......."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버드는 공동묘지가 아닙니다. 하버드에 다니다 죽은 학생들 모두를 위해 동상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아니에요. 총장님... 그게 아닙니다." 부인은 얼른 부연 설명을 했다.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버드에 건물을 하나를 기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총장은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건물이라고요! 건물 하나 짓는데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 알고 하시는 말입니까. 현재 하버드는 눈에 보이는 이 수많은 건물들을 짓기 위해 연 예산 750만 불이라는 큰돈이 들어갔습니다." 아마 120년 전에 그런 예산은 오늘 날로 하면 몇 천억이나 몇 조 정도의 큰 예산일 수 있다. 잠깐 동안 부인은 말이 없었다. 총장은 이제야 이 사람들을 보내 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선을 창문 밖으로 돌리면 안도의 긴 숨을 내 쉬었다. 부인은 남편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대학을 설립하는데 750만 불 밖에 안 드는가 보죠? 그러지 말고... 우리가 대학을 하나 세우는 것이 낮겠어요." 부인의 제안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는 노인을 보며 총장은 혼란스러워 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화폐단위를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들인가...” 릴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1824-1893) 내외는 총장과 작별 인사를 하는 등 마는 등 하고 헤어져서는 곧 바로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Palo Alto)를 향한 여행을 떠났다. 저들 부부는 그 곳에다가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자기들의 성을 딴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를 설립하였다. 그 대학은 오늘날 미국 동부의 하버드대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부의 명문대학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 한 귀퉁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사실 이미 릴랜드 스탠포드는 당시에 이미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를 하버드 총장이 외모로 판단하고 몰라 본 것뿐이었다. 그는 25살 때부터 위스콘신 주 포트워싱턴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로 이사하여 광산 보급품과 잡화를 파는 소매상을 차렸다. 장사에서 성공한 그는 지방 정계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공화당원으로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일했다. 그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1861년에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가 설립되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1861~93). 센트럴퍼시픽철도는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 1869년에 유타 주 프로먼토리포인트에서 유니언 퍼시픽 철도와 만났는데 그는 이 철도의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 전역과 미국 남서부로 철도망을 확장시켰다. 그는 노년기에 8년간은 미국 상원의원으로 일했으며 아내 제인과 함께 1885년에 스탠퍼드대학교를 세웠다.

욥기의 본문에 보면 과거에 동방에서 잘 나가던 거부요 자녀 복을 받고 건강의 복도 받아 화목하고 행복하게 남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1:3)는 정평이 나 있던 주인공 욥이 재산 다 날아가고 열 자녀들이 하루 한 자리에서 다 죽고 자기 몸도 병들고 아내와의 관계도 서먹해지고 완전히 불행의 늪 속에서 목숨만 겨우 붙어 남아서 허덕이며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의 말은 한 결 같이 욥에게 상처만 더해갔다. 저들 세 친구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젊은 친구 엘리후의 말이 오늘의 본문이다. 긴긴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다른 친구들의 말과 별 큰 차이가 없다. 엘리후도 역시 친구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 정도의 처절한 재앙 앞에 처해 있으면서도 회개할 줄을 모르느냐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있다. 엘리후 역시 욥에 대한 오해가 대단하였다. 우리는 대개가 그런 잘못에 빠질 때가 많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변의 그 어떤 누군가가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남다른 고난을 당하거나 환난을 겪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런 착각이나 잘못된 생각과 판단에 빠질 때가 없지 않다. “저 사람은 필경 하나님 앞에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어려움을 겪는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나 민족의 현실을 단순히 그렇게만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물론 역사 속에 하나님이 심판이 있다. 사실 구약 성경만 보더라도 이스라엘의 긴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심판이나 책망을 받아서 민족적으로 고난을 겪고 환란을 당하는 역사의 장면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최소한 본문의 주인공인 욥의 인생사에 있어서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하여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 또한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욥기의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악, 심판, 정죄, 경건치 못함, 범죄, 죄, 반역, 거역”과 같은 단어들이다. 엘리후가 욥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인간의 길과 모든 걸음을 주목하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고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는 전능자이시다. 요즘 뉴스를 듣다가 보면, 별의 별 범죄 사건들에 대한 소식이 넘쳐 난다. 어떤 때에는 “좋은 미담도 많을 텐데 꼭 저런 사건 내용을 일일이 저렇게 보도하여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이 생길 정도이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방화 등 온 나라가 범죄 공화국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악은 4,000년 전에도 있었고 오늘 날에도 있다. 악은 고대 사회에도 있었고 현대 사회에도 있다. 범죄는 도시에도 있고 농촌에도 있다. 영화 ‘도가니’와 같은 성 범죄 사건에 처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뉴스 보도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세상이 슬퍼 보이는지 모른다.

욥기 본문에 보면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34:22)고 했다.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주목하시고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행을 아실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시기도 하시지만 모든 민족과 전 인류를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 하시고 동일하게 대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권세 있는 자와 악한 자와 경건치 못한 자와 슬기로운 자와 지혜로운 자가 다 일반이다.

요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보면 일정한 한 지점에서의 과속을 측정하는 CCTV뿐만 아니라 일정한 지역부터 몇 킬로미터까지의 구간 속도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운전자의 운전 기록을 추적하는 시스템이 처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오늘 날은 우리의 모든 사생활이 어디에선가 CCTV의 기록에 담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나의 모든 출입하는 처처마다 널려 있다. 그 같은 설비들은 보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가꾸어 가려는 면에서 설치되고 운영된다면 좋은 것이다.

우리 인간의 면에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범사를 주목하고 계시고 감찰하고 계시다는 점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장기에 있는 자녀들의 출입이나 매사에 부모가 관심을 갖는 것이 자녀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겠으나 그 관심이 더 이상 필어 없는 날이 왔을 때에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키고 관리하고 처신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무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인하여 썩어질 것을 거둘 날이 찾아온다.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된다. 왜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여야 하는가. 왜 우리가 불의를 멀리하고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거짓과 속이는 생활을 멀리하고 진실하고 참된 생각과 말과 그런 행동과 출입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보응이 열매로 뒤 따라 오기 때문이 아닌가.

첫 눈이 살짝 내렸다. 많은 눈이 내린 눈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그 걸어온 발자국이 나의 걸어온 발자국이 아닌가. 눈 위에 난 발자국 말고 내 인생의 발자국 말이다. 그것이 이력서(履歷書)에 고스란히 적히게 된다. 그 ‘이’(履)라는 글자가 발자국이란 뜻이 아닌가. 평민이든 임금이든 그의 하루 생활 중의 생각과 말과 출입과 범사가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이걸 알아야 하고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뭐 사람이 제 인생 제가 살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신앙의 소치이다. 하나님은 땅 끝에도 계시고 바다 끝에도 계시다. 다윗의 시편 중의 한 편인 시편 139편 7절부터 10절에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다.
 

죄에 대한 고민
인간은 죄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거듭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욥기의 본문은 친구 엘리후와 욥 자신의 죄와 악에 대한 고민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그의 얼굴을 가리신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의 죄와 악을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있었다. 노아 시대에도 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들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성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있었다. 나이 80살이 된 모세가 찾아 들어 갔던 풍요의 땅 애굽에도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과 심판은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광야 생활 중의 아말렉 백성들에게도 있었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 부르며 매 순간마다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해갈의 은총을 누리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의 불평하고 원망하던 무리 들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피하여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사였던 삼손에게도 임했고 임금이었던 사울 왕에게도 임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구에게나 임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엘리야 때에 갈멜 산에서 바알을 부르던 선지자들에게도 임했고 저들은 모두 다 엘리야의 칼에 기드론 시냇가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23절에 엘리후는 경고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그런 하나님이 천년도 참으시고 다시 천년이라도 기다리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참고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용서를 악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여야 한다.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욥34:31-32) 이것이 무슨 말인가. 죄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답답해하고 심각해 하는 고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예수께 찾아 왔던 부자 청년의 고민처럼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하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고민해야 한다. 모든 것을 스마트 폰 안에서 대답을 찾아내려고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를 기뻐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고 살아가는 그런 것만 염려하고 고민하지 말고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한다.


죄에서 나를 구원하실 예수
올해도 대강절이 시작되었다. 대강절은 강림절이라고도 하며 "The Advent"는 라틴어의 ‘adventus'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오다. 도착하다’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수태한 사건은 마리아에게도 고민이요 장차 그의 남편이 될 요셉에게도 큰 충격과 고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주의 사자 즉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차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유대인의 전래대로 라면 아기가 태어나고 팔일 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하고 그 아기의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이 전통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천사가 미리 정하여 알려 주었다. 이는 천사가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을 천사가 전달 한 것뿐이다.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의 이름도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천사가 미리 알려 준 것과 같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원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악과 선의 전쟁터요 진리와 거짓의 싸움터요 의와 불의의 격전장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시다.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1919-2006)는 제 2차 대전 참전을 위한 군사 기초 훈련을 받는 동안 훈련 교관들과 동료들을 화나게 하였다. 평화 신봉주의자인 그는 전쟁터에 나가긴 나가되 무기를 지닐 수 없다고 버텼다. 위생병으로 훈련을 받던 그의 행동에 주변의 교관들과 조교들과 동료 병사들은 모두가 의심을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았다. 우여 곡절 끝에 이 젊은이는 다른 동료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그의 손과 옆구리에는 총도 수류탄도 칼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 참가하는 목표는 분명하였다. 그의 목표는 전쟁터에서 다른 죽어가는 병사들의 목숨을 건져 내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주변 병사들의 의심은 전쟁에 투입된 이후에 풀렸다.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그가 속한 부대는 일본의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는 쏟아지는 기관총 폭격을 피해가며 낮은 포복으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부상병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냈다. 그는 “주님, 부상병을 한 사람만이라도 더 구하도록 힘을 주세요.”(Lord, give me the strength to save just one more wounded soldier.) 결국 그는 그 전투에서 70명 이상의 부상병을 언덕 아래 위생 시설로 이동시켜 치료해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전쟁 중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났다. 나중에 그는 헨리 트루먼 대통령 시절에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The Medal of Honor)을 받았다(오늘의 양식, 2012. 11. 12. 묵상 중에서)

대강절과 성탄절은 이와 같은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을 그 누군가에게 전하는 절기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그와 같은 구원에 은총에 힘입고 살아갔던 선교와 전도의 수많은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이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이렇게 인정하는 글을 남겼다.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2:29-30)

의롭고 신중하여 매사에 사려 깊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꿈에라도 주의 천사의 방문을 받고 격려를 받으며 순종할 줄 알던 믿음의 사람 요셉과 그의 아내 될 마리아의 믿음의 행동은 역사 속에 오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는 은혜롭고 지혜로운 예비  부부의 연합이 되었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12:3)고 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구원의 은총을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전하는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대강절기와 성탄절 맞이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원한 증거이신 임마누엘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쁨과 위로와 평화가 충만한 대강절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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