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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께서 기대하시는 인생(시22:25-31) 5. 6 어린이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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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5-06 07:05 조회 24,147 댓글 0
 
‘거위의 꿈’이란 노래가 있다. 남성 듀엣 카니발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노래이다. 본명이 이동준인 가수 이적이 23살 때에 가사를 쓰고 김동률이 곡을 붙였다. 1997년 IMF가 시작되어 국가적으로 우울하던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한 몇 안 되는 건전 가요 중의 하나이다. 이적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김동률은 1993년 연세대학교 때에 MBC 대학가요제에서 ‘꿈속에서’라는 노래로 데뷔한 주인공이다. 그는 나중에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한 인물이다.

나중에는 인순이(김인순, 1957-)씨가 계속 불러서 더 유명해진 노래이기도 하다. 가수 인순이 씨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1957년에 태어났다. 어디까지 공부했는지 드러낼 학력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는 지난 해 가을 서울의 모대학교 초청으로 특강을 했다. 그녀에게는 학력보다 천배 만 배 더 큰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대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밝혔다. ‘거위의 꿈’ 그 노래 가사는 바로 ‘김인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노래한 것 같다고 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 해요.


어린이의 때는 꿈을 먹고 자라나는 때이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 어떤 이불을 덥고 자느냐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을 신고 어떤 가방을 메고 다니느냐 보다 천배 만 배 중요한 것이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어려서의 꿈, 청소년기의 꿈, 청년기의 꿈... 그 꿈이 그 사람의 나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 미국 보건부 보건 담당 차관보 고경주 박사나 미 예일 법대 학장을 지내고 지금은 미 국무부 법률 고문인 고흥주 박사 형제 일화가 풍성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경주 박사 고흥주 박사 형제의 어머니인 전혜성 여사는 “인간성이 결여된 엘리트주의는 사회의 지도자를 만들지 못한다. 자신의 풍족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로 평소에 늘 그가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강조하던 가정 교육철학을 세상에 전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간성이 더 중요하고,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섬기고 베푸는 삶을 살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될수 있다는 강조이다. 전혜성 여사는 자기 자신이 6. 25 이전에 미국 보스턴에 유학하여 인류학 박사가 되고 그 분야에 공헌한 꿈의 주인공이기도 하였지만 고인이 된 남편 고광림 박사와 더불어 4남 2녀의 6남매에게 “목표의식을 갖게 하고 칭찬과 격려 가운데 잘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도우면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한 것이 오늘날의 성공적인 자녀교육의 열매를 맺게 되었노라고 전했다. 전혜성 박사의 남편 고광림 씨는 5. 16 혁명이 일어나자 자유당 시절에 파견되었던 주미공사 자리를 내려놓고 망명하여 미국 생활을 개척해 가기 시작했다. 아내 전혜성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서 자녀들을 다 깨워 그 시간에 가족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가족의 유대감을 소중하게 여겨 왔다고 했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에서 전혜성 여사는 미국 사회가 주목하고 연구하는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가정이 된 몇 가지 비밀을 공개하였다.

첫째, ‘공부해라’가 아니라 ‘공부하자’
부부가 함께 공부하여 남편과 나란히 예일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고 나중에 고흥주 박사가 예일대학의 법대 학장이 되고 딸이 예일 법대 교수가 되면서 부모와 남매 4명이 예일대학의 교수 요원이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애들이 어려서부터 지하에 공부방을 만들어서 다 같이 둘러 앉아 공부했고 주말이면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생활화하였다. 새벽부터 한 밥상에 8식구가 삥 둘러앉았고 밤을 세워가면서 8개의 책상에 부모와 6남매가 마주 둘러 앉아 공부해 가는 ‘밥상 공동체’요 ‘책상 공동체’로 큰 6남매가 나중에 결혼하여 며느리 사위까지 12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명문가를 이루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그것이 다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귀한 것이다.

둘째, 대를 이은 가정교육(家庭敎育)
재승덕(才勝德) 즉 재주도 많아야 하지만 덕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교육의 강조가 적중한 것이다.
셋째, 모성애(母性愛)
전혜성 여사는 자기 자신이 8년 동안 박사 학위 공부를 계속하면서 6남매를 낳아 모유로 키웠다. 직접 자녀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옷을 만들어 입혀 가면서 오늘 날의 6남매를 키워 낸 열혈 어머니이다. 항상 전혜성 여사가 강조하는 것은 재주가 아무리 많아도 덕을 앞지르면 안 된다.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이다.
넷째, 한국인(韓國人)이라는 긍지(矜持)
그와 같은 이유에서 전혜성 여사는 앞장서서 예일 대학 안에 1985년에 동암 연구소라는 이름의 한국학 연구소를 개소해서 오늘 날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이 같은 가정교육의 바탕에 고, 강영우 박사가 그의 책 <도전과 기회 3C혁명>에서 강조하는 성공적인 3대 교육 지표는 ‘능력과 인격과 헌신’이다.(competence, character, commitment) 능력과 실력은 기본이고 인격적으로 원만하고 헌신적인 자질을 갖춘 인물로 키워내야 열방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은행의 총재가 된 의사인 다트머스대학 총장인 김용 박사나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꿈이 남 달랐다는 점이다. 저들은 서로 잘 되어서 남들을 섬기는 헌신적인 인물이 되는 게 꿈이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백악과 장애인 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나 국제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욱 박사는 모두가 다 남다른 꿈을 갖고 살아간 인물들이다. 저들의 꿈은 자기 출세하여 자기 한 사람 잘 지내자는 정도의 꿈이 아니었다.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준비하고 노력한 인물들이어야 제대로 오래도록 쓰임 받는다는 말이다.

인생은 꿈만 있으면 언제라도 청년처럼 살 수 있다. 노아는 500살에 꿈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노아 자신의 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이었다. 방주를 건설하는 꿈이었다. 노아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100년 세월을 투자하였다. 그리고 노아의 나이 600살에 홍수 심판을 겪었다. 방주 안에 살아남은 사람은 노아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포함한 여덟 식구뿐이었다. 그리고 350년을 더 살고 950살에 하나님 앞으로 갔다.

아브라함은 75살에 꿈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꿈이었다. 그렇게 출발하여 1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고 175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 때에 이삭을 주셨다. 그리고 아들 이삭이 40살에 장가들어 아내 리브가를 통하여 20년 후에 쌍둥이 손자인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에 아브라함의 연세는 160살이었다. 아브라함은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치는 목축업자요 족장이었다.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저들 주변에 양와 소를 치며 사는 족장들은 흔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꿈은 달랐다. 저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 가고 싶은 열망이 계승되던 가정이었다. 그런 믿음이 나중에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 꿈 많던 요셉에게 흘러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가나안과 애굽 지경에 흉년이 계속되던 대 재앙의 때에 야곱의 70명의 후손을 고센 땅에 정착 시킬수 있었던 장본인은 꿈의 소년 출신 요셉이었다. 야곱의 후손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피난했던 애굽에서 그렇게 시작해서 이스라엘이란 민족 공동체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요셉을 보라. 꿈은 팔리어 가도 꿈이다. 꿈은 노예 시장에 있어도 꿈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꿈이다. 꿈은 감옥에 갇혀도 꿈이고 배고프고 춥고 힘이 들고 답답해도 꿈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런 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세 시대와 여호수아 이후의 사사 시대를 거쳐서 다윗 시대로 이어진다. 

성경에 다윗의 고조할머니 라합이나 증조할머니 룻의 이름이나 일화는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다윗의 할머니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윗의 고조할아버지 살몬은 가나안을 마지막 정탐하던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는 나오미의 모압 며느리였던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이다. 그 보아스와 룻을 통하여 낳은 아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이신데 할머니에 관한 내용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이다. 이새는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의 막내아들이 다윗이다.

룻기 4장에 다윗의 족보가 잠시 언급된 이후로 다윗이 누구인가를 본격적으로 기록하는 장면은 사무엘 상 16장에서부터이다. 시대적으로는 사울 임금의 치정 40년의 말기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던 때였다. 사울 임금 말기에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이 있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나아가는 길을 막고 방해하던 아말렉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징벌하실 결심을 하셨다. 그러나 임금 사울은 인생과 짐승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고 죽이라는 하나님의 전쟁 명령을 경솔히 여겼다. 2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한 전쟁을 통해서 아말렉의 아각 왕을 사로잡아 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임금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왕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다.(삼상15:1-9)

이 사건은 하나님과 임금 사울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는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선언하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울왕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을 설명 들은 사무엘은 근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온 밤을 지내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기도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사무엘 선지자가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임금 사울을 만나러 왕궁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왕 사울은 그 때에 갈멜이란 지역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기 위하여 왕궁을 떠나있었다. 수소문해 보니 왕 사울이 길갈에 있다고 하여 사무엘은 그 곳을 찾아가서 임금 사울을 만났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자 “선지자께서는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내용을 임금에게 전해서 아말렉과 싸운 것은 맞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전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였나. 마침 그 때에 길갈에 끌어다 놓은 아말렉의 좋은 양과 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 사무엘 선지자의 질문 앞에 사울왕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좋은 양과 소를 살려 끌고 왔노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때에 사무엘은 지난밤에 하나님이 해 주신 말씀들을 차근차근 전달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의 작은 아이와 같던 사울을 나라의 임금 삼고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신 것이 누구냐고 물었다. 청년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은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라고 하셨고 그 전쟁을 이기도록 한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 “어찌하여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악하게 행동하였는가.”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임금 사울은 전혀 자책하는 마음과 태도가 없이 자신은 옳은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 때 사무엘이 임금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22)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서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전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 왕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사무엘은 사울 왕을 생각할 때마다 슬퍼하였고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였다.(삼상15:35)

이 후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감동하셔서 베들레헴의 이새 가정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택하여 기름 붓게 하셨다. 그런데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눈 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1절 끝에, “내가 그의 아들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3절 끝에,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고 했다.

여기에 자녀교육의 비밀이 담겨 있다.
부모가 자녀를 자기 욕심대로 키우려 하지 말고 한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고 주목하실 만한 아들딸로 키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그 말씀을 하실 당시의 다윗은 아버지 이새를 대신하고 걸핏하면 전쟁에 불려 나가는 일곱 명의 형들을 대신해서 늘 들판에서 양과 염소를 치던 목동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년 다윗을 그냥 목동 다윗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나라를 40년간 통치할 왕으로 보신 것이다.

그 소년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될 자로 선포된 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서 골리앗 장수를 물매돌 한 개로 쳐서 죽인 후에 전국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부녀자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할 정도의 유명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핍박과 미움과 시기와 불타는 증오심으로 인해서 십년이 훨씬 넘는 긴긴 세월을 다윗은 이리 피하고 저리 숨는 고난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본문은 다윗이 임금이 되기 전에 광야와 동굴로 피신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을 많이 하던 때에 고백한 시편 중의 하나이다. 비탄시라고도 하고 메시야 예언시라고도 한다. 다윗이 겪은 쓰라린 고난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메시아로 오셔서 당하실 고난을 예언하는 형식의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편이기도 하다. 그 중에 후반부인 본문을 통하여 오늘 날 우리는 어떤 자녀를 양육하여야 하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주를 향한 서원(誓願)이 분명한 인생.
청년 다윗은 어려서부터 늘 찬송 생활을 계속해 왔다. 지금 그렇게 어려운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25절에 보면 다윗은 자신의 찬송의 근거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만 찬송하며 살아가고자 서원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한 나절이면 자라나는 오이 같은 인생이 아니었다. 다윗은 처절한 고난 속에서 절규하듯이 광야에서 외치고 찬송하던 광야의 사람이었다. 시편 22편 1절을 보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절규하고 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요 찬송의 사람이요 삶과 죽음을 주님 앞에 맞기고 살아가던 서원이 있던 광야의 청년이었다. 시편 22편 2절에도 보라.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기도와 부르짖음과 간구 가운데 광야에서 피하고 동굴로 숨으며 지내던 청년 다윗은 밤낮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잠잠하고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찬송하며 경배하고 또 경배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 때가 되면 자신을 들어 쓰시리라는 분명한 믿음과 서원이 있었다. 다윗은 그러한 주를 향한 서원을 갚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다윗은 마치고 레위기 7장 15절과 16절의 말씀처럼 감사제로 드려지는 서원인생이요 온전히 드려지는 헌신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각오와 믿음이 분명하고 열망이 가득한 하나님이 지목하여 불려 내셔서 쓰시려고 준비하시던 청년이었다. 다윗은 어쩌다가 다윗이 된 인생이 아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이미 왕이 되기 전에 광야에 피신하고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에 그의 믿음 저 깊은 곳에 처절하게 배어 나온 하나님 신앙과 하나님께 서원을 갚고자 하는 분명한 신앙관이 있었던 청년이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성공해야 하는지 왜 열심히 발전해 가야 하는지 그 이유와 대답을 스스로 분명히 깨달아 아는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믿음도 좋아야 하지만 실력도 갈고 닦아야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별명이 연습벌레인데 하루에 19시간씩 발레 연습을 한 적도 있고 한 시즌에 토슈즈를 150여켤레씩 해트릴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의 그 역사적인 벨연구소의 소장이 된 김종훈 소장도 일 벌레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일주일에 120시간 이상씩 일을 했다고 한다. 그가 벤처 기업 사장 시절에는 상대방과 기업 상담을 하다가도 코를 골며 잠이 들어 버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들은 다 그렇다. 아티스트 백남준은 18살에 꿈을 안고 떠났다. 정명훈은 13살에 미국의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정명훈, 정명화, 정경화 저들 삼남매가 다 그런 노력과 열심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음악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정명훈 씨는 웬만한 연주의 악보는 통째로 외워서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서 지낸다고 한다. 박세리 양이 골프채 하나 달랑 메고 미국 땅을 밟을 때의 나이가 19살 이었다.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씨는 딸의 체력과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한 밤 중에 공동묘지에서 체력 훈련을 하게 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이다.

다윗은 비방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입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고 우습게 여기는 대적자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비난 앞에서 자신이 벌레처럼 취급을 받는 그 억울하고 답답한 날들을 부르짖는 기도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는 찬송으로 이겨내고 극복해 나갔다. 그럴 때마다 다윗의 마음에는 주를 향하여 갚아 드리려는 분명한 서원(誓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겸손(謙遜)히 여호와를 찾는 인생.
다윗은 겸손한 청년이었다. 고난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는 점점 하나님만 더욱 더 의지하는 겸손한 믿음을 붙들었다. 그는 고백한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22:26) 다윗의 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과 다윗처럼 피하고 쫓기고 숨어 지내야 하는 자들이 600명쯤은 되었다. 다윗은 들판에서 지내지만 저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감사의 떡을 더불어 먹고 더불어 마셨다. 그리고 언제라도 어떤 형편 속에서도 찬송을 계속하며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그런 중에서도 언제나 늘 영원(永遠)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그래서 그런 고백을 한 것이다. 26절 끝에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의 날과 청년의 때로부터 이 같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어디서나 겸손하고 무슨 일 앞에서나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씨름한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다. 오늘 날도 주변을 보라. 교만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인생들의 사건과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겸손하게 오래도록 존귀하게 하나님만 찬송하며 길이길이 쓰임 받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자자손손 대대(代代)로 주의 공의(公儀)를 소중히 여기는 인생.
최근 들어 해마다 강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공의’(公儀)에 관한 명제이다. 책이든 강의이든 무슨 강좌이든 공의, 즉 정의에 관한 명제가 가득하다. 왜 그런가. 공의가 사라지고 정의가 사라지는 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만이 천하만국의 대 주재이시다. 온 백성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절하고 예배하는 족속들로 나아와야만 한다. 청년 다윗은 비록 광야에 피신하며 마치 하나님께 버려진 것 같은 암울한 날들을 살아가면서도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족속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며 대대로 주를 전하는 날이 다가 오리라는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다윗의 이 같은 꿈은 1,0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심으로 완성되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찬송의 사람이요 겸손의 사람이요 공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31절의 ‘공의’란 ‘의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22편 1절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을 것 같은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믿는 공의의 선언으로 고백을 마치고 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다. 다윗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가 실현되고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고 선포할 순간이 다가 올 것을 믿었다. 이런 믿음의 인재들을 낳아 양육하는 믿음 승리의 가정을 이룩하자.

금번에 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 강좌를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박사의 3번의 강좌 중에서 두 번째 강좌의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 정의, 평화’ 이 세 가지 주제 중의 하나가 정의 즉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정의는 사랑보다 더 합리적이다. 정의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게 만들며,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다. 정의는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열쇠다. 불의는 인간을 화나게 만들고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역사는 정의를 위해서 혁명과 전쟁이 계속된다.”고 했다. 그리고 말라기 4장 2절의 ‘의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하나님의 정의는 “위험으로부터 건지시고, 상처를 치유하시고, 폭력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공의를 세우시며 정의로운 창조가 가능하게 하신다.”고 설명했다. 3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가난한 자를 배부르게 하시고 억압 받는 자를 자유하게 하시는 공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 교육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성경적인 가치들을 숭고하게 여기며 살아갈 줄 아는 그런 복음적인 인재들을 키워내는 가정과 교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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