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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자랑하리라(살후1:1-4)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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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0-31 02:58 조회 4,055 댓글 0
 

                     감사하며 자랑하리라(살후1:1-4)         2020. 10. 30  마틴루터 종교 개혁 505주년 기념주일

 

 

505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 예배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한 날이다. 그 당시의 교회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천주교 하나 뿐이었다. 오늘 날의 신교와 구교로 나누이기 이전의 모습이었다. 그 당시 교회 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는가 하는 것을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우리는 해마다 이 때가 되면 마틴 루터를 생각한다. 

 

마틴 루터는 독일(작센안할트 주의 아인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부였지만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아들 마틴은 아버지의 격려 가운데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1502년 그는 19살 때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한스 루터의 기대를 뒤로 하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가 만년에 쓴 <식탁 담화>(Tischreden)에서 그 이유를 약간 밝혀놓았다. 고향 집에 다녀오던 그는 슈토테른하임 근처에서 친구가 벼락을 맞아 숨졌다. 천둥 번개에 놀란 그는 "성 안나여, 저를 도우시면 수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외쳤다. 무사히 학교로 돌아간 그는 당시의 말을 지키기 위해 수사가 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수사 서원을 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24살 때인, 1507년 5월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 후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들어가 1512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성직자가 된 루터는 행복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로마를 여행하면서 본 종교의 부패는 이미 그 도를 넘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란 자신의 죄를 탕감받는 일종의 증명서로 헌금을 통해 이를 구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헌금을 통한 구원의 강조였다.

 

당시 기독교는 단식이나 순례, 면죄부 구입 등의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진실한 신앙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오직 깊은 신앙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무리 다른 선행을 한다 해도 독실한 신앙심이 없으면 파멸로부터 구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간자로서의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교황청을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오늘, 마틴 루터 종교 개혁 기념 주일에 읽은 본문인 데살로니가 후서 1장의 서두에 보면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어떠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있었기에 항상 감사하고 여러 교회에서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더욱 자라나는 믿음.

3절에 보면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17장의 앞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세 안식일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행17:2-4)라고 하였다. 세 주 동안의 길지 않은 기간에 적지 않은 신자들이 탄생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서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고 성 안에 소동을 일으켰다. 바울과 선교 일행이 머물던 야손의 집에 침입해서 선교단 일행을 백성들 앞에 끌어내려고 까지 하였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그 밤에 급하게 베뢰아로 피신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후로 바울은 이곳 지곳을 다니며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얼마의 세월이 흐르며 데살로니가 지역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주변에 점점 좋은 소문으로 번져 가게 되었다. 반면에 저들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에 오류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러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가르침을 전한 편지가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의 주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표현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 나온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는 칭찬 말이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행한 일’이란 뜻이다. 맞다. 신앙생활이란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근거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그 어느 것 하나만 강조해서도 않된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의 강조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지만 사랑 안에 믿음이 믿음과 더불어 소망이, 소망 중에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당신은 언제부터 믿음 생활을 시작하였는가. 언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죄 사함의 복음이 믿어지게 되었는가. 누구를 통해서인가. 누가 당신에게 이 복음을 전하였는가. 어떻게 그 복음이 받아들여졌는가. 그 복음의 씨앗이 내 마음에 어떻게 자리 잡고 오늘날까지 그 믿음이 자라나게 되었는가.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 성에 삭개오란 이름을 가진 세리장이 있었다. 그는 부자였다. 요즘은 남의 외모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데 그 당시에는 세리장의 외모에 대한 기록도 있다. 누가복음 19장 3절에 보면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여리고 성에 예수께서 들어가셨다. 소문을 들은 성민들이 예수를 만나 보려고 몰려갔다. 삭게오도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달려가서 예수가 지나가실 것 같은 길 목의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우리가 어려서는 나무 위에 잘 기어 올랐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무 위에 올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 갔다. 예수를 만나 보고 싶은 열망이 아니었다면 쉬운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예수께서 그 돌무화과 나무 아래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나무 위를 쳐다 보시며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이 장면이 삭개오에게 예수를 향한 믿음이 영접되는 순간이다. 뭇 사람이 보고 수근거렸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향해서 말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9-10)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여기까지의 장면 이후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이날 예수를 만나 신앙을 고백한 후에 그의 믿음이 날로 점점 자라났을 것이다. 여리고 성에 예배당도 지었을 것이다. 그 많은 재산을 정리해서 선한 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구제도 하고 선교에도 앞장섰을 것이다. 수많은 복음의 사람들과 더불어 복음이 확장되는 일에 매진하였을 것이다. 그의 믿음은 해마다 점점 자라났을 것이다. 

 

어린 묘목을 심어 놓으면 해마다 자라난다. 교회 옥상에 정원을 꾸미며 9년 전에 심었던 작은 꽃나무들이 해마다 얼마나 무성하게 자라나는지 모른다. 이번 가을에는 짧게 잘라내는 전지작업을 했다. 몇 해동안 친히 자비량으로 섬겨 주신 권사님이 있다. 올해도 소문에 듣고 자비량으로 조경사를 불러서 전지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내년 봄이면 또 싹이 나고 잎이 피어오르고 꽃이 만발할 것이다. 뿌리가 살아있고 줄기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계속하여 자라나게 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뿐만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기고 가는 곳마다 저들의 믿음 성장을 자랑하고 다녔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7절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라고 칭찬하였다. “어떻게 저들이 우상을 버렸는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지” 저들의 믿음이 각처에 소문이 났다.

 

믿음으로 살자. 믿음이 전부다. 믿음이 대답이다. 믿음이 힘이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의 믿음의 그의 신앙 선배들의 믿음에 이어서 종교개혁의 거룩한 불씨가 되었다. 우리 각 사람이 그런 건강하고 균형있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하자. 

 

<주 믿는 사람 일어나>라는 357장 찬송가의 후렴에 보면,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라고 찬송하지 않나. 포스트코로나, 위드코로나 시대에 불어 닥친 고금리, 고물가의 경제 불안과 위기의 시대 속에 버티며 견디며 살아가야 할 우리 각 사람의 범사에 주께서 견고하고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시기를 축원한다.  

 

 

풍성한 사랑.

오늘 본문 3절 끝에 보면“너희가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사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 사랑에는 힘이 있다. 사랑에는 에너지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거한 증표요 열매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각색 병자를 고치셨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셔서 건강한 새사람으로 살게 하셨다.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셨다. 심지어는 죽은 자라도 살리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사랑을 실천하셨다. 예수는 계속하여 비유의 말씀으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다. 왜냐하면 모든백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풍성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그 소문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가는 곳마다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도 서로 서로 사랑하며 돌보며 섬기며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자랑은 세상적인 가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풍성해져 가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자랑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육십대 초반에 할아버지가 된 누군가가 집 자랑을 했다. 일산의 넓은 아파트 22층에서 산다고 했다. 한강이 바라보인다고 했다. 얼마나 집안이 넓은지 세 살 된 손자가 집 안에서 세발 자전거에 네비게이션을 달고 이 방 저방을 찾아 다닌다고 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서 엄마 아빠방, 할아버지 할머니방 그러면서 들락거린다고 했다. 돈 자랑, 재물 자랑, 차 자랑, 패물 자랑, 학벌 자랑, 외모 자랑, 지위 자랑, 권력 자랑, 신분 자랑, 자식 자랑 등등 뭐 세상 사람들로 하면 별의 별 자랑을 다 하며 살 것이다. 세상 것도 자랑할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자랑할만한 것이 세상에 있는가. 없다. 

 

오직 믿음의 사람의 자랑거리는 예수 자랑, 믿음 자랑,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 자랑, 예수 안에 참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 자랑, 환난과 핍박이라도 넉넉히 견뎌 내고 이기며 살아가는 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만족해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생활하는 집이 아파트이든 개인 주택이든 도시가스나 전기나 상수도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모든 혜택을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 사랑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풍성한 공급은 이런 원리이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신다. 해와 달과 별들의 우주 공간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80억 인구가 그 모든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의 밭에 해와 비를 골고루 비추어 주시고 내려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공중의 새와 땅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와 뛰어다니는 각종 동물과 물속의 각종 물고기도 다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도 사랑하신다. 예수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염려와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버리고 서로 풍성한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이시다.

 

산상 수훈인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분명하게 교훈해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25-34)

 

요즘처럼 극악한 범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악한 시대에 서로를 돌아보아 풍성한 사랑을 회복해 가는데 앞장서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박해와 환난을 견디는 인내.

4절에 보면 그 당시에는 점점 박해와 환난이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 모든 박해를 잘 견디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나갔다. 그런 소문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항상 감사했고 곳곳의 여러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자랑하며 다녔다.

 

우리의 자랑은 이러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환경은 박해나 환난의 시대는 아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나라와 민족에 따라서는 이에 버금가는 박해와 환난이 없지 않다. 오늘날 북한 땅의 지하 교회 성도들이 겪는 박해와 환난은 심각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신앙생활이란 그런 정도가 아니다. 물론 코로나19 방역 기간에 교회가 당한 부당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린 그런 정도를 박해나 환난 이란 용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억해 보라. 사도행전으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겪고 당한 핍박과 환난은 이루 다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 스스로 예수를 버리고 떠난 가롯유다의 불행 말고는 모든 사도들이 다 순교의 길을 갔다. 요한 사도의 장수 말고는 맛디아로 충원된 12제자의 나중은 모두가 다 순교 당하였다. 사도 바울도 목 베임을 당하고 순교했다. 베드로는 로마 선교 현장에서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러시아 지역 선교에 앞장서다가 붙잡혔다. X자형 십자가에 꽁꽁 묶인채 사흘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숨졌다. 죽어 가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 지고있다. 세베대의 아들로 야고보의 형제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와 계시록을 썼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에베소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던 그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때에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졌는데도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남은 생을 밧모 섬에 유배되어 지내면서 계시록을 썼다.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살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요한의 형제인 제자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보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이 순교한 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일어났다. 당시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직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서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야고보가 형장으로 끌려 나올 때 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던 사람이 형 집행 장소까지 함께 걸어갔는데 야고보의 얼굴이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기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래서 그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나섰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같은 칼로 목 베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그의 원이름은 나다나엘이다(요1:43~51). 바돌로매는 소아시아 지방인 프리기아와 리카오니아 등지를 거쳐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의 알팍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교 사제들의 선동을 받은 이방 왕에 의해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고문을 받았다. 그 후 오랫동안 잔인하게 폭행을 당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머리가 베어져 순교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일이 사도들의 순교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시간이 부족하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도 교황청과 교황에 의해서 사제직에서 파문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형편이 되었다. 계속해서 살해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지켜 내려는 지지자들의 열심에 의해서 발트부르크 성 안에 숨겨져서 지냈다. 거기 머무는 동안에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말 성경으로 번역하는 대작업을 이룩하였다. 

 

우리는 이즈음에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목이 잘려 쟁반 위에 담겼다. 잔치 자리에 그의 죽임을 당한 사실이 공개되었다. 예수께서는 양손과 양 발이 십자가 위에서 대 못에 박혔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넣었다. 심장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모두 다 골고다 언덕 위에 쏟아 부었다.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로마 시대의 핍박기에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맹수의 먹잇감으로 죽어 갔다. 옥에 갇히고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무엇이기에 순교를 각오하고 환난과 박해를 견디고 인내하는 것일까. 당신은 어떤가. 당신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은 왜 믿음으로 사는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 라는 336장 찬송을 의미심장하게 부를 만한 주인공이 우리 가운데 있는가. 이 찬송가의 3절에 보면 이렇게 찬송한다. 

 

“성도의 신앙 본 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505년 전 한 사람, 마틴 루터를 통하여 불이 붙여진 종교 개혁 정신을 본받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의 5대 강령>은 이것이다.

 

오직 성경/Sole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이런 은혜와 도우심이 우리 각 사람의 평생의 믿음과 후손들의 믿음으로 이어져 가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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