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背反, betrayal)을 당하거나 반역(反逆, rebellion)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 그런 일은 없지 않았다. 그와 같은 일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혹은 기업에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있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제자였던 가롯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셨다. 가롯 유다는 은 삼십량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버렸다. 창세기의 요셉이 들판에서 양을 치던 열 명의 형들을 면회 갔다가 형들에 의해서 미디안 장사꾼들에게 팔려간 것처럼 말이다.
남에게 핍박을 받거나 그 누군가로부터 배척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살아가다가 보면 한 국가가 주변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점령을 당하거나 지배를 받는 경우도 있고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누군가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배척을 받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합방이 되고 일제 식민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계속한 끝에 36년 만에 겨우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의 삼일절 독립 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로 94년이 되었다. 삼일절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의 경찰과 순경의 총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죽창에 찔려 죽은 대한민국 사람들만 7,509명이다. 체포되어 고문을 받거나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한 사람들만도 47,000명이었다. 핍박과 고난과 시련과 억압이 시작되면 이처럼 그 어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본의 우익 단체들은 아직도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면서 다케시마의 날까지 정해 놓고 한국에 대하여 독도 소유권 분쟁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주변의 핍박과 박해와 배척을 극복하는 길은 그만한 힘을 키우는 길 밖에는 없다. 그만한 힘을 키우는 세상적인 방법은 군대의 힘을 키우거나 개인적인 실력을 키우는 길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크게 두 번 인생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광야로 피신하여 다니던 10년이 훨씬 넘는 피신 생활의 경험이다. 다윗은 십대 중반의 소년기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온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매 돌 다섯 개 들고 나가서 한 개의 물매 돌을 던져서 적장 골리앗을 맞혀 죽인 후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나라의 여인들은 노래할 때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였다. 어느 임금이 그런 노래를 좋아하겠는가. 과거에 머리가 벗겨진 이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서 재직하던 당시에는 ‘대머리’라는 표현조차 쓰지 못하게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다윗은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울 임금에 의해서 늘 숨어 살고 피해 다니며 광야와 동굴에서 연명하며 지내야 하는 긴긴 세월 동안의 고독과 불안과 외로움이 심각하였다. 그야말로 청년기에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낸 후인 BC 1010년에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B. C 979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임금 다윗을 반역하였다. 왕이 된지 31년차에 겪은 배반 사건이었다. 결국은 반역 세력을 진압하지 못하고 피신하고 왕궁을 벗어나서 지내던 참담한 때가 있다. 본문인 시편 63편은 그런 곤혹스러운 일을 겪던 다윗이 감람산 기슭으로 피신하여 유다 들판으로 나아가서 피신 생활을 할 당시에 쓴 비탄시의 하나이다.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빼앗으려 했을 때에 이를 막지 못한 임금 다윗이 신하들과 더불어 맨발로 기드론 시냇가를 거쳐서 감람 산 기슭으로 울면서 피신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참으로 안타깝고 침통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앞서 가고 뒤 따르는 온 백성들이 울면서 임금 다윗을 따라 나서는 역사적인위기의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때에 예루살렘 성막에서 섬기던 제사장 사독이 레위인의 힘을 빌려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피신 중인 임금 다윗 곁으로 가져 왔다. 그 때에 다윗 왕이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15:25-26)고 하였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며 왕궁에 회복되던지 아니면 기드론 시내를 건넌 광야 길에서 죽으면 죽을 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담담한 마음가짐을 피력한 장면이다.
본문인 시편 63편은 이처럼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왕권을 찬탈 당하고 광야로 피신하여 지내던 임금 다윗이 하나님께 고백한 내용이다. 다윗은 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인간적인 노력도 노력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고 간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믿음.
다윗은 압살롬 이상의 경험이 많은 군사요 용맹한 전략가이다. 그런 다윗이 얼마가 되든지 자기 곁에 함께 피신한 세력들을 규합해서 왕권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세력과 전쟁을 준비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1절과 2절에 보면,
“내가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물이 없이 마르고 황폐한 땅이 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주님의 도우심을 갈망합니다.
내 육체가 주님의 도우심을 앙망합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지난 날 주의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던 때와 같이
간절히 주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앙망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겪거나 어려운 상황을 만나거나 곤혹스러운 지경에서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하여야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간절히 청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다윗의 솔직하고 담백한 기도를 보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O God, You are my God.)
이보다 더 솔직한 고백이 또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이란 고백은 ‘우주와 역사의 절대 주관자이신 주님의 권능과 그 크신 위엄’을 나타내는 최고의 호칭이다.
다윗은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기를 즐겨하고 기뻐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 당시의 하나님의 집은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기 이전이므로 모세 때에 광야 성막이 그 때까지 이어온 성막이었다. 다윗은 임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항상 주목하고 바라보며 살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지금 비록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반역을 당하고 광야 길로 피신한 신세이지만 다윗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분명한 고백이 있었다.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믿음이 있을 수 있는가.
새 학년을 시작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가슴 속에 이런 믿음이 자리 잡기를 기도한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의 마음에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소망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직장, 사업, 장사, 건강, 재물 관리, 가정의 그 모든 것 앞에 이런 고백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잘 나서 직장에서 승진도하고, 승급도 하고, 내가 잘나서 사업도 잘하고, 내가 잘나서 장사도 잘되고, 내가 잘 나서 형통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요 교만이 아닐 수 없다.
잠언 3장 6절은 말씀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런 신앙이 다윗의 신앙이요 임금 다윗의 믿음이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했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잠215:25)고 하셨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고 하였다.
임금 다윗은 평안할 때에나 어려울 때에나 조용할 때에나 뒤숭숭할 때에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는 고백이 분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윗이 지금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 마르고 황폐한 땅이 물을 찾듯이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앙모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갈망하는 것은 목 마른 자의 모습을 말하고 앙망한다는 말은 ‘모든 힘을 다해서 애타게 찾는 것’을 뜻한다. 고라 자손의 시편인 시편 42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급해 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다윗이 기드론 시냇가를 지나고 감람 산 기슭을 벗어나 예루살렘 왕궁 밖의 광야 길로 피신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고 앙모하고 있다.
요즘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갖고 간절하고 안타깝게 기도하고 있는가.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맨발로 피신한 임금 다윗의 심경을 상상하여 보라. 그리고 지금 다윗이 광야에 피신하며 기도하고 있는 이런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보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앙인의 찬양.
지금 다윗처럼 이런 비참한 지경에서 우리는 찬양과 찬송과 즐거운 노래가 가능할까. 그런데 다윗은 광야에 쫓겨나서 피신하여 다니는 이 같은 참담한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주를 찬양하고 있다. 3절 말씀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라. 구구절절이 ‘찬양, 송축, 찬송’을 한다고 고백하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믿음의 능력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다윗은 실로 믿음의 사람이요 찬송의 사람이요 거듭난 신앙으로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잘되든지 안 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 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경배하고 송축하고 찬양할 만한 믿음이 나에게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혼의 만족을 사모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생토록 하나님을 송축하고자 하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두 손을 들고 찬송할 줄 알던 경배의 사람이요 찬미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잠자리에 드는 침상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른 새벽에 깨어나서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묵상하던 기도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이요 찬송의 사람이었다.
지금 다윗은 비록 광야에 피신하여 지내야 하는 참담한 형편 가운데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여건의 임금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시63:7) 이것이 무슨 뜻인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다윗은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 왔지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다윗에게 도움이 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도움이신 하나님이시란 분명한 체험과 간증이 있었다.
요즘 기독교 서점가에는 <하나님의 대사>란 제목의 간증집이 세권이나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주중 대사를 6년 반 동안이나 지내고 직전 정부 때에는 통일부 장관까지 역임하고 대통령 자문 통일 고문까기 역임하였던 김하중 장로의 간증집이다. 그는 1994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신앙의 체험을 갖고 본격적인 믿음 생활을 시작하였다. 강원도 원주 출신인 그는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능력과 중보 기도의 힘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간증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온누리 교회의 신자이다.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간섭하시고 이끄시고 환경과 여건과 결과를 되도록 섭리하신 생생한 체험들을 담아 내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하던 시기에 과감하게 대통령(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건의하고, 방중 계획 불과 이틀 전에 사스가 공식 종료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또 북한 고위 간부였던 황장엽씨가 망명 신청을 했을 때도 많은 이들과 함께 기도를 해 당시 사태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간증한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시작한다.
유태인이며 미국의 발명 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미시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저능아라는 냉대를 받으며 3개월 밖에는 더 이상 다니지 못했다. 그 후 5년간을 가끔 씩 학교에 가려 했으나 적응하지 못했고 청각 장애가 있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더욱이나 쉽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직접 가르쳤고 연구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하여 지하실에 연구실도 마련해 주었다. 12살 때에 연구용 화학약품과 기구들을 사기 위해서 기차에서 샌드위치와 땅콩을 팔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기차 안으로 연구실을 옮겨서 연구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돈을 벌었다. 그 기차간에서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기도 하였다. 기차간의 연구실에서 화학 약품 폭발로 인해서 불이 나는 바람에 기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는 22살 때에 생계유지를 위해서 뉴욕 시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전신 수신 인자기’를 발명해서 갑자기 4만 달러를 벌었다. 이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발명가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 평생 1,093가지가 넘는 발명을 하였다. 그는 1931년에 84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전기시대를 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축음기, 현대 전화기의 전신인 탄소송화기(炭素送話器), 백열전구, 가장 효율적이고 혁신적인 발전기, 최초로 상업화된 전등과 전력 체계, 실험적 전기철도, 가정용 영사기 등을 발명했다. 그의 평생 청각 장애는 그를 더욱 더 연구에 몰두 하게 만들었다. 그의 아들 찰스 에디슨은 아버지 토마스 에디슨을 추억하기를 “아버지는 용기와 상상력과 결단력이 분명하였고 겸손하고 위트가 있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지만 낚시나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여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주사위 놀이를 놀아 주거나 함께 뛰 놀아 주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세상길도 찾고 또 찾고 노력하면 길이 열리듯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의지하는 믿음은 영적으로 매우 합리적이고 공학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능력 안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떤 곤경 가운데에서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경배하고 송축하고 찬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해서 고친 기적이 있었다. 그 점치는 여종의 주인이 자기의 수입이 끊긴 것을 억울하게 여겨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관리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 로마 사람들이 받을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하였다. 무리가 달려들어서 일제히 고발하니까 상관들은 얼떨결에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한 후에 몹시 때리고 옥에 가둔 후에 간수들에게 명령해서 든든히 지키라고 하였다.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다른 죄수들이 들을 정도였다.(행16:25)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큰 지진으로 그 감옥의 옥터를 흔드셨고 옥문이 열려지게 하셨다. 죄수들을 매었던 착고도 풀려 졌다. 옥문을 지키던 간수들이 자다가 깨어나 보니 옥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로 착각하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소리쳤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이 때 간수들이 등불을 달라하면서 사도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 때에 바울과 실라는 이렇게 복음을 전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그리고 나서 바울과 실라는 밤새도록 간수와 그 집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밤으로 간수들은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아 고통스러운 상처를 싸매어 주고 온 가족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그 밤중에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고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였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이나 실라의 믿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라고 고백하였다. 이 얼마나 담대하고 놀라운 신앙 고백인가. “주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은 생명 보다 더 소중합니다.”하는 뜻이다. 그우ㅏ 같은 주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아는 다윗이기에 다윗은 곤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주의 영광을 높이는 노래를 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가 입술로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Because your love is better than life, my lips will glorify you.) 시편 63편 3절의 표준새번역과 NIV 내용이다.
다윗은 그런 믿음과 체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을 수 없이 경험해서 가슴 절절이 알고 간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살아온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지금 비록 자신이 임금으로서 상상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조차 없는 인생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분명한 믿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주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아온 자신인 것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의인(義人)을 붙드시는 주님의 오른 손.
다윗은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8절을 보라.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고백하였다. 그에게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분명한 체험과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다윗을 대적하는 이들은 다윗 개인을 대적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 앞에서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갈 것이란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9절과 10절의 내용들이 그런 그의 신앙을 담고 있다.
다윗은 주를 가까이하고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 살아가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대적자들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기도하며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만 즐거워하던 깊은 믿음을 간직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는 주께 맹세하고 살아가며 주님만을 자랑삼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자들의 나중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다윗은 핍박과 배척의 고난기를 겪었으나 그의 인생 70년과 그의 임금 생활 40년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잡혀 살아가고자 하는 겸허한 신앙의 고백이 언제나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다.(삼상13:14, 행13:22) 하나님이 오래도록 오른손으로 붙들어 쓰시는 사람, 그렇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자.
사순절 기간이다. 150장 찬송의 후렴을 부르자. 그리고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자.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같은 신앙의 고백과 승리의 삶을 가꾸어 가는 겸허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님도 멸시 천대를 한 몸으로 다 받으셨다. 그리고 죽으셨으나 다시 사셨다. 죽어야 산다. 무덤에 눕혀서 삼일 만에 부활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무덤에 장사지낸 삼일을 다 거치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우리 각 사람의 삶 속에 그런 분명한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자. 죽어야 산다. 낮아져야 높여진다. 오직 생명과 부활만이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다. 그런 고난 극복과 핍박과 환난과 대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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