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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어느 수난자의 신앙고백(욥19:13-29)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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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1 22:23 조회 22,791 댓글 0
 
인간이 살아가다가 보면 자기가 소원한대로 되는 일도 적지 않지만 대개는 창조주의 섭리와 손길 가운데서 움직여 가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뿐만 아니라 쉽게 그 내용을 단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설명하기 곤란한 사건들도 적지 않다. 성경은 그와 같은 깨달음을 갖게 하는 인생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가령 아담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하고 행복한 창조의 동산 에덴에 하나님이 만들어 짝 지어 주신 부인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 먹고 그런 불행을 집안으로 불러들일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담의 입장에서 보면 낳은 두 아들 중에서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응답을 받은 후에 형 가인에게 맞아 죽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오늘 날로 하면 제사는 예배인데 예배 잘 드리고 나서 형에서 맞아 죽었다니 쉽게 이해가 되는가. 이런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칠십 오세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갔지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주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게 더디 이루어지는 것을 어찌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도 나이 백세에 어렵게 태어난 아들 ‘이삭’이 한창 씩씩하게 자라나던 때에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착잡한 사건이었던가. 그 아들이 장성하여 아버지의 살림을 맡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살에 돌아가신 후의 일들이다. 쌍둥이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서 잘 자라고 있긴 한데 이상하게 이삭이 우물을 파기만 하면 원주민들에게 빼앗기곤 하였다. 계속하여 원주민들과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기로 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인데 하는 일마다 형통하면 좋겠건만 그렇질 못했다. 그래서 우물 샘의 이름을 ‘다툼’과 ‘대적당한다’는 뜻의 ‘에섹’과 ‘싯나’라고 지을 정도였다. 물론 나중에 전혀 새로운 지역으로 목축지를 옮겨서 ‘르호봇’이라 이름하며 살아갔다. 종들의 다툼을 피하여 앞으로 나아간 새로운 땅에서 더 깊고 더 좋은 우물 샘을 마련하였고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장소가 넓다’는 뜻의 ‘르호봇’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중 야곱의 생애, 요셉의 파란만장했던 운명이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어찌 인생이  입 안에 초콜릿이 흘러내리듯이 달콤하기만 하고 아포카토 맛처럼 매력적이기만 할까. 어찌 인생의 맛이 빼빼로를 입 안에 넣듯이 고소하고 달콤하고 아삭아삭한 맛으로만 계속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기독교 역사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책, <천로역정>을 쓴 작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그 책을 LED 스탠드 조명 아래서 맛있는 커피를 마셔 가면서 쓴 것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인 17세기 영국은 고난이 많은 시대였다.  영국 베드포드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땜쟁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도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겨우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정도였다. 열 살 때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 후로는 늘 아버지의 땜질하는 일을 거들며 배웠다. 16살 때에 청교도주의를 이끄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그 후로 청교도 신앙의 큰 영향을 받았다. 군대가 해산 된 후에 다시 고향에 돌아 와서 아버지의 땜쟁이 일을 맡아 하였다.그 후 결혼할 때에 아내가 가지고 온 재산은 기독교 서적 두 권이 전부였다. 책이 귀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존 번연은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 신앙이 점점 깊어만 갔다. 1653년 그의 나이 35살 때에 존 기퍼도 목사에게 감화를 받고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 후로 복음의 열정이 불 붙기 시작했다. 1660년에 영국의 국왕 찰스 2세가 국교회 이외의 종교생활을 금지시켰다. 종교 탄압이 극심해져갔다.  존 번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와 복음 전파를 계속했다. 결국 붙잡혀 3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출옥된 후에도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붙들려 12년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그 긴긴 기간 동안에 감옥에서 쓴  책이 <천로역정>이다. <가장 사악한 죄인에게 넘치는 은총>이란 책도 그가 감옥 안에서 쓴 책이다. 그는 1688년에 60살에 폐렴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까지 열정이 식지 않는 설교가요 집필가였다. 그는 천로역정 외에도 여러 권의 책들과 <유익한 명상>과 같은 시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존 번연 한 사람의 고난 극복의 의지와 그의 집필 활동의 영향은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지난 360여년 이상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고난의 유익이 따로 있다. 고난은 숨겨진 축복을 가져 오는 통로이다.

이삭이 그 르호봇의 우물 샘을 파고 나자 더 이상 뒤 쫓아 와서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원주민 세력이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말씀을 들은 때가 있었다. 창세기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창26:24) 그런 이삭이지만 나중에 쌍둥이 아들 형제가 형제지간에 살아가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복잡하고 얽히고 또 설키는 가정사로 살아가는가. 이게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닌가. 어려서 시골에서 TV는 없고 라디오만 있을 때에 라디오를 틀어 놓으면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별로 변화가 없고 심심하던 시골집에 안마당에 가득하게 들려오는 라디오의 음악이나 노래나 뉴스나 혹은 일기예보나 드라마 내용에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는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깥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 시스템이 라디오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라디오 아침 방송의 드라마 중에 제목은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주제가의 가사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어도 우리 집은 언제나 행복한 가정.......”뭐 이런 식의 가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번에 미국 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샌디’의 위력 앞에 뉴욕과 뉴저지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세계 최첨단의 국가도 재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뉴욕의 지하철이 물속에 잠겼다. 학교와 회사와 기관들이 문을 닫았었다. 전기는 끊기고 암흑천지가 되었다. 세계 경제의 심장이라는 맨하튼 남부의 월가도 역사상 처음으로 문을 닫기까지 했다. 세계적인 도시인 맨하튼이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50조 이상의 경제적인 피해와 손실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어느 지역은 물바다가 된 것도 안타까운데 한 마을의 가족 100여 채가 원인모를 불이 나서 다 타고 다 무너지고 말았다. 저들은 대궐 같은 2층 집도 나무로 짓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나면 이웃집까지 성냥갑 타들어 가듯이 타고 만다.

재난은 언제라도 있고 어디라고 있다. 사람이 평생을 재난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건강이나 질병, 당하는 슬픔이나 기쁨, 겪는 즐거움이나 고난 앞에서 나의 일이든 주변 사람의 일이든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욥기 28장 25절과 26절에 보면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이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가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고하였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이와 같은 욥기의 주제와 같은 성경 구절 중의 하나는 욥기 23장 10절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돌멩이 중에는 각지고 모서리가 뾰족하게 모가난 돌들도 있지만 어떤 돌들은 동글동글하고 둥글둥글하게 긴긴 세월 속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잘 다듬어진 돌들도 있다. 돌들 중에는 천년이 가도 여전한 돌이 있는가 하면 돌이지 흙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치 푸석푸석한 돌들도 있다. 같은 탄소 덩어리이지만 어떤 것은 숯 덩어리에 불과하고 어떤 것은 다이아몬드 즉 금광석이 된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면 연단의 차이가 아닌가. 로마서 5장 3절과 4절의 말씀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는 바울 사도의 선언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남다른 고난과 환난과 연단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인내와 연단의 차이가 없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온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며칠 전에 운전하면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36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이라고 하였다. 36년 전에 결혼하기 전에 어느 여성과 선을 보았다. 지금 결혼 생활 36년째인 아내와 선을 보는 약속 장소에 낮 12시 약속인데 시간과 장소를 잘 못 아는 바람에 5시간이나 늦게 찾아 갔는데 그 시간 까지도 신부감은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서 책으로 보고 있었단다. 자기를 긴긴 시간 기다려준 것에 감복하여 만나고 사귀고 결혼해서 오늘 날까지 36년을 잘 살아 왔다. 그 때 처음 만나던 날의 신부 감의 인내심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부인은 결혼 36년 후인 올해 들어 와서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다고 한다. 내용인 즉은 그날 저녁에 다른 사람과 선볼 계획이 또 있었는데 마땅히 어정쩡한 중간 시간 몇 시간을 달리 어디 가서 시간을 쓰기에도 불편하고 그래서 마냥 다방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 이 신랑은 당시 신부 감의 긴긴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에 감탄해서 잘 만나고 사귀어서 결혼하고 오늘 날에 이르렀다는 사연이었다. 이리하든 저리하든 인내는 인내가 아니겠는가. 

평생을 나날이 형통하기만 하고 날마다 좋기만 하여 단 하루도 슬픈 일이나 속상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고난이나 고통이나 실패를 겪은 적이 없이 한 생애를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욥기의 주인공은 남다른 축복 속에 인생의 제 1 막을 살았던 주인공이다. 동방 사람들 중에서 그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고 의롭고 정직하고 온전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존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가정에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친 것이다. 그 많던 짐승 떼가 다 사라지고, 열 명의 아들딸이 한 자리에서 한 날 한 시에 다 죽고 자기 몸도 병들어서 다 썩어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가깝던 사람들로부터의 처절한 소외(疎外).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이고 대단해 보이던 욥에게도 버티고 견디는 인내에 한계가 왔다. 더군다나 세 친구가 찾아 와서 위로한답시고 해 주는 말들마다 더 큰 상처가 되고 마음에 점점 더 큰 아픔과 슬픔만 더해 가고 있었다. 평소에 꾀나 가깝던 것 같던 친구들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하면 재산 잃고 자녀들 잃고 자기 몸 심각하게 병들어 완전히 망해 버린 인생으로 처절하게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자기 주변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척과 친지와 심지어는 자기를 섬겨 주던 종들조차도 한 결 같이 자기를 멀리하고 아주 가깝던 주변 사람들조차도 자기를 싫어하고 가련히 여기며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는 욥의 부인은 남편 욥의 숨결조차도 싫어하는 형편이 되었다. 처절하게 소외되고 버려진 신세가 된 것이다. 게다가 병들고 썩어 가던 몸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져서 피부와 살이 뼈에 붙는 지경이 되었다.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욥19:20) 이런 심각한 탄식을 하는 지경이 되었다.

살아오면서 소외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 혹시 내 주변의 그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따돌린 적이 있는가. 사람이 잘 나가고 잘되고 형통할 때에는 주변에 친구도 만고 만나고 싶어 하고 사귀고 싶어 하고 교제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가 정작 시련이 닥치고 곤경에 처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 그렇게 가깝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멀어져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다윗 임금조차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38편 11절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라고 하였다. 다윗도 언제인지 정확한 다른 기록을 성경에서 더 찾을 수는 없으나 몸이 병들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떠남으로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절규하듯이 하나님께 기도드린 적이 있었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38편에는 그런 내용으로 가득하다. 마치 욥이 고난 속에서 절규하고 기도하던 내용과도 비슷하다. 
 
1.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1.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5.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21.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예수님조차도 정작 그를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붙들리고 고난을 당하시며 죽음의 언덕인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시자 지난 3년 동안이나 부름을 받아 제자 행세하던 이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처절하게 예수님은 홀로 남고 마셨다.

욥은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너무나 크고 그 골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욥이 21절에서 이렇게 친구들에게 요청한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심지어는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고 탄식하며 비통해 하고 있다. 그런 참담한 가운데서도 어둠 가운데 빛처럼 비추어 오는 욥의 신앙 고백을 대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
21절의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하는 탄식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자기 자신을 이 재난과 극심한 질병에서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다른 힘이 없다는 신앙이 숨겨져 있는 고백인 것이다. 그렇다. 실로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손길은 말씀 한 마디로 빛을 창조하시며 우주 삼라만상을 엿새 동안 질서 있고 완전하게 만드신 손길이시다. 전도서 3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하나님은 허실 수도 있고 세우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다. 찢으실 수도 있고 꿰매실 수도 있는 전능자이시다. 나고 죽고 심고 거두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춤을 추는 그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전쟁과 평화도 모두 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다. 그렇다.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든 대소사가 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고 순복하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온다. 어느 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다. 토기장이의 집에 도착해서 보니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을 이겨서 만드는 그릇들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서 터져 나가자 순식간에 금방 짓이겨서 다시 새로운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토기장이의 집 앞에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손길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욥의 아들딸이나 욥의 몸을 병들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의 소행이었다. 그런데 욥은 지금 하나님을 향한 번민에 사로 잡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치셔서 병든 것이라고 항의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물론 치실 수도 있고 때리실 수도 있고 발로 밟으실 수도 있고 부수어 버리실 수도 있다. 생명을 거두어 죽음의 심판에 던져 버리실 수도 있으시다. 그런 하나님의 손길 안에 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린 그 하나님의 손길에서 심판과 판단을 보기 전에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격려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탄은 욥을 쳤으나 하나님은 그런 욥을 썩고 병들고 구더기가 속살을 파 들어가고 처절하고 죽어가는 자리에서 고치시고 싸매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회복하셔서 나중의 욥이 되도록 붙들어 치료해 일으켜 세워 주셨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과 재난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하셨다.


살아계신 나의 대속자(代贖者) 하나님.
구약 성경 중의 한 곳인 욥기에서 만나는 놀라운 표현 중의 하나가 욥기 19장 25절의 ‘대속자’(代贖者)라는 표현이다. 히브리말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르다, 구속하다. 되찾다”는 뜻이다. 룻기에 나오는 ‘기업 무를 자’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레위기 25:25-26, 룻2:20) 예전에 우리가 보던 성경인 ‘개역한글’성경에는 ‘구속자’(救贖者)라고 하였다. 욥의 이와 같은 고백 속에는 장차 자신의 모든 것을 중보하실 중보자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과 역할을 이미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해 주는 기록이다. 욥은 하나님 안에서 분명한 천국관과 내세관을 갖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대속자란 죄와 죽음과 악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속자요 완전하신 대속자요 변함이 없으신 대속자이시다. 그는 노아와 여덟 식구를 홍수의 심판에서 대속하셨다. 그는 아브라함을 우상을 만들어 팔던 그의 육신의 아버지 데라의 손길에서 대속하셔서 영원한 언약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는 요셉을 애굽의 감옥에서 대속하셔서 평생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애굽의 총리로 존귀하게 붙들어 쓰셨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켜 광야 길로 인도하시고 시내 산에서 계명을 내리신 언약 백성들로 다듬으셔서 요단 강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선민으로 대속하시고 품에 안아 주셨다. 대속자란 표현이 욥기에는 19장 25절에 단 한번 나온다. 그리고 시편에 두 번 더 나오고, 잠언에 한 번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열 번도 더 나온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19편 14절에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남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아삽의 시인 시편 78편 35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리고 이사야 60장 16절에는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개인을 죄와 악과 우상 숭배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민족과 나라를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부터 구속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온 백성들을 죄와 악과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하여 죄 사함 받고 영생하는 자녀로 삼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구속하신 영원한 대속자이시다.


장차 육체 밖에서 뵈올 심판장이신 하나님.
욥은 하나님을 장차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육체의 장막에서 벗어 난 후에 뵈올 심판장이신 분으로 고백하였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심오한 신앙의 고백인지 모른다. 26절의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고백은 욥 자신이 산자의 부활 신앙과 더불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도 확신하며 살았던 신앙의 깊은 통찰력의 주인공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욥은 이미 그 당시에 분명한 부활 신앙을 갖고 육체의 고난과 삶의 슬픔과 허망한 재난을 소화해 나가려고 씨름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 욥은 그의 몸이 몹시 병들고 약하여져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 고백 만은 분명하였다. 욥은 자신이 하는 말들이 어느 것 하나 횡설수설하는 말이 아님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욥기 19장 23절과 24절에 보면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고 고백하였다. 여기 철필과 납으로  돌에 새긴다는 말은 이미 4,000여 년 전에 돌에 글씨를 새기고 나면 그 마저도 지워지지 않도록 납을 녹여 돌 위에 덧씌우는 철저함이 있었다. 그런 내용을 아는 욥은 자신의 하는 말들마다 책에 쓰일 뿐만 아니라 돌에 새겨지고 납으로 덮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역시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욥은 대단한 신앙의 인물이다. 그 곤고한 어려움 중에서도 오히려 친구들을 향하여 항변한다. 28절과  29절이 그런 내용들이다. 욥은 지금 자기가 이와 같은 재난 가운데 엄청난 슬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와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앙과 결백이 하나님 앞에 입증될 날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후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5-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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