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숨었던 비겁쟁이 베드로가 변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성질이 하도 급하여 ‘벼락의 아들’이란 별명인 ‘보아너게’라고 불리어지던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는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였기에 인정하지 않으려 하던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인도와 스리랑카 지역까지 멀리 복음을 전파한 흔적이 지금도 전해 내려온다. 그 무엇보다도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성으로 가는 길에서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변화를 받았다. 핍박자 사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 선교를 대표하는 위대한 선교사가 된 것은 한 개인을 부르셔서 선교의 사람으로 삼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4세기의 탕자 어거스틴을 부르셔서 성자 어거스틴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독일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를 92년 간 이 세상을 살아간 수도자로 부르셔서 평생을 수도원 중심의 삶을 살게 하셨다. 그는 평생을 아그네텐 베르그 수도원에서 지냈다.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청빈, 정결, 복종의 삶을 서로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공유하고 날마다 노동에 의하여 그 날 그 날 자기 먹을 양식을 마련하였다. 책을 베껴 쓰는 사본(寫本)과 제본과 인쇄를 비롯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책도 후학들을 위한 경건 생활의 모범을 전해주는 책으로 쓴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부르심은 존 칼뱅이나 1517년의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고 오늘 날 세계 속에 감리교회를 탄생시킨 요한 웨슬리 목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는 친가와 외가 모두 조부 때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영국 국교회의 목회자 가정이었다. 그는 엡옷의 목사관에 불이 나서 6살 때에 죽을 뻔한 경험도 하였다. 그런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믿음을 키웠고 학업과 목회자 수업을 병행하여 22살의 이른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해부터 날마다 쓰기 시작한 그의 일기는 88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이어졌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그 다음 해인 23살 때에 링컨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다. 그가 26살 때에 동생인 찰스 웨슬리를 비롯한 몇몇이 시작한 ‘Holy Club'이란 성경 공부 운동은 오늘 날의 감리교회로 자라나는 첫 시작이 되었다. 3년 간의 미국 사바나 조지아 주의 원주민 선교 실패를 뒤로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요한 웨슬리는 35살이던 1738년 5월 24일에 올더스케잇의 회심을 체험하면서 본격적인 요한 웨슬리의 선교 역사가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모든 일과 사건의 배후에는 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히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개화 초기의 수많은 복음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이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는 1905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감리교회 선교를 위해 남편인 로버트 샤프(Robert Arthur Sharp) 목사와 함께 선교에 힘썼다. 현재 공주영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영명학교를 설립하였고 강경의 만동여학교를 세웠다. 남편 샤프 선교사가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논산과 강경 지역 순회 전도를 마치고 공주로 돌아가는 길에 눈보라를 피하여 묵어가기 위하여 들어갔던 상여 집에서 전염이 된 장티프스에 감염되어 34살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그의 부인은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교회와 영아육아원과 학교를 세워서 감리교회 선교활동과 교육선교에 열심을 다하였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한 그는 어렵게 지내는 구한말 시대의 소녀들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들 중에는 삼일 독립 운동의 순교자인 유관순과 월곡동 지역에 세워진 인덕대학교의 설립자인 박인덕 여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샤프 부인은 논산읍내에 1909년 영화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진광남학교는 1913년에 폐교되었다. 1928년에도 예배당을 세워 강경, 연산, 은진, 노성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회 복지 활동과 유치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땅의 70억이 넘는 인생을 창조하신 인생의 주인이시다. 그러하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 개인에 대한 대소사를 관장하시고 주장하시고 섭리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신앙적인 신비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취하고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살아갈 줄 알게 된다.
한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나서 살다가 가는 인생은 단 하나 사람도 없다. 모든 인생은 그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태어나고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그 모든 것 즉 인종적인 선택이나 지리적인 선택이 자기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 않는가. 이는 오늘 날 우리 모든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까지 살아가는 것, 남자라 태어난 것 혹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 등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어진 나의 운명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의 천부장이 앞장 선 군대 안으로 끌려 들어간 후에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말로 변증을 시작하였는데 폭력을 행사하며 사도 바울을 금방 죽여 없앨 것처럼 달려들던 무리들이 조용해 졌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와 어떤 환경 속에서 나서 자랐고 무슨 공부를 하였으면 어떤 생의 체험 가운데 살아 왔는지를 차근차근 간증할 시간을 가졌다. 사도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부모의 환경 아래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라는 도시는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등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도 경제력과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는 출생 배경이나 가정환경이나 성장 환경에 대하여 남과 비교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나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선택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고”(요15:16)고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배움의 소중한 기회.
인간은 교육적인 동물이다. 소나 말과 같은 짐승들은 어미 소나 어미 말을 따라 다니면서 본능적인 것들을 익혀서 살아가지만 사람은 교육과 학습에 의해서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생리현상이나 본능적인 것이야 배우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세상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인품과 성품과 자질과 됨됨이를 비롯하여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신앙적인 가르침과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세상의 학문도 어려서 일찍부터 습득하여야 좋은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배우고 만나는 신앙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교육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의 신앙에 대하여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고 칭찬하였다. 물론 자기 당대에 예수를 잘 믿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큰 역사를 이루는 인물들도 없지 않다.
노원구 상계동에 가면 꽃동산 교회가 있다. 김종준 목사는 1954년 전남 무안군의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우연찮게 ‘교회학교’에 참석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혈혈단신 상경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는 고난의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 고난과 역경의 파도를 이겨낸 시골 소년의 신앙 스토리는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어린이전문목회’ 스토리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독학으로 총신대와 총신대신대원을 졸업하고 어린이는 아예 신자로 취급받지도 못하던 풍토에서, 어린이 중심 교회인 꽃동산교회를 상계동 허허벌판에 개척하였다.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이 자기와 같은 불행을 다시 겪지 않게 하여야겠다는 믿음과 의지를 갖고 1988년에 서울의 변두리였던 상계동에 개척한 꽃동산 교회는 “어린이 선교를 통한 세계 복음화”의 꿈을 이루었다. 오늘 날은 교회학교의 부흥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주일날이면 11,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집사, 권사, 장로 등 임원만도 4,300명도 더 되는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어린이만도 5,000명 넘게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김종준 목사는 그동안 많은 어린 영혼들을 여름 캠프장에서 회심시켰고, 전국 교사강습회를 통해 수많은 교사들에게 이론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발하는 뜨거운 사명감을 고취시켜 왔다. 그는 모양만 내는 교육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고 곧 회심(悔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복음 전도자이다.
강원도에 사는 70대 할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손자손녀들과 함께 공부하는 장면을 T. V에서 보았다. 그 분은 앞으로 할 수 있으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 과정도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다. 공부란 것은 그런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엄격한 율법의 교훈’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되는 ‘가말리엘’이란 인물은 바리새파 중에서도 진보주의 파로 통하는 힐렐(Hilel)학파의 대표자격인 힐렐의 손자이다. 그는 ‘나의 선생’이란 뜻의 ‘랍비’보다 더 높은 칭호인 ‘우리의 선생’이란 뜻의 ‘라반’이란 칭호를 받은 덕망이 높은 율법 학자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당대의 최고가는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제자라는 점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밝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정통한 율법의 사람이었는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물론 맨 땅에 헤이딩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공부는 착실히 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그 쌓은 실력 위에 성령의 불이 붙을 때에 폭발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
사도 바울의 원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사울이었던 것처럼 그의 이름도 사울이었다. 그 사울은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고 120성도에게 임한 성령의 충만함이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역사의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가 배우고 믿고 따르는 모세의 율법에 사로 잡혀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던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서 그 성안에 있는 예수 믿는 이들을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유대의 율법으로 처단하려던 율법에 대한 열의가 불길 같던 인물이었다. 사도행전 9장 1절 이하에 보면 그 당시의 사울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라고 하였다. 그렇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변화되었다. 본문의 3절 중반부 이하의 전체 말씀은 모두가 다 사울 자신이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 되었는지를 증거한 말씀이다. 사울은 당시에 예수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장본인이었다. 3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던 자였다. 그는 4절의 간증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에 대하여 박해하고 심지어는 예수를 믿는 이들을 죽이기까지 하던 악한 유대인이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있으면 어디라도 찾아가서 남녀를 결박 해다가 감옥에 넘기던 열심분자였다. 사도행전 7장에 소개된 예루살렘 교회의 첫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장면을 보라. 사울은 산헤드린과 예루살렘 성전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9장 1절에도 보면 대제사장을 직접 상대 할 정도의 인물이 사울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방선교의 현장에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가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큰 소동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천부장이 나섰고 천부장은 군대에게 명령해서 사도 바울을 높이 쳐 들어 가지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 부대 입구 계단에서 무리들 앞에 변명할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절의 ‘부형들아’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 집사가 사용한 표현과 같다. 당시에 저들은 공손하고 정중한 예의를 표하는 말을 하려 할 때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다. 5절에 보면 바울을 죽이겠다고 달려 들던 무리들 중에는 ‘대 제사장가 모든 장로’들이 섞여 있었다. 여전히 당시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하나님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 대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 언도를 내리게 하고 유월절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할 정도였으니 당시에 종교적인 이유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쉽게 자행되던 일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지난 2012년 9월 21일에 중앙일보에 소개된 기독교 관련 자료에 보면 “5분마다 전 세계 기독교인 중 1명이 자신의 종교 때문에 살해되고 있다.”고 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종교자유분과 대표인 이탈리아 사회학자 마시모 인트로비그네가 지난 해 가을에 발표한 통계다. 그는 “매년 105,000명의 기독교인이 종교분쟁과 관련돼 사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해에 이슬람과 마호메트를 모욕한 미국 영화에 대한 무슬림의 분노가 확산된 바 있지만 오히려 기독교인이 훨씬 더 종교적 박해를 많이 받고 있다는 반박 자료인 것이다. 기독교 구호단체 '오픈 도어스'(Open Doors)는 “세계적으로 1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학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1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콥트기독교회가 공격을 받아 2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다. 이집트 인구의 10%가량 되는 콥트교도들은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세속주의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서는 보호를 받으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이슬람주의자인 무슬림형제단과 강경파 살라피스트가 권력의 주축이 된 이후 콥트교도들은 불안을 느껴 다수가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는 작년 8월에 무장괴한들이 교회를 습격해서 신도 19명이 숨지는 등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에만 510명이 ‘보코 하람’ 같은 이슬람 과격파들에 의해 피살됐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사건은 40%나 늘어났다. 독일의 기독교 칼럼니스트인 쿨케는 “나이지리아·소말리아·이란에서는 기독교인에게 폭행을 가해도 비신사적인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기독교에 대한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주님은 그런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여전히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왜! 복음은 죄 사함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사도 바울에 예전에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핍박자 사울이 변해서 지금 이방 선교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간증하고 있다. 5절에 보면 “이에 대 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다메섹의 길 위에서 오정 쯤 된 시간에 강한 빛과 분명한 부르심으로 말씀하심으로 사울을 부르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신 것이다. “주님 누구시니이까”하고 묻는 사울에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해 주셨다. 사울의 일행들은 빛만 강하게 보았지 사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 오직 사울만이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것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다메섹 성에 들어가면 너에게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고 설명해 주셨다. 부르심이란 이런 것이다.
“네가 해야 할 모든 것”
하나님은 이처럼 한 사람을 부르셔서 사명(使命)을 맡겨 주신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와 갈렙, 기드온과 드보라, 다윗과 이사야와 아모스, 느헤미야와 스룹바벨과 에스라 등 모두 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사도 바울과 디모데를 비롯한 사도 바울 곁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등 모두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도 된 우리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모든 것 즉 반드시 해야만 할 그 모든 일을 위하여 시간과 젊음과 건강과 재물과 경험과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과 헌신을 다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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