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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렘1:4-10)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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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8-22 23:18 조회 4,607 댓글 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렘1:4-10)         2022. 8. 21

 

 

‘예레미야’의 이름은 ‘여호와가 높이신다, 여호와가 일으키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Jeremiah)라고 쓰지만 보통 이름으로 부를 때에는‘Jeremy’라고 부른다. 독일 이름 중에 ‘빌헤름’이 예레미야이다. 1986년에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 <미션>(MISSION)의 가브리엘 신부 역을 맡은 배우 이름이 제리미 아이언스(Jeremy Irons)이다. 그의 이름 제레미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가 누구인가. 그는 예루살렘에서 10리 쯤 떨어진 ‘아나돗’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다. 그 당시의 왕은 남 유다의 악하기로 유명한 므낫세(BC 697-642)의 통치 시기였다. 예레미야는 20살 즈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요시야 13년 째 되던 해이다.(BC 627) 우리가 아는대로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 책을 중심으로 종교 개혁에 앞장 섰던 왕이다. 므낫세나 암몬이 우상을 숭배하던 흔적을 없애 버렸다. 이방 신을 숭배하던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모조리 철거해 버렸다. 요시야 왕이 애굽의 왕 느고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에 예레미야는 애개를 지어 그의 죽음을 마음을 모아서 애도하였다. 역대하 35장 25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퍼 노래하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성경의 내용을 대할때에 우리는 요시야 왕 당시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국가적인 입자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점점 쇠락해 가던 때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로 이어지는 남 유다의 마지막 시대의 여러 왕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결같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일관되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남 유다의 운명을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국 유다는 시드기야 왕의 때를 끝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지 않나. 들어서 알고 깨달은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여 준행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입어 넣어야 짜다”는 교훈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지자란 시대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자들이다. 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라고 하였는데 과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나. 오늘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 기울여 들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명하는 대로 순종하라.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기 전부터 너를 알았다. 어머니의 태에서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성별하였다.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 라고 말씀하셨다. 6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자신을 선지자로 택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쁨으로 받아 들이지 못했다. 기뻐하기는커녕 슬퍼하며 부르심을 거역하였다. 자신은 누구 앞에 나서서 제대로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라고 대답하였다. 마치도 호렙산에서 양 떼를 몰던 연세 팔십세 되던 해의 모세의 반응과 흡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주저하는 반응을 배려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사명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7)라고 분부하셨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우리 각 사람이 거창하게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주를 믿는 성도들의 범사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나의 시간과 나의 건강과 나의 경험과 나의 범사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요즘 우리가 창세기를 묵상해 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에 대하여 나눌 것이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그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다. 그는 우상 숭배자였던 데라의 세 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 아브람의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람에게 찾아가셨다. 아브람을 만나신 하나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2장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고, 만나라고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만나는 것이 순종이다. 하라고 하는 말씀을 가감 없이 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렇지 않나.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모세가 그러하고 사무엘이 그러하였다. 수많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공통된  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점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아브람의 부르심에 대한 첫 응답은 ‘말씀을 따라 갔고’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아브라함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준행하지는 못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첫 사건이 창세기 12장 10절에 나오는 가나안에서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이다. 가나안 지역에 들어간 아브람이 거주하던 곳은 서쪽은 벧엘이고 동쪽은 아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가진 중간 지대였다. 그런데 그 곳에 기근이 들었다. 수 많은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와 약대를 목축하던 아브람에게 있어서 기근이란 사람과 짐승 떼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살아 남으려고 애굽행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기록이 전혀 없다. 자신의 결정대로 애굽행을 추진한 것이다. 거기서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수모를 겪었다. 

 

오늘 날,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떤 생을 살아 왔는가. 나는 앞으로 어떤 생을 살아가고 싶은가. 이는 젊은이나 노인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증거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의 동양 사람들도 그런 진리는 깨달아 알았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그 인생이 흥왕하게 되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망한다고 가르쳤다.

 

“순천자흥 역천자망”

(順天者興 逆天者亡)

 

이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천명편(天命篇)에 나오는 맹자의 교훈이다. 

 

성경에는 순종에 대하여 교훈하는 말씀이 수도 없이 나온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당시의 왕 사울을 향하여“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일갈하였다. 신명기 13장 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라고 하였다. 

 

우리는 끊임이 없이 새로운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다. 지리적으로도 새로운 곳, 일로 해도 새로운 일, 사람으로 해도 새로운 사람을 대하며 계속하여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롯유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지 못했다.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주님을 팔아 버리고 떠나갔다. 피밭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겔다마에서 불행하게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때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이나 내 생각을 사로 잡는 마귀의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고 나를 향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야만 한다. 

 

요나서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그 배에 올랐다. 풍랑 속에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큰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을 버티며 살아남았다. 하나님은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 기도하는 요나를 다시 육지로 토해 내게 하셨다.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의 수도인 거대한 도시 니느웨 성민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순종의 길을 걷게 하셨다.

 

신앙 생활이란 우리 각 사람을 향해서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며, 하라고 하시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순종하며 감당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이다. 예레미야는 사람 듣기에 좋은 말만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장차 예루사렘과 유다의 멸명을 예언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예레미야 37장 8절에 보면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라는 예언까지도 감히 하였다. 결국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붙잡고 때려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 당시에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신하를 비밀리에 옥에 보내서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왕 시드기야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비밀히 물었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예레미야가 대답하였다. “있나이다.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렘37:17) 이런 예언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왕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못하고 불행한 역사의 길을 가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는 나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분별력 있게 듣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순종의 지혜가 충만한 주인공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구원하리라.

예레미야는 외롭고 고독한 선지자였다. 20대의 청년기에 부름을 받아 50년간 이어진 선지자로서의 그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끊임이 없었다. 미움을 받아야 했고 멸시와 시기를 받아야만 했다.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남 유다가 멸망하고 동족에게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고난을 딛고 예레미야는 끝까지 존귀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 선지자였다. 예레미야를 부르신 부르심은 너무나도 분명하였다. 하나님은 장차 그가 선지자로 쓰임을 받는 과정에 겪을 어려운 순간들을 지금 예레미야 1장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맞다. 신앙생활이란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깨닫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라. 지난 이천년 교회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주님의 사람들을 보라. 한결 같은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파도처럼 엄습하는 고난과 시련을 그 때 그 때마다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 가운데 극복하며 이겨 나갔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나. 모세를 보고 사무엘을 보고 다윗을 보라. 사무엘은 물론이지만 모세도 선지자요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선지자요 다윗도 선지자였다. 신명기 34장 10절에 보면 모세를 선지자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15장 20절에 보면 미리암을 선지자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장 30절의 베드로의 설교에 보면 다윗도 선지자라고 하였다. 

 

선지자는 말씀의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 안에서 선지자답게 살아가야만 하는 선지자성을 주셨다. 이 거룩한 부담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가정에서든지, 일터에서든지, 사회생활을 하는 그 어느 시간의 그 어느 장소에서든지 나 자신이 늘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우리는 수 없는 사고와 사건과 각양 문제투성이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에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인 우리의 분명한 신앙 고백은 이것이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셔서 자녀 삼아 주신다.매 순간 마다 성령 안에서 죄와 악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150장 찬송가 <갈보리 산 위에>의 후렴 가사가 무엇인가.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런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지난 수요일 예배시간 설교 중에 한희성 전도사는 아파트 단지 어디에서 토요 전도 현장에서 만난 한 부인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아들을 왜 앞서 데려 가시고 내 남편을 이렇게 앞서 불러 가셨단 말이냐”는 탄식을 듣고 할 말을 잃었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 밤에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런 묵상이 생각났다. “그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야기이네”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일찍이 사별하였다. 예수에게는 마리아가 낳은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그 중에 두 명이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이고 유다서를 쓴 유다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남편을 일찍이 잃었다. 그리고 나이 33살된 아들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성경 역사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의 마리아의 나이가 46살이나 48살 쯤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했고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사렛의 가난한 가정이었던 마리아의 부모는 마을의 나이 든 총각 요셉과 정혼하게 해서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남편도 일찍 잃고 아들 예수도 일찍 잃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역사에 불행한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인 친족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 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2)라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큰 소리로 외쳐서 말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당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이런 은혜와 위로와 산 소망이 늘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흥망성쇠의 주인이신 주님께 쓰임을 받으라.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시며 넘어뜨리시거나 허물어 버리시기도 하신다. 건설하시기도 하시고 파괴하시기도 하신다. 심기도 하시고 뽑아 버리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면서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운다”라고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를 통해서 인간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한 나라가 세워지거나 멸망하는 일, 한 나라의 왕이 세움 받거나 폐위되는 일들을 여러 번 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레미야 1장 10절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들을‘네가 그것들을..... 하였느니라’고 미래 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맞다.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것이다. 흥망성쇠가 내 안에 계신 그 분을 통해서 그 분의 손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마치도 주님이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라도 그의 손길로 다루신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한 나라에 왕이 세워지거나 왕이 폐위되는 것도 그의 손길로 다루신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10절을 자세히 보면 뽑다. 파괴하다. 파멸하다. 넘어뜨리다. 이처럼 심판의 용어가 네 번 먼저 나왔다. 그리고 뒤에 건설하다. 심게 하다. 이처럼 회복과 구원의 용어가 두 번 나왔다. 혹자들은 이를 해석하기를 갑절로 심각한 심판 후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분명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예언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뽑기도 하시며 심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시기도 하시지만 든든하게 세우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을지라도 분명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죄와 악을 멀리하며 살아가자.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뜻을 깨달아 믿고 따르자. 영원한 구원의 승리를 선물로 받아 누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나라나 왕을 넘어뜨리고 파괴하고 파멸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의 땅에 끌려간 언약 백성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고 예배하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주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영생 복락을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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