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위대한 묵상이 담긴 고백 중의 하나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보배란 사도의 직분을 말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을 의미한다. 질그릇이란 단지 연약한 육체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전인격으로서의 영, 혼, 육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배’라는 말씀이고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언급하는 겸손한 표현이 ‘질그릇’이란 말씀이다.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가.”(애4:2)라고 하였다.
예수는 그처럼 연약하고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구원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장애인들의 친구로 오셨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거의가 다 장애인들과 더불어 지낸 시간들이셨다. 앞 못 보는 이들을 고쳐 주셔서 보게 하는 시각 장애인들의 친구요 말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에베다’의 치유를 선언하셔서 듣고 말할 수 있는 회복을 선물해 주신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인들의 친구이셨다. 뿐만 아니라 손 마른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이들의 팔과 손과 다리의 건강이 회복되도록 ‘달리다굼’의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지체장애인들의 친구이셨다. 평생 나병으로 고생하던 이들을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고쳐 주심으로 격리된 환경에서 불행하고 외롭게 살아가던 나병환자들이 사랑하고 보고 싶은 가족들의 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치유의 주님이셨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려 물과 불 속에 뛰어 들며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던 불쌍한 영혼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므로 그 몸과 마음과 영혼에 천국이 임하도록 회복의 은총을 선물해 주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 감사의 은총을 덧입혀 주셔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국의 은혜를 공급해 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오늘 날도 계속하여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므로 그 누구나 믿고 의지하고 간구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공급해 주셔서 세상을 이기며 권능을 받은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어린 아기들의 친구요 이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친구요 베다니의 나사로와도 친구의 우정을 나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님은 창기와 세리와도 친구로 지내실 만큼 열린 마음을 갖고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나 직업이나 사회적인 그 무엇으로 차별하여 대하시지 않고 골고루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선대하시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열 두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병도 일 순간에 고침 받도록 자신의 능력이 흘러가게 하셨던 치유와 회복의 주님이셨다.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의 마음은 만난 적도 없는 백부장의 하인이라도 고침 받도록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각색 병자들과 귀신들려 고생하는 자들을 깨끗하게 치유하시는 치유의 주님이요 회복의 주님이셨다.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날도 주님의 치유의 은총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의 영혼과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을 골고루 강건하게 회복시켜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장애인이다. 신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의 처리와 정서적인 표현의 부족을 가진 이들을 통 틀어서 장애인이라고 한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장애의 정도로 구분하자면 전혀 장애가 없이 100% 완전한 영, 혼, 육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1976년, U. N 제31차 총회에서 1981년을 ‘세계장애인의해’로 정하고 “모든 국가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참여가 여러 분야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다른 국민들과 동일한 기회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며 신장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장애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장애인의 재활의지를 고취”할 목적으로 1981년부터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했다. 1989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각종 장애인들의 복지와 의료 혜택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이 없는 세상이란 없다.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장애를 가진 가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이다. 또 두드러진 장애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그 누구나 몸과 마음에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이어서 몸이 약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병들면 그 증상이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게끔 되어 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따라서 약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마음이 심약해지면 몸도 따라서 병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도 기쁘고 평안해 지고, 몸이 병들면 마음도 따라서 병들고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장애란 몸의 장애, 정신의 장애, 지능의 장애 등 그 구분이 다양하다.
우리는 장애 속에서 태어나서 평생 장애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후천적인 장애를 입거나 사고를 당하여서 장애 가운데 지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주께 기도하여도 몸과 마음과 정신의 장애를 쉽게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조상들의 죄 때문이냐 혹은 자신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 앞에 “누군가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해 주시며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적도 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장애도 있지만 때로는 지나친 탐심이나 탐식도 장애일 수 있다. 남의 목숨을 함부로 대한다든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든지, 남의 가정을 파괴한다든지, 남의 인격을 험담한다든지 하는 것도 감정적이거나 정서적인 인격의 장애일 수 있다. 그와 같은 품성의 소유자는 주변이나 사회에 크고 작은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정과 사회와 교회는 구석구석에서 가족들 간이든, 그 어떤 인간관계이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고, 능력 있는 자가 능력 부족한 자를 살피고, 지혜로운 자가 덜 지혜로운 자에게 배려하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인간은 약하다. 질그릇은 가벼운 충격에도 금이 가거나 잘 깨진다. 인간의 몸이 그러하고 마음 상태가 그러하고 영혼도 사탄의 공격과 유혹 앞에 쉽게 병들고 무너진다. 인간은 그 사람이 지향하는 사상, 철학, 인생관, 가치관, 재물관, 성공관, 민족관, 역사관, 우주관, 신앙관에 따라서 그 한 인간의 됨됨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육체로는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외모이셨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예수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바람을 받고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인생으로 사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생애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허물과 죄악을 다 한 몸에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평화와 치유를 선물로 허락하신 주님이시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이 부족한 이웃과 가족을 돌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물론 그 수고를 계속하고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칠 정도로 애쓰고 수고하고 섬기고 돌보고 끝이 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 방송사에서는 장애인의 날 특집으로 ‘인간극장’ 프로그램을 통해서 중풍병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집안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아버지와 대인기피증으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남동생과 지적장애를 갖고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말고 사회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내는 또 다른 삼십대의 여동생을 돌보는 30대 중반의 큰 딸이 엄마 없이 살아가며 온 가족을 끊임없이 돌보고 섬기는 간병기를 중심으로 특집을 다루었다.
어린이 날이나 어린이 주일, 혹은 어버이 날이나 부모님 주일이 연례행사로 끝나서는 의미가 적은 것처럼 장애를 가진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나 나 자신이 장애를 갖고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그 모든 연약함의 배후에 나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매 순간 믿고 의지하며 새 힘을 공급 받으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이와 같은 믿음이 곧 보배이다. 그 믿음의 영광스러운 보배를 질그릇 인생에 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하나님께 있는 심히 큰 능력을 알아야 한다.
우린 성경 말씀 그대로를 자세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룻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이는 설명이 필요 없는 진리의 선언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 절인 고린도후서 4장 6절 말씀을 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렇다. 이것이 말씀의 비밀이요 위로요 힘이요 격려와 소망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의 힘을 그대로 믿고 굳굳하게 살아온 역사적인 인물들은 의외로 많다.
삼중고의 여인이라고 부르는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세 가지의 장애 속에서 평생을 장애를 극복하며 장애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는 그런 신체의 약함을 극복하며 세계 최초의 대학 졸업자가 되었다. 저술가요 강연가요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이요 사회사업가로 살아갔다. <나의 생애>( The Story of My Life, 1902), <암흑 속에서 벗어나>( Out of the Dark, 1913), <나의 종교>( My Religion, 1927), <신앙의 권유>(Let Us Have Faith, 1940)와 같은 그녀가 쓴 책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온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미국 앨러배마 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생후 19개월 때에 열병을 앓다가 시력도 잃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7살 때에 슈리반이라는 이름의 선생님을 가정교사로 만나서 끝 없는 사랑의 교육을 받았다. 20살 때에 하버드대학교 레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였고 4년 후에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당시로는 세계 최초의 경이적인 일이었다.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로 잘 알려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그녀에게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노력과 정신력은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다양한 활동으로 ‘빛의 천사’로도 불렸다. 미국 전역 및 해외로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사람과 섭리와 노력을 역설하여 자기처럼 못 보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의 교육과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한 기금을 모아 맹농아자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7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그녀는 88년을 살면서 불운한 장애 속에 살아가는 세계의 이웃들에게 빛과 희망을 전하는 복음의 전파자였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말들이 많지만 그 중에,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
는 말이 있다. 그의 유명한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나는 눈을 뜨는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키워준 에너 슈리반 선생님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손끝으로만 만져서 알던 그 인자한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나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들로 산으로 나가겠다.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장엄한 장면을 보고, 아침에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겠다.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을 보겠다. 아침에는 오페라 하우스,오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고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 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의 가게에 진열된 아름다운 상품을 보면서 집에 돌아온다.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열네 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열일곱 살에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다. 그러다 스물여섯 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서른두 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심금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주는 대 예술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교향곡 9번 '합창'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20대 초반부터 근위측증인 루게릭병으로 앓고 있는 우주 물리학자인 영국의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은 말도 못하고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 속에서도 굳굳하게 학자의 길을 살아오고 있다.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1976-) 같은 이도 장애를 극복한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센티미터 남짓 자라났다. 그런 팔다리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오체 불만족>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대통령은 후천성 소아마비에 걸린 후에도 엄청난 통증과 싸우며 장애를 극복하고자 씨름하였다. 이후 뉴욕지사에 당선되고, 4년 후인 1932년에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에 당선 된 후에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걷지 못하게 된 12년 후의 일이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는 심각한 언어 장애인이었다. 기독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는 선교사였다. 외할아버지는 30여 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그의 외할아버지의 서재에는 기독교 서적에서부터 그리스 및 라틴의 고전, 인도의 서적 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헤르만 헤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홉 살 연상이었던 아내의 정신병 악화와 자신의 신경장애 때문에 헤세는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연구하며 자신의 질병과 씨름하던 그가 그 후에 쓴 작품이 <데미안>이다. 인간의 본성과 이성의 갈등을 그린 <지와 사랑>(1930), <유리알 유희>(1943)등의 작품을 발표한 그는 마침내 194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설적인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가 제2의 전성기를 살아가고 있다. 선수 생활 때 입은 펀치 드렁크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알리가 전 세계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부각되면서 상담과 위문활동과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손자(孫子)는 B C 6-5세기경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병법가이다. 이름은 무(武), 자(子)는 존칭이다. 절도와 규율로 오나라의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병서인 '손자'를 지었다. 그의 병서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의를 전쟁의 근본이념으로 하였는데 거기에는 전쟁의 전술만이 아니고 제후의 내치, 외교, 국가경영의 비결, 승패의 비기, 인사의 성패 등에 대해서도 비범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전략은 후세의 무장들 사이에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 나에도 일찍이 소개되어 애독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 때 역과 초시(譯科 初試)의 교재로 쓰였으며 최근에는 소설로도 소개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두 다리가 절단된 중증장애인이었다.
“천재란 98%의 노력과 2%의 영감의 산물이다.”라고 역설한 역사적인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931)은 거의 알아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구에 더욱 몰두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1962년생인 서울대학교의 해양학박사인 이상묵 박사도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지질 탐사와 연구 중에 자동차 전복 사고를 입었다. 그러나 그는 전신마비의 장애를 극복하며 강단에서 가르치고 굳굳하게 연구생활과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나 자신이나 혹은 가족들 중의 그 누군가 혹은 자녀들 중의 그 누군가가 장애나 부족으로 아파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있는가. 약함은 인간에게 있는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부족과 장애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용기와 희망이 공급되기를 소망한다.
외우내환(外憂內患)을 극복하는 예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다 같이 읽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도 마찬가지 아닌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라.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생명을 반복하여 전파하는 바울의 부활 신앙, 생명 신앙을 느껴 보라. 우리는 죽음을 짊어진 자로 끝나는 인생이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고 약동하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같은 복음의 능력 안에서 승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아니 평생토록 함께 하는 주인공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다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선언하였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렇다. 이런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자. 병약해도 가난해도 기죽지 말고 성공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했어도 기죽지 말자. 13절을 보라.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라고 하였다. 지금 내가 겪고 일이 나의 삶의 전부라고 속단하지 말라. 그리고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의 생명은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14절 말씀은 무슨 내용인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천지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시다. 사 계절을 날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주 안에서 제대로 살아가자. 그래야 때가 되면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배의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 앞이란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 다는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간 성도들을 흠과 티가 없는 성도의 면류관을 받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1-23)
사도 바울의 선교관은 분명하였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 보다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전해 받는 성도들의 믿음이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래서 15절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그리고 이어서 분명하게 말한다.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때가 되면 낡고 금이 가고 깨어질 인생의 질그릇 같은 육체에 담긴 보배인 예수의 생명의 복음을 소중히 여기며 만방에 전파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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