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믿고 영접하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이다. 성령은 인격적인 영이셔서 나의 생각과 나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항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며 사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날 밤새도록 새벽까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자신의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원대로 사는 삶과 죽음을 위하여 이마에서 땀이 피가 되어 흐르기까지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사십일 만에 하나님 곁으로 돌아 가셨다. 하늘로 가시면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부어 주셨다.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성령의 임재는 주저하고 비겁하게 행동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숨던 나약한 베드로를 성령 충만한 말씀의 사도요 기도의 사도로 변화시켜 놓았다.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나니까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사람이 되었다. 베드로의 말씀 선포는 수많은 무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세례를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는 폭발적인 역사가 번져가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를 비롯한 가롯 유다 이외의 열한 제자가 다 성령 충만한 사도로 변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동생들도 모두 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다. 성령 받기를 기도하면 누구나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어제까지 계속된 성령강림대망새벽기도회의 열기가 각 사람에게, 각 가정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계속하여 부흥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한다. 그와 같은 초대 교회의 성령 충만한 능력의 역사는 점점 번져 가기 시작했다. 믿는 자의 숫자를 허다하게 더해가게 되었다. 그 믿는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나바였다. 사도들의 말씀 전파에는 큰 권능이 있었다. 부활의 복음을 전파 할 때에 듣는 무리들 중에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에는 능력이 나타났고 듣는 무리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본문이 말씀하는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나.
밭을 팔아 바치며 믿음 생활을 시작한 사람.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에 보면 그런 때에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부활 복음을 전파하며 자기 밭을 팔아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인물이 바나바였다. 재산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뛰어 넘어 은혜와 사명자의 삶을 출발한 초대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초대 교회에 재산을 팔고 정리 해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일들이 번져 가고 있었다지만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짓말을 하다가 차례대로 죽어 나간 사건을 보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의 부흥은 반대로 핍박을 당하는 역풍을 맞게 되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이방 나라의 이방 도시로 흩여져서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는 칼에 죽었다. 순교자가 된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고도 항상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사도 베드로는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성전의 미문 앞 거지를 걷게 하는 기적의 사도로 쓰임 받았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밤을 새워 가면서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기도했더니 오히려 성령이 더욱 충만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에 부흥이 더 크게 일어났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점점 심해졌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믿는 자들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흩어졌던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더니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 와서 세례를 받았다. 심지어는 사마리아 도성의 유명한 마술사였던 시몬도 마술하던 밥벌이를 떨쳐 버리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세례를 받고 빌립 집사를 따라다니는 선교단원이 되었다. 하나님은 빌립 집사를 통해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던 핍박자 사울도 변해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룻다에 사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라는 환자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뿐만 아니라 죽은 욥바의 여제자 도르가도 다시 살려 내셨다. 이런 소문으로 인하여 욥바 지역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예수님은 욥바 지역에 머물며 선교하며 기도하던 베들로를 가이사랴에 보내셔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고 저들이 모두 다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도록 역사하셨다. 오랜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 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 이방 지역으로 불길처럼 번져 가는 부활의 복음 전파 상황을 간증하고 보고하였다. 그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결의하여 안디옥 지역에 파송한 인물이 바나바였다. 부활 복음의 능력은 히브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의 헬라 사람들에게도 점점 불길처럼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을 안 믿던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본문의 21절이 그런 사실을 전하지 않는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다. 이 같은 부흥의 이방 현장에 보냄을 받은 인물이 바나바이다. 대통령도 남의 나라에 특사를 보내거나 대사를 보낼 때에 주요국가 일수록 아무나 보내지 않고 특별하게 선별된 인물을 보내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바나바를 보내었다. 왜 그랬을까. 본문에 그 대답이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사람.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나바는 이방 땅, 이방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활 복음의 능력과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와 그 증거의 은혜로운 현장을 보고 기뻐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 도시였던 안디옥은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로 인하여 은혜를 드러내는 축복 받은 도시기 되어 가고 있었다.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는 나의 가정을 그 누군가가 드려다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지는 않을까 진단해 보자.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나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내 주변의 무슨 일을 주목하여 보며 살아가는가. 또한 나의 모습과 나의 가정의 모습과 내가 출입하며 살아가는 이 도심 속에서의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세상은 날마다 T. V, 라디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뉴스랍시고 전하는 소식들 중에 가슴 아프고 부끄럽고 죄악되고 형편없는 소식들로 넘쳐 나지 않는가. 전쟁, 테러, 강간, 강도, 살인, 사기, 도둑질, 횡령 등등 거짓되고 악한 소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누가 무슨 죄를 지었다. 누가 무슨 범행을 했다는 소식들이 신문마다 지면에 도배를 하지 않는가. 물론 미담도 있고 좋은 소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처처마다에서 죄악이 넘쳐 난다.
그와 같은 세상에 안디옥이란 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이 전파 되고 받아 들여 짐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처처에 가득하였다. 바나바는 그 은혜의 현장을 보고 기뻐한 것이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아는 영의 눈이 뜨여진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 노아 시대의 노아는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망스럽고 패괴한 삶을 막 사는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시대에 이루어 가신 홍수 심판과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볼 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삼년 육 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던 시대에 바알 숭배자들과 앗세라 숭배자들의 영적 타락을 보고 하나님의 하시려는 역사적인 일들을 볼 줄 알았던 영의 눈을 가진 선지자였다. 엘리야는 저 만치 바다 끝 수평선 위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 오른 것만 보고도 하나님께서 삼년 육 개월 만에 큰 비를 내리실 것을 미리 알고 볼 줄 알았던 영의 민감한 눈을 가진 은혜를 볼 줄 알던 선지자였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되돌아가 살면서도 세월만 흘러 보낼 뿐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던 수많은 포로 귀환 무리들과 달랐다. 느헤미야는 형제 하나니를 통해서 전해들은 예루살렘 성의 불타고 무너진 채 오랜 세월 방치 되어 있는 선조들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폐허를 1,2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방 땅에서도 은혜의 눈으로 볼 줄 알았던 시대적인 사람이요 예루살렘 성곽 복원의 탁월한 총독이었다. 예수님은 타락한 예루살렘만 내려다보시던 주님이 아니라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 살던 여인들과 그들의 아들딸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볼 줄 아셨던 기도의 주님이시오 눈물의 주님이시오 구원의 주님이셨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 사람.
은혜롭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구원을 받아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 시작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본 바나바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굳건한 마음’이란 ‘확고한 의지를 가지라’는 뜻이다. 마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신자들의 믿음을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해 주신 것과 같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하셨다. 유혹과 환란과 시험과 질병과 실패와 고난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나바의 권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권면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상황을 만날 지라도 굳굳하게 주께 붙어 날마다. 순간마다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새로 나온 책에 보니까 호주의 닉 부이치치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믿음의 날개로 날다 닉 브이치치의 플라잉>이란 책이다. 양쪽 팔과 양쪽 다리가 거의 없는 몸으로 중증 장애 속에 태어난 그는 그와 같은 신체 여건에 실망만 하고 주저앉아 있거나 자포자기 하지 않고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살면서 긍정적으로 자기의 장애와 불편을 극복하며 세계인들에게 주 안에서 갖는 희망의 숭고한 가치를 간증하고 있다. 몸뚱이만 있는 몸으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서핑도 하고 수영도 하고 드럼도 치고 타이프도 치고 요리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날개를 선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날지를 못하고 날개가 점점 퇴화 되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닉 브이치치와 같이 날개가 없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활활 날아오르는 하나님 안에서의 절대 긍정의 인생도 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 보면 바나바는 지중해의 구브로 라는 섬에서 태어난 레위인이었다. 예루살렘 안에서 귀족으로 태어나거나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거나 예루살렘의 명문학교를 졸업한 그런 사람이 못되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이요 안디옥이란 이방 도시의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권면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받은 주요한 사람으로 활동을 계속해 가고 있었다.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란 말은 바나바의 인품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우리가 누구에 대한 인물평을 요구 받을 때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혹은 '그 사람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참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평을 들을 수 있다면 거기에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이 있겠는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He was a good man.’이라고 하였다. 이런 인물평을 듣는 이들로 구성된 가정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회도 그런 인물평을 받는 성도들로 가득한 교회라면 얼마나 소망이 넘치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런 시대적인 인물로 주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이다.’, 혹은 ‘그 사람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뭐 이런 인물평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무슨 실력이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이 되고 든 사람, 난 사람이 되는 것도 좋고 필요하지만 성품과 인품과 기질과 모든 면에서 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기를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칭찬이요 인정이요 축복의 말씀인가. 창세기 41장 37절 이하에 보면 애굽의 임금 바로 왕과 신하들은 감옥에서 불려 나온 히브리 청년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하는 말을 듣고는 “모두가 다 좋게 여겼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요 명철과 지혜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칭찬하면서 온 애굽의 통치권을 맡겨서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였다. 성품과 인품과 자질과 능력과 역량을 준비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시고 그 인물을 들어 쓰신다. 축복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낙망치 말고 주 안에서 언제나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성령과 믿음은 같이 가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데 믿음 약한 사람이 있겠는가. 믿음이 충만한데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 성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령과 믿음의 충만함이란 항상 같이 가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이고, 믿음의 충만이란 무엇인가. 덕을 세우고 유익이 되고 영향력이 있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향기를 발하고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나. 가령 사도행전 10장에도 보라. 가이사랴의 군대 백부장 고넬로에 관한 내용이 길게 소개된다. 사도행전 10장 2절에 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했다. 또 22절에 보면, 욥바에 베드로를 모셔 오려고 심부름을 갔던 종들이 주인 고넬료를 소개하기를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말했다. 착한 사람이요 라는 말이 사회성과 인간성에 관한 모습이라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은 바나바 자신이 자기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하면서 살아가던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말이 아닌가. 착한 사람이란 말이 바나바의 인품을 평가하는 수평적인 모습이라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란 말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면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말이 아닌가.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이 초대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일곱 집사들을 선택할 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칭찬 받는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발 기준으로 해서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집사로 선택하였다. 지금 안디옥 교회에 파송받아 이방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사역을 시작한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 한 시대 복음의 현장에서 그런 칭찬 받는 구비된 인격과 신앙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지게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전도의 사람이요 선교의 사람이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머무는 동안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부흥이 일어났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그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들 각 사람에 의한 복음 전파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원주제일교회에서 미국 웨슬리 신학교 동문회로 모였다. 그 원주제일교회란 교회는 도심 한 가운데 널따란 대지 위에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이 지어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수준 있게 제작된 스테인 글라스와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예배당은 그 자체가 예배자의 감동을 갖도록 초청하는 분위기였다. 1888년 8월에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를 첫 방문한 아펜젤러와 존 선교사는 관찰사와 면담을 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마침 도착 다음날이 주일이었고 두 사람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 날 거대한 교회로 성장하는 첫 시작이었다.
요즘 교회와 속회와 영아들을 돌보거나 유치부에서 섬기거나 교회학교와 청소년부나 교회의 무슨 부서에서 땀을 흘리며 섬기고 있는가. 작은 일을 작다고 여기면 안된다.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어도 그 씨앗에 생명이 있음으로 때가 되면 크게 자라나서 새들이 깃들만한 큰 겨자나무로 자라나는 법이 아닌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사람.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파송된 도시 안디옥에 안주 하지 않고 소문에 들어 알고 있던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를 체험한 사도 바울이 머물러 있던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방문해서 그를 찾아 낸 주인공이다. 여기서 찾았다는 말은 쉽게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한집 한 집 뒤져 가면 세밀하게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나바의 기질과 성격의 단면을 보게 해 주는 내용이다. 바나바는 집요하게 바울의 고향 마을을 샅샅이 뒤져서 사도 바울을 기필코 찾아내고 말았다. 바나바도 유명하고 유력한 초대교회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에 돋 보이는 업적은 고향 다소에서 은거하던 사도 바울을 찾아내서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의 동역을 시작으로 사도행전의 역사와 초대 이방 선교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오기 시작한 사도 바울의 그 위대한 선교 생애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촉매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이미 하나님은 다메섹에서 사울을 변화시키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 선교를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성령 받으면 이처럼 은사와 부르심을 따라서 인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찾아내서 동역하는 거룩한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울을 만나 데리고 와서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사람.
사도행전 11장 26절의 말씀에 보면, 사울의 고향 다소에까지 찾아 가서 그를 만난 바나바는 함께 안디옥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년간 머물면서 주의 말씀을 가르쳤다. 큰 무리가 주의 복음을 듣고 배우기 시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저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크리스티아누스’ 이는 ‘크리스찬’(Christian)이란 뜻이다. 이는 신약에만 단지 세 번 나오는 단어이다. 사도행전 26장 28절과 베드로 전서 4장 16절에 보면 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인 동족들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로부터 ‘나사넷 사람’ 혹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경멸하는 투의 칭호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여기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역사적인 공헌은 이처럼 돋보인다. 성령 안에서 이같은 선한 역사에 쓰임 받고 증참하는 시대적인 거룩하고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는 부활의 증인이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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