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대가였던 스위스의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전인교육과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삶과 교육과 신앙의 근본을 이루었던 존경 받는 뛰어난 교육가요 고아들을 사랑했던 사회복지가였다. 그는 젊은 나이인 25살에 노이호프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하고 한 동안 사색과 저술 활동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그가 52살 때에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고아들이 늘어나자 고아원을 설립하여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웠고 84살에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기까지 노년기의 평생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유럽 사회를 누르고 있던 불평등을 극복하는 정당한 교육의 가치를 주창하였고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지식의 연마와 더불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신뢰에 바탕을 둔 도덕적 인간 교육에 힘썼다. 그는 인류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교육에 있다는 소신이 분명한 교육가였다. 나중 그의 묘비에는 “모든 것을 남을 위해서 살았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묘비명이 세워졌을 정도이다. 그는 교육의 힘을 믿었고 그러므로 교육에 의한 인류 구원의 방법론 연구와 실천에 평생을 바친 헌신적인 교육가였다. 어려움과 고난도 수 없이 많이 겪었던 그는 “고난과 눈물이 오늘 날 나를 높은 예지(叡智)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편하고 즐겁게만 살아 왔다면 오늘 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여러 권의 책도 썼는데 그 중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83세 때에 완성한 역작인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는 교육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통하여 전인적인 인격을 도야하고 하나님 앞에서 조화 있는 인격을 키워 낼 수 있다는 확고한 사상과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국어학자요 국어 운동가였던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경도제국대학에 유학하여 공부하고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란 논문을 썼다. 귀국 후에 12년 동안이나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대학교의 교수와 부총장과 한글학회이사장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 이사 등을 지냈다.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서양학교인 일신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양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공부했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해방 4년 전인 1941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들려 해방이 될 때까지 4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이 평생을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나름대로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과 싸우고 질병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그 많은 인물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하나님이 쓰신 인물들 가운데 남다른 고난을 극복하지 않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본문 말씀 중에 나오는 욥기23장 10절의 ‘단련’이란 말은 ‘시험’이란 단어이다. 영어로는 ‘test’라고 하였다. 올해에도 우리나라에 62만 여 명의 수험생들이 대학입학 학력고사인 수능 시험을 보았다. 시험이 있으므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불같은 시험을 평생토록 받으며 사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가 무시무시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나사렛 마을의 목수 요셉과 정혼하고 약혼 기간을 보내고 있는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고 자라나도록 선택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 문화로는 처녀가 수태된 사실이 소문나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렵고 무서운 시험의 시작인가.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수태하자마자 천사의 위로 가운데 마음을 다스리며 유대의 깊은 산골 마을에 살던 친척인 엘리사벳의 가정으로 피신하였다. 올해도 3 주 만 있으면 대강절이 시작된다. 6 주 만 있으면 성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먼저 떠들썩하며 백화점이나 호텔이나 음식점과 상점들이 예수의 탄생을 상업적으로 알리며 교회보다 훨씬 먼저 떠들썩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고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되기까지에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의 마음이 일 년 내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공포와 두려움과 무서움 가운데 떨리는 심정으로 지냈는지 모른다.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당시의 통치자였던 헤롯왕의 칼을 피하여 부모의 품에 안겨 애굽으로 급하게 피신하여야만 하였다. 크고 빛나는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헤롯왕은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유대 근동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모조리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예수는 어려서 나사렛 마을에서 자라났다. 그가 어렸을 적에 육신의 아버지역할을 했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요셉이 하던 목수 일을 배워서 그 일을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런 예수께서 30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동생들의 곁을 떠나 요단 강 가에서 활동하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사십일 간을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40일간의 금식 기도가 끝나던 날 마귀가 와서 예수를 세 가지로 시험하려 하였으나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근차근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생애는 붙들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끝이 없는 고난이요 계속되는 시험의 연속이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죽이려 하는 무리들의 음모와 궤계를 겪으셔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시험과 고난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모면하고 극복하셨다. 나중 예수께서 붙들려 부끄러움과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무리들 앞에서 나약하고 처절하게 고난과 수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시기 까지 그를 따르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조차도 예수께서 당하시는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자들이 없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철저하게 혼자이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는 천사가 그의 기도를 도왔을 뿐 함께 기도하기를 초청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잠들고 말았다. 예수님만 홀로 고독하고 외롭게 다가오는 인생의 쓴 잔(盞)인 십자가 처형의 역사적인 과제를 가슴에 안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계셨다. 오늘 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승리와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찬미하지만 예수님의 이 땅의 생은 고독하고 외로운 시험과 고난의 연속이셨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당하실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나온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苦難)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였다.
우주와 삼라만상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어찌하여 그의 외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자리에 내어 주시는가 말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게 된 다는 말을 들은 베드로가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대들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몹시 책망하셨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4-26)는 유명한 교훈의 말씀을 비장한 각오로 전해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 주님이시지만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과 시험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수난(受難)의 주님이셨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계속하여 욥의 고난을 대한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욥기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도 욥의 신앙 상태를 인정하셨다. 그만한 믿음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느냐고 극찬하실 정도였다. 그런 욥이 극심한 재난과 슬픔과 질병으로 다 죽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욥에 대한 표현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8)였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축복된 칭찬의 말인가. 더군다나 하나님이 욥에 대하여 평가하신 말씀이니 말이다. 우리가 주변의 어느 누군가에 칭찬만 좀 받아도 기분이 좋은데 욥이 받은 칭찬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신 칭찬이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욥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인정하는 신앙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욥1:3)고 했다. 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런 욥이 겪는 고난은 너무나도 엄청나고 너무나도 비참하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고난이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고난(苦難)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겪는 고난이 가장 큰 고난이라고 여긴다. 그 고난 중에는 국가적인 전쟁의 고난이나 지역적인 천연 재해의 고난이나 사고나 사건이나 전염병이나 극심한 질병이나 경제적인 패망으로 인한 고난이 있다. 개인적으로 겪는 남달리 참담하고 충격적인 슬픔이나 아픔이나 상처나 비극적인 고난이 있다. 세상에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고 예를 들 수 없는 별의 별 고난이 다 많다.
강상중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교의 교수다. 그는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교의 정교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최근에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을 냈다. 책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은 지난 2011년 3월 11일에 참담한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으며 후쿠시마 원전 유출 사고를 신음하고 있다. 지진에 대한 불안, 방사능 유출, 금융 우기와 파탄, 실업, 테러 등의 생활 쓰나미가 불안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아들을 병으로 잃은 슬픔을 겪은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만성적인 불안과 심리적인 불안정과 위기와 두려움과 고독과 삶의 불황에 대하여 고민하는 글들을 풀어 나가고 있다.
과연 누가 나라나 민족이나 사회나 기업이나 가정이나 개인을 이와 같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사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당장 내가 기쁘니 기쁜 것인가. 요즘 나는 기쁘고 즐겁고 배가 부르고 등 따뜻하고 건강하시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사는 것인가.
욥은 너무 괴롭고 너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허망해서 더 이상 참고 이겨 내며 견딜 힘 조차 없는 상태에서 탄식하듯이 하나님 앞에 절규하고 있다. 본문의 1절부터 8절까지의 긴 내용이 그런 욥의 심경을 담고 있다.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욥기 23장 2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 이렇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아무리 친구들이 연속해서 무슨 별의 별 말을 다 할지라도 지금 재난과 슬픔과 질 병 가운데 생의 마지막 위기를 겪고 있는 욥은 평소에 갖고 있던 하나님 신앙에서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7절과 8절에서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다. 역시 표준새번역으로 보자.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그렇다. 이것이 고난 속에 버려지듯이 처절한 아픔과 슬픔과 고통 속에 허망한 생의 마지막과 같은 불안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욥의 고백이다.
단련하신다는 말의 그 원 뜻은 시험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 하시는 분이시다. 사랑하셔서 시험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단련하시는 것이다. 시험과 단련이 없이 야구의 박찬호, 골프의 박세리, 탱크 골퍼 최경주, 세계적인 역도 여왕 장미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축구스타 박지성, 런던 올림픽 사격의 진종오, 체조의 신동 양학선, 피겨의 여왕 김연아, 리듬 체조의 손연재, 양궁의 기보배 선수 같은 이들이 고난이 없이 시험이 없이 그런 영광스러운 날이 저절로 왔겠는가.
왜 고난의 유익이 있는 것일까. 10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단련(鍛鍊)하여 순금(純金)과 같게 하시는 하나님.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아시는 전능자이시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예비하시는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날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에벤에셀의 삶이었듯이 앞날의 크고 작은 모든 대소사에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살아가다 보면 실수도 하고 범죄도 저지르고 죄악 속에 빠지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하나님의 뜻과 기대에서 멀어져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는 각 사람에게서 멀어지시는 법이 없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고 요셉도 모세와 아론과 여호수아와 갈렙도 다 그런 하나님의 연단하시고 단련하시고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을 거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모세가 겪은 고난과 시험들 그리고 다윗이 경험한 고난과 시험들을 보라.
CTS 나 CBS TV에 자주 소개되는 미국인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인 터치(In Touch)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들 곁에도 자주 등장하는 챨스 스탠리(Charles F. Stanley) 목사의 책 중에 <고난을 통해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연금술>이란 책이 있다. 그 원 제목은 “How to Let God Solve Your Problems"이다. 그 책의 시작에 보면 지난 2005년 8월 24일에 미국 남부를 할퀴고 지나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로 일순간에 1,300명이 죽고 2,000억 달러(217조 5,000억원)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을 겪어야 했다고 언급한다.
이런 고난과 재난과 사건과 재앙이 언제라도 있고 어디라도 있다. 개인으로는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슬픔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다윗도 그런 경험들을 겪어야만 했다. 십대 때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고 나중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서 물매 돌 한 개로 적장 골리앗을 맞혀 죽이고 온 나라에 유명한 인물이 된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때부터 예상치 않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다윗을 사위 삼은 임금 사울은 언제나 다윗을 시기했고 죽이려고 칼을 갈고 창을 그의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했다. 임금 사울의 살기등등한 살의로부터 다윗을 보호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이미 다윗은 사울 왕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다윗을 위기로부터 보호하셨고 지켜 주셨다. 사울 왕이 악신에 부림을 당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함부로 행동하며 예루살렘 왕궁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원앙금침에 눞던 그 긴긴 밤들을 청년 다윗은 어둡고 추운 아둘람 굴에서 외롭게 눈물을 곱씹으며 물안하고 초조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야만 했다. 물론 어려서부터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을 두려워하지 않던 다윗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의 전쟁 때에 고함 치는 수많은 적군들 앞에 물매를 손에 잡고 엘라 골짜기를 걸어 주머니에 돌멩이 다섯 개를 만지작거리며 적장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가던 숨이 막히고 초조한 순간이 있었다. 그를 따르는 400여명의 남정네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둘람 동굴 속의 다윗은 장래가 기약되지 않은 불안하고 착잡한 나날을 외롭고 고독하게 지내야만 했다. 다윗을 따뜻하게 맞아 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국경을 넘어 갔던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도 문전 박대를 받고 난 직후였다.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짓을 하며 길거리의 걸인 행세를 하며 변장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했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그 사건 이후에 가드 왕국을 떠나서 도망해 숨은 곳이 아둘람 동굴이었다. 다윗 곁에 따라 나선 400명도 신분으로 하면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해서 가정이나 유대 고을에서 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오늘 날로 하면 노숙인들과 같인 이들 400여명이 다윗 곁으로 몰려 온 것이다. 아둘람 동굴의 다윗! 음산하고 어둡고 거미줄과 개미 떼와 박쥐와 지네가 우굴 거리는 동굴을 상상해 보라. 그 때의 다윗은 처절하게 홀로 버려진 고독한 도망자신세였다. 우리가 아는 다윗 왕이 나중 영광은 그렇게 준비되고 그렇게 찾아 온 것이었다. 시편 57편 1절부터 5절까지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시편에서 만나는 이와 같은 다윗의 위대한 고백들은 다윗이 광야와 동굴로 숨고 피하며 유리방황하던 고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고백될 수 없는 남다른 경험들이었다.
수원 오목천 교회의 집회 인도 차 머물던 수원에서 월요일 오후에 영풍 문고에 들렀다. 세계를 누빈 한비야 씨의 책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가을에 피는 들국화는 봄에 피었던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그렇다. 개나리나 진달래와 같은 봄꽃도 꽃 샘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것이지만 봄과 여름을 지내며 긴긴 계절의 변화를 묵묵하게 남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던 가을 들 국화도 찬 서리 맞을 계절 즈음에 산자락에 호젓하게 피어서 은은한 향기를 발하고 가을의 벌과 나비를 불러 들리는 것이 아닌가.
고난을 겪고 있는가.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가. 나를 단련하시고 순금처럼 다듬어 사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야만 할 것이다.
명령(命令)하신 말씀으로 치우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욥은 막 산 사람이 아니었다. 11절과 12절이 그런 고백이다. 욥은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하며 신앙인답게 살아 왔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인생길에서 치우치거나 벗어나지 않으려고 씨름하며 살아온 정직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인생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말씀들을 어기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신앙 노력이 분명한 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다니엘이 먹던 음식처럼 정한 음식을 먹듯이 아니 그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온 믿음의 거장이었다. 그런 욥이 지금 재난과 슬픔과 극심한 질병으로 거의 다 죽어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욥이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명령하신 말씀 앞에 탈선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노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이 겪는 고난의 이해 할 수 없는 과정인 것이다. 이유를 찾기 어려운 복잡한 고난이 인생살이에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 고난의 풀무 불 가운데서 건지시고 그 환난의 사자 입에서 막아 내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작정(作定)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아니시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일정하시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계획이나 생각을 돌이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마음에 작정하신 것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몸과 마음과 생각과 힘과 뜻과 정성을 모아서 겸손하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복해 나아가만 할 것이다.
지금 어둠 속에 있고 실패의 동굴에 누워 있고 실망의 광야 길을 가고 있는가. 소망을 버리지 말라.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 버리는 재난과 열 아들딸 다 죽는 슬픔과 제 몸 다 병들어 죽어가던 막장의 인생길에서 건짐 받고 새 생을 살아갔던 욥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라.
하나님은 오늘 날도 누군가를 시험하고 순금처럼 단련하고 계시다.
건강의 시험, 체력의 시험, 인격의 시험, 인내의 시험, 성실의 시험, 겸손의 시험, 정직의 시험, 관용의 시험, 배려의 시험, 양보의 시험, 섬김의 시험, 충성의 시험, 헌신의 시험, 돌봄의 시험, 나눔의 시험, 베품의 시험, 사랑의 시험, 믿음의 시험 앞에 40일 금식 하신 광야에서의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믿고 간구하는 풍성한 위로와 은총이 임하기를 소망한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장에는 고통스럽지만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유익이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고 했고 다윗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느니라.”(시34:19)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라고 말했다. 고난 끝에 찾아오는 축복을 누리는 신앙 인내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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