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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復活)과 승천(昇天)(눅24:36-5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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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1 22:18 조회 23,105 댓글 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없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열 한 제자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며 사도 바울도 불행한 사람들 중의 대표가 될 것이다. 왜 열한 제자인가. 가롯 유다를 빼고 하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맛디아가 채워졌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고 말구유에 누이신 적이 있으시다.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고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병자를 치유했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는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하게 하셨고 광야의 배고픈 무리 이만 여명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먹이시고 배가 부르게 먹이시고도 그 부스러기만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그는 때로 파도 위를 걷기도 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열 두 살 난 외동딸을 살려 내기도 하셨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장례가 끝난 무덤 앞에 가셔서 불러내심으로 다시 살려 내신 적도 있으시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 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그는 친히 붙들려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묘실에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이른 새벽 시간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지낸 돌무덤을 찾아간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었다. 저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키고 있던 흰 옷 입은 두 천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저들 여인들은 놀랍고 기쁘고 무섭기도 한 착잡한 심정으로 열 한 제자가 숨어 있던 곳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고 말씀하셨다.

평강의 선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Peace be with you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평강의 선포이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나 평강을 원한다. 평강처럼 귀한 것이 없다. 아무리 권력자라면 무엇하고 아무리 부자라면 무엇할까. 만약에 그 마음에 평강이 없고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다면 그 마음을 그 누가 다스려 줄 수 있을까. 임금이라도 그 마음이 늘 불안하고 착잡하다면 임금의 그 높은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의 마음을 누르며 살며시 찾아드는 것이 염려와 불안과 초조와 긴장과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마음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충고해 주셨다. 이에 더해서 교훈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또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근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차원의 평강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가 경험하는 평안과 평강은 나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평강이다.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강이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가. 70장 찬송가의 가사처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하는 고백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의 뿌리는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신앙으로 자기 자신과 환경을 소화해 나가는 믿음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후서 4장 8절 이하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욱여 싸임을 당할 때가 있다.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박해를 받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욱여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자.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으리라는 소망과 믿음을 갖자.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자.

시편 3편 6절에 보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다윗의 주변에는 대적하는 원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시편 3편 1절에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처럼 대적이 많은 것은 그가 겪는 환경들이고 그런 불안한 환경 중에서 기도하는 다윗의 기도를 보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언제나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환경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시고 그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부족한 다윗의 머리를 들어 주시리라는 믿음과 소망과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평강하게 누워 자고 깨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부활 신앙은 평강으로 대답되어야 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 그대로 말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식탁
예수님은 붙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잡수실 것을 찾으셨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그 때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이 있어서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맛있게 잡수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착잡해 하는 제자들 곁에서 잡수셨다. 사도행전 10장 41절에 보면,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여러 차례 음식을 함께 잡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이 2012년 추석날이며 주일인데 오늘 하필 금식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주의 날은 기뻐하며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더욱이나 명절날의 특징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제자들과 무리들과 함께 음식 잡수시기를 즐겨 하셨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 거리는 말도 ‘왜 너희 선생은 언제나 창기나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집에 가셔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 잔치집의 음식을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운 잔치집의 흥을 함께 나누셨다. 예수님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도 먹고 마시고 주무시기 위해서 들어 가셨고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도 먹고 마시고 쉬기 위해서 들어 가셨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제자나 무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웃고 말씀하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도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하던 베드로와 일곱 명의 제자들을 그 다음 날 새벽에 해변 가에 찾아 가셔서 불러 내셨다.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있던 저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하니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다. 얼마나 크고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고 그물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겉옷을 벗고 있다가 급하게 겉옷을 두르고는 200여 미터의 물길을 허우적대며 예수님께로 달려 나갔다. 이미 예수님은 그 해변 가에다가 숯불을 지펴 놓고 계셨다. 그 불 위에다가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다. 다른 제자들이 서둘러 풍성하게 물고기를 잡은 배를 뭍에 대자.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고 말씀하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시자 제자들이 숯불 가에 예수님 주변에 모두 둘러앉아서 아침을 함께 먹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라. 갈릴리 해변 가의 이른 아침 숯불 가에 둘러 앉아 떡과 물고기를 구워서 먹는 조반 상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더불어 같이 함께 먹는 일이다. 이 세상에 먹는 일처럼 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가족도 함께 먹는 일이 중요하다. 서로 바쁘다 보니 하루 혹은 일주일에 가족이 더불어 같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같이 음식을 먹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간다. 자주 함께 먹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풍성한 음식의 식탁을 차려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는 말씀은 원수들이 바라다보는 앞에서도 풍성하고 기름진 것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을 차려 주신다는 말씀이다. 군대가 싸움터에서 쫓기고 싸우고 피를 흘리는 때에는 전투 식량이나 주먹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원수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신 다는 말씀은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인생의 결투에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할렐루야.

부활은 승리다. 죽음을 이긴 승리요 죄악을 이긴 승리이다. 그러므로 부활 하신 주님이 잡수시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부활 하신지 사흘 째 되던 날 이른 새벽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잡게 하셔서 잡힌 153마리의 물고기를 해변 가로 싣고 나오게 하신 후에 떡과 물고기를 구워서 함께 잡수시는 그 해변의 식탁은 은혜의 식탁이요 회복의 식탁이요 용서의 식탁이요 축복의 식탁이요 감격의 식탁이요 승리의 식탁인 것이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6.25 때 남하하여 살아가는 실향민들은 통일동산이나 도라산 전망대나 임진각에서 북한에 두고 온 고향 땅과 선조들의 묘가 있는 선산을 멀리 바라다보면서 명절의 허전함과 쓸쓸함을 달랜다. 그런데 이런 날들이 다 지나가고 도라산 역에서 개성으로 평양으로 신의주로 원산으로 함흥으로 KTX 고속 기차를 타고 북녘 땅의 고향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통일의 날이 왔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복되고 감격스러운 날이겠는가. 때가 되면 그런 통일의 날도 오리라고 믿는다.

시편 126편 1-2절의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나라 가운데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126:3)고 했다. 이런 기쁨의 식탁, 이런 감격의 식탁, 이런 축복의 식탁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이 아닌가.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초청하셨다.

그렇다. 신앙생활은 주와 더불어 영원히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주인공이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의 모든 말씀들 가운데 예언된 메시아 예언 즉 예수님께 대한 모든 예언이 성취된 부활의 주인공이시다. 그것을 몰랐을 때에는 몰라서 믿지 못하고 몰라서  부인하고 몰라서 배반하고 몰라서 숨고 몰라서 비겁하게 행동하던 제자들이었는데 여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닫혀 있던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성경의 예언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자 깨닫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소개하는 당시의 장면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묵상할 필요가 있다. 45절의 ‘그들의 마음을 열어’라는 본문의 ‘열어’라는 말씀은 누가복음 24장 31절의 ‘눈이 밝아져’와 32절의 ‘풀어 주실 때에’와 똑 같은 표현을 사용한 말씀이다. 즉 ‘열어’라는 ‘디아노이고’(dianoivgw)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신 것이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깨닫도록 해 주신 것이지 제자들 스스로 깨달아 안 것이 아니란 말이다. 본문을 보면 완전히 수동태로 되어 있다. 45절에,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가.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도 예수님이시고 성경을 깨달아 알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은혜 받기를 사모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깨달음과 변화의 주체는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객체들이다. 예수님이 능동이고 제자들은 수동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믿는 배후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의 그 누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죄 사함과 회개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는가. 예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가지고 그 부활의 사실을 전파하고 알리는 부활 소식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택함 받은 자의 얼마나 감격스러운 주님의 축복인가. 그러므로 49절의 말씀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여야만 한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단 한 가지도 없다.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그런 강력한 복음 전파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가셨고 그 곳에서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부활 신앙과 승천 신앙을 기독교 신앙의 뼈대와 같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장면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된 우리들이라고 하면 성령도 믿고, 거룩한 공교회도 믿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와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이며 승천이 역사이듯이 재림도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맨 마지막 부분인 22장 20절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주의 성도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이런 신앙 말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 빛나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가 작사 작곡한 ‘주님 고대가’라는 부제가 붙은 “낮에나 밤에나”라는 찬송이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오늘 날도 우리는 이런 신앙을 회복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주님을 경배하며 큰 기쁨으로 분부하심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누가복음을 썼으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그 사도행전의 첫 장면에 보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려고 모여 든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그 곳에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님의 동생들과 예수님의 분부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열한 제자들은 맛디아를 가롯 유다의 빈자리에 제비 뽑아 보충한 후에 열심히 성령 받기를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흘 째 되는 날에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저들 위에 임하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의 힘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엔진에 공급되는 휘발유(揮發油)나 경유(輕油)와 같은 것이다.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어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자동차가 동서남북 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성령 받은 성도들을 땅 끝까지 나아가서 복음의 증인(證人)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좋으신 영이시며 보혜사의 영 즉 돕는 영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8절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證人)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렇다. 오늘 날 성도들은 계속하여 신앙의 선조들처럼 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만 할 것이다.


1876년에 백홍준, 이웅찬, 이성하, 김진기, 이익세가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선교사에게 만주에서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일이다. 그 이태 후인 1878년에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1848-1926)이 만주에 장사하러 갔다가 장티프스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던 중에 스코틀랜드 의료 선교사 헌터를 만나서 도움을 받고 치료 받아 건강을 회복하고 그 후에 메킨 타이어 목사와 로스목사에게 전도를 받고 로스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에 로스목사를 도와서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882년에 ‘에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갖고 들어오다가 걸려서 감옥에 갇혔다. 그 후 탈옥하여 외가 마을인 황해도 송천리에 머물면서 전도하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를 개척하였다. 1883년 5월 16일의 일이다.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는 자기 집에서 시작된 교회의 교인으로 1887년 1월에 서울에 올라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아들 서병호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아들 서병호는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 아동이 되었다.
그해 9월 27일에 존 로스 선교사와 14명의 교인들이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새문안 교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서경조는 최초의 한국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공부하고 1907년에 길선주, 이기풍 등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1884년 6월 9일에 서상륜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동생 서경조의 집인 초가집을 교회로 삼아  10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1년 이 지난 1895년에 기와집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당시 17만 냥의 돈건축 헌금을 모아서 마을의 서낭당 터에 8평의 기와식 예배당을 지어 봉헌 한 것이다. 얼마 후 교인이 늘어나자 교회를 다시 증축하였다. 그 삼 년 후인 1898년에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이 소래 교회에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는 1885년 4월 5일에 인천 제뭂포 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그 같은 해 가을인 10월 11일에 한국 최초로 성찬식을 거행한 것으로부터 정동제일교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정동제일교회의 최초의 벽돌 예배당은 1895년 9월 9일에 시작되어 2년 후인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하였다. 당시 부흥하는 교인 500명 이상을 수용하기 위하여 지은 예배당은 성단(聖壇) 부분의 좌우편에 익부(翼部)가 달린 십자가형의 지붕을 갖춘 예배당이다.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였으나 6. 25때에 예배당의 일부와 함께 불탄 것을 2003년에 고 이종덕 권사의 유족들이 복원하여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이승만, 김활란, 유관순 등이 출석하며 예배드리고 기도하던 곳이다.  1917년 충남 공주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한 16살의 어린 소녀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늘 태극기를 품에 숨기고 파이프 오르간 뒤에 엎드려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늘 기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연기 진천 청주 등지를 돌면서 독립 운동을 모의한 그는 2년 후인 1919년 3월 1일 3. 1절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 씨와 어머니 이씨는 그 날 아오내 장터에서 일본 헌병의 총칼에 찔려 피살되었다. 유관순은 공주지방 법원에서 3년 형을 받았으나 항소하였고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수시로 끌려가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는 모진 고통의 시간을 지내다가 다음 해인 1920년에 19살 나이에 옥사하였다. 유관순의 참살 소식을 들은 이틀 후에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교사가 시체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 경찰과 간수들은 들어 주지 않았다. 유관순을 학살한 사실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 대응하자 그제야 석유 상자에 든 시체를 내어 주었는데 열어 보니 토막 내어 참살한 비참한 모습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그렇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 사람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환란과 시련과 모함과 오해와 조롱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 다시 오실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 승리의 복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복음의 증인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부터 37절까지에서 선언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와 같은 부활 복음의 승리가 부활 신앙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를 통해서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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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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