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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16)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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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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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0-02 00:40 조회 5,798 댓글 0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16)         2022. 9. 25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이란 이 표현은 구약 시대 때에 모세(신33:1)나 다윗(대하8:14)을 부르던 칭호이다. 물론 선지자들에게도 이 칭호를 썼다. 사무엘(삼상9:6)이나 엘리사(왕하4:16)에게서도 이런 호칭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그 은혜와 그 사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유익을 깨달아 알고 믿으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편지인 디모데 전서를 마무리 하면서 몇가지 주제의 교훈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모두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읽은 오늘 말씀 가운데에 보면 “피하라, 따르라, 싸우라, 취하라, 지키라,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라”는 등의 명령어를 계속하여 사용하고 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하며 살아가라는 명령인가. 그 중에서 몇가지만 묶어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피하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것들’이란 무엇일까. 그 앞 부분을 읽어 보면 디모데전서 1장부터 강조한 영지주의나 지나친 율법주의 이단을 경계하고 저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강조이다. 디모데전서 1장 3절에 보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1장 4절에 보면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자’들이 있었다. 1장 6절에 보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저들의 특징에 대하여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이것들을 피하고’라는 것들은 디모데 전서 6장 3절의 ‘다른 교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다른 교훈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특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디모데전서 6장 4-5절은 피해야  하는 ‘다른 교훈’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의 실상을 낱낱이 거론하고 있다.

그는 교만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난다.

저들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이다.

저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저들 곁에는 계속해서 다툼이 일어난다.

그들은 돈을 사랑한다. 그러한 탐심의 결과로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는” 파멸과 멸망에 이르고 만다. 

 

그렇지 않나 그 당시나 오는 날이나 이단과 사이비의 끝을 보라.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의 나중을 보라. 부끄러움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의문사 당하기도 하고 참담한 결과를 맺고 만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단과 사이비들을 피하라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똥이 더러워서 치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할 수만 있으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과 궤계를 피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따르라.

‘피하라’는 것이 소극적인 행동 명령이라면 ‘따르라’는 명령은 적극적인 행동 명령이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매우 소상하게 교훈하고 있다. 여섯 가지의 주제로 교훈하였다. 차례대로 묵상해 보자.

 

첫째, 의(義)를 따르라.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말씀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덧입고 그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을 말씀한다. 

 

둘째, 경건(敬虔)을 따르라.

경건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씀한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었으면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가꾸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이다. 그러나 경건이란 것도 자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성도로 하여금 경건해 져 가도록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면 마지막에는 멸망받고 말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3절의 말씀처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선언하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반복적으로 경건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보면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경건하지 아니한 자”라고 하였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는‘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 부활의 영광과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경건의 비밀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4장 7절에서는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분부하였다. 디모데 전서 6장에 와서 보면 3, 4, 5절에서 구절마다 ‘경건’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경건의 큰 이익을 깨닫는 자들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단의 특징은 3-4절에,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고 교만한 자’라고 하였다. 5절에 보면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이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피하고 ‘경건’을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믿음을 따르라.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성도라면 평생토록 하나님께 자신의 범사를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수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 자주 사용하신 강조가 무엇인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본적이 없도다.”이처럼 다 믿음에 관한 주제로 칭찬도 하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셨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교훈하였다. 

넷째, 사랑을 따르라.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 주셔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활짝 열어 놓으신 천국 백성의 사명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아 덧입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어저께 감리교 감독 선거가 있었다. 서울 연회는 종교교회가 투표장이었다. 교회 1층 현관 안내 테이블에 ‘네팔 진아학교 건축 안내’브로셔가 있었다. 박진아(1991-2018) 자매는 27살 청년 때에 네팔 단기 선교를 떠났다가 현지에서 숨졌다. 안타깝고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오늘 날 그의 부모의 뜻을 받들어 네팔에는 ‘진아 학교’가 건축되고 있다. 유치원 교사 자격을 취득했던 박진아 자매는 27살 젊은 날 이 세상을 떠났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선교 현지에 그 사랑을 실천해 나가던 청년 박진아 자매의 신앙 정신은 4년이 지난 지금 네팔 땅의 450평 대지 위에 교실 22개가 지어지는 2층 학교인 ‘네팔 진아 학교’가 건축되는 것으로 다시 꽃 피우고 있다. 12학년 제의 초중고등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까지에 보면 예수께서는“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친히 강조하셨다. 요한일서 4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다. 

 

다섯째, 인내(忍耐)를 따르라.

여기서 인내란 무조건 참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따르는 경건한 신앙 생활을 위하여 그 어떤 역경과 환난을 겪을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게 믿음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을 일컫는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5장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교훈할 때에도 ‘오래 참음’을 강조하였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라고 박해와 환난을 극복하는 ‘인내’의 가치를 높인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서 5장 3-4절에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앎이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 12장 1-2절에 보면 “모든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하고 있다. 야고보서 1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라고 인내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여섯째, 온유(溫柔)를 따르라.

온유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 받아서 서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마음 가짐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라고 교훈하셨다. 디도서 3장 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라고 교훈하였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팔복 말씀 중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교훈하셨다. 

 

 

취하라.

물론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생을 보장받은 자다운 삶을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히브리서 10장 29절에 보면 그런 강조와 경고의 말씀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하고 누리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14절 끝에 보면 “이 명령을 지키라”라고 하였다. 20절에도 보면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취하는 성도의 삶을 평생토록 치우침이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만 한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권면하였다. 맞다. 성도란 평생동안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어야 한다. 여기서 ‘싸움’이란 ‘상을 받기 위해서 경쟁하라’는 뜻이다. 올림픽 경기가 끝나면 각 분야의 선수들이 다시 4년 후에 다가올 경기를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며 훈련에 몰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4장 7절에서 자신의 믿음을 회상하고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이다. 

찬송가 349장 <나는 예수 따라가는>의 3절 가사에 보면,

 

그 승리의 영광 위해 싸워야하리라.

주 말씀 나의 힘되니 겁낼 것 없도다

모든 싸움 이긴 후에 그 날이 이르면

승전가 높이 부르며 큰 영광 누리리

 

라고 찬양하고 있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다. 선과 악의 싸움, 진리와 거짓의 싸움, 의와 불의의 싸움이 계속된다.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계속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늘 싸우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사탄 마귀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언제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다.

이를 위하여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4절에서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러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른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또박 또박 짚어 주고 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복되신 하나님.

유일하신 주권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라고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디모데가 살아온 지난 날을 칭찬하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12절과 13절을 보자.

 

12절의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라고 칭찬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한 증언’이란 그 동안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영접한 후에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온 증거를 칭찬하는 말이다. 또한 1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신”분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과거나 오늘 날이나 세상에는 본디오 빌라도 같은 이들이 많다. 본디오 빌라도 같은 권세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한 불의하고 편협된 세상에서 선한 증언을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닮아 살아가려는 삶이 곧 경건한 삶이며 의를 쫓는 삶인 것이다. 본디로 빌라도(재위 AD26-36)는 예수께 십자가 사형을 언도한 후에 사마리아 지역 주민을 학살한 적이 있다. 그 후 황제에게 소환되었고 총독직을 박탈당했다. 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과 회개하고 예수 믿다가 순교했다는 설이 전해 온다.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Procla, 마27:19)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예수의 숨은 제자였다고 전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동행 하심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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