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살아온 지난날을 뒤 돌아 보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이 아닌 일이란 전혀 없다. 우연한 일이란 단 하나도 없다. 이는 개인이든지 민족이든지 다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개입하신 사건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니,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지 무슨 하나님은 하나님이야”이렇게 반응하는 이가 주변에 있다면 그가 가족이든 친구이든 사회생활 중에서 만나는 그 누구이든지 그는 아직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영어로 ‘역사’를 ‘HISTORY'라고 하는 것은 ‘HIS +STORY'의 합성어라고 하는 해석에는 항상 일리가 있다. 역사의 대소사에는 분명히 그분의 역사 개입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120명의 성도들이 간절히 성령 받기를 기도하던 중에 임한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각종 방언을 하는 신비한 체험 가운데 출발한 복음 전파의 열매로 자리 잡은 거대한 복음 공동체이다. 그러한 예수 부활의 복음 전파의 열매는 길지 아니한 기간 동안에 삼천, 오천을 넘어서 수 만 명의 무리들로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위협을 느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과 대 제사장들은 의합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유대 땅의 각 고을과 사마리아와 국경을 넘어서서 헬라 지역의 이방 땅에까지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과 야고보 사도의 죽음에 이어서 항상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는 사도 베드로를 감옥에서 풀어내고 보호하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러는 중에 안디옥 교회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에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안수하여 이방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바나바와 바울 이 두 사람은 안디옥을 떠나서 처처에 있는 도시와 마을을 찾아다니며 쉼이 없이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성령은 강력하게 역사하였고 저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말씀을 증거하여 수많은 믿는 자들이 탄생하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특별히 주님은 루스드라 지역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평생 걸어 본 적이 없는 이를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고 큰 소리로 명하였는데 그가 일어나 걷는 기적도 보여 주셨다. 이 소문을 들은 무리들은 바나바를 제우스신이라고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 신이 저들 곁에 내려 오셨다고 추앙하면서 시외에 있는 제우슨 신당의 제사장들에게 연락하였다.
제우스 신은 로마 신화의 쥬피터에 해당하는데 세상의 다른 신들을 관리하는 주신(主神)으로 믿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로마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하는데 제우스와 마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신으로서 신의 뜻을 전달하고 제우스의 전령 역할을 하는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있었나를 보여 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소를 몰고 화환을 준비하여 나타나서는 바나바와 바울이 머무는 집 앞의 대문 앞에까지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당황한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으면서 큰 소리로 저들을 말리면서 “이런 어리석고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를 지으시고 바다와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바란다”고 권면하였다. 결국은 가까스로 저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라고 여기며 제사하고 숭배하려던 일을 제재 시켰다. 그 때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저들의 선교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는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바울을 저들 무리들은 도시 밖으로 끌어다가 내쳐 버렸다. 사도 바울은 거반 죽은 자처럼 의식을 잃은 채 성 밖으로 버려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추종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울을 찾아가서 둘러섰는데 바울이 살아 일어났다. 사도행전 14장 20절에 나오는 장면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거반 죽을 지경으로 의식조차 잃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일으켜 세워 주신 것이다. 피투성이인 사도 바울은 응급처치를 한 채로 쉬지도 않고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 날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게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난 선교 지역을 역으로 다시 거슬러 지나가며 만나는 성도들을 권면하였다. 권면의 내용은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행14:22)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분부를 계속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각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같이 금식 기도하면서 주님께 저들의 신앙생활을 은혜롭게 하도록 위탁하였다. 그리고는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바나바와 바울은 모처럼 여러 날 동안 오래도록 안디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 교회 가운데서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모든 일들을 간증하는 시간을 함께 가졌다.
그러는 중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하되 여전히 할례를 고집하던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저들은 공공연하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강조하며 가르치고 다녔다. 저들은 5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저들의 주장은 율법주의 성향이 대단히 강한 기독교 개종자(改宗者)들이었다. 발음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율법을 철저히 믿고 따르며 개종한 자들이었단 말이다.
오늘 날로 하면 주일날은 절대로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을 철저히 금지하면서 주일을 지키려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그런 신앙을 무어라고 할 것은 없지만 또한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신앙으로 주일을 지키는 이들에 대하여 무어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주일 날 지나치게 상업적인 출입이나 행위를 하는 것은 누구나가 적절히 금하면서 예배와 교회 생활과 성도의 교제와 주일을 지키는 신앙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계속되는 사도행전의 묵상으로 이어지는 본문은 무슨 교훈을 담고 있는가. 그 동안 날마다 묵상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행적이나 바나바와 바울의 행적의 배후에는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신 모든 일들을 대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도행전 14장 7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이란 표현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도 사도행전 15장 4절에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이란 표현이 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라고 정한 것이다. 무슨 내용인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아 주께로 돌아 온 일.
할례가 무엇이기에 안디옥에 도착한 어떤 사람들이 그 곳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면서 할례를 강조하는 것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에 맞서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성경에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신 시작은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99살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언약을 선포하셨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를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삼을 것이며 장차 사라를 통하여 태어날 아들 이삭이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후손이 이 언약 안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축복하여 주셨다. 그리고 중간에 언약으로 강조하신 것이 할례 명령이셨다.
창세기 17장 10절에서 14절까지에 자세한 할례 언약에 대한 명령이 나온다.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에 대대로 이어갈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고 선언해 주셨다. 이 할례는 예수님도 태어난 지 팔일 만에 그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의해 행하여졌다. 그 할례 문제가 지금 안디옥의 선교 현장에서 이방 복음 전파의 현안으로 거론되고 의견의 대립으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1절에 유대에서 안디옥에 내려간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할례가 구원 받는 요소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되었다. 반면에 바나바와 바울은 이견을 보였기 때문에 다툼과 변론이 계속되었다. 이는 결론이 나질 않았고 결국은 안디옥 교회를 대표한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이 선임되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지게 되었다.
구원 받는 믿음과 할례와의 관계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로마교회에 편지한 로마서 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평소에 믿고 있는 할례에 관한 입장을 알 수 있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5-29)
그렇다. 율법과 할례는 율법을 지켜 행할 때에라야 할례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무할례자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준수하는 믿음 생활을 한다면 할례는 받았으나 율법을 무시하고 죄를 범하며 막 사는 할례자보다 훨씬 낫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할례란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 몸에 행하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할례요 영에 하는 할례여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깨닫고 보면 하나님은 선민인 유대인이나 그렇지 아니한 이방의 그 어떤 민족이나 골고루 다 부르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이렇게 선포한 바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한 만민에게 골고루 주어진 구원 받을 만한 유일한 이름이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 그 어떤 종교의 지도자를 통해서도 구원이란 없다. 요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나 종교 통합과 종교간의 평화와 일치를 주창하는 이들이 ‘평화’ 와 ‘화해’ 와 ‘일치’라는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종교 통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궁극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며 개념화 하려고 하는 묘한 술책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성경적인 구원론에 위배되는 얼마나 위험한 주장인지 모른다.
베드로고 주장하고 사도 바울이 강조한 대로 ‘복음’과 ‘구원'은 유일한 것이다. 다른 대안도 없고 다른 진리란 없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오직 성령에 의하여 구원과 죄 사함과 회개를 통한 거듭남과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본문인 사도행전 15장 11절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거들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이는 할례 문제와 무할례 문제로 한동안 시끄럽던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 간의 구원관에 대하여 대립하고 갈등하는 문제에 쐬기를 박은 얼마나 시원하고 명쾌한 선언인지 모른다.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가 쓴 작품을 영화로 만든 <25시>(The 25th Hour)에서 안소니 퀸이 배역을 맡은 루마니아인 농부인 요한 모리츠가 미모의 자기 아내를 탐내는 경찰서장의 음모에 휘말려서 유대인이라고 상부에 거짓 보고되고 강제 노동 현장으로 보내진다. 아내 스잔나는 경찰서장의 강요에 의하여 남편과의 관계를 이혼으로 정리하는 서류에 강제로 서명을 하게 된다. 수용소를 탈출한 요한 모리츠는 스파이 혐의로 다시 붙잡혀서 독일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는 중에 독일 친위대 대령에게 그는 아리안 족의 순혈통을 가진 영웅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아서 수용소의 소장에 임명을 받는다. 1944년 4월,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요한은 미국포로가 되어 전범자로서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변호인은 재판정에서 아내 스잔나가 요한에게 보낸 8년 동안의 기록물을 법정에서 낭독한다. 석방된 요한은 아내와 세 자식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그 영화의 장면 중에 유대인으로 오해를 받아서 할례의 유무를 검사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안디옥을 중심으로 처처의 여러 도시와 곳곳마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복음과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믿고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임하고 많은 무리가 믿게 되는 부흥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방 백성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방 땅에서 행하신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말이다.
택(擇)함 받은 자들에 의하여
복음(福音)이 전파되고 영접되게 하신 일.
갈릴리의 어부였던 시몬이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란 이름을 주님께 받고 성령 충만한 사도요 전도자로 살아간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가에서 어부 베드로를 택하여 부르신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욥바 지역에 까지 선교 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고 그곳에서 정오기도 시간에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신비 체험을 한 주인공이다. 큰 그릇에 담긴 각종 네발 달린 짐승들과 배로 기는 것들과 공중에 나는 각종 새들을 보여 주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셨다. 세 번 반복되는 환상 앞에 베드로는 못 먹는다고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이니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셨다. 결국은 그 환상이 이방을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신 환상이었다. 베드로는 기도하던 중에 가이사랴에서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을 따라 가이사랴에 갔다. 그곳에서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가르치는 중에 성령이 임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문에서 이런 주장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택하신 주님께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을 듣고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강조한 것이다.
미국 감리교선교부는 강화도지역 담임으로 죠지 H.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 선교사를 임명하고 아펜셀러 선교사에 이어서 제 2대 인천내리교회를 담임(1892-1903)하여 목회하게 하였다. 한국 이름은 조원시 목사로 불린 그는 20살 나이에 한국에 도착하여 배재 학당에서 가르치고 문서출판 선교에 힘쓰던 중에 25살 때에 내리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1년간 담임 목사로 섬기는 기간에 내리교회는 괄목할만한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다. 1892년에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로 시작된 영화학교는 인천에서 지금도 유명한 역사를 자랑하는 기독교 학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강화, 해주, 연안, 남양 지역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도왔고 이동신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신학월보도 창간하였고 ‘The Korea Review’라는 신학잡지도 발간하였다. YMCA 창립에도 공헌하였고 1905년에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시작인 초대 신학당의 당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에 51살 나이로 일찍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존스 목사는 인접도서인 강화도에서도 선교를 시작했으나 그 지역유지인 김상임이라는 유학자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한 명도 전도할 수 없었다. 김상임은 강화출신으로 16살에 과거를 보아 합격한 준재(俊才)로서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초시에 합격한 이름 있는 양반이었고 강화의 대지주였다. 명망도 있고 존경도 받았기에 그의 도움이 없이는 선교가 불가능했다. 그 무렵 술집을 하면서도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이승환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아주 열심이 있는 교인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확신을 가지니 강화도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예수를 믿도록 하고 싶어서 직접 전도도 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에게 믿음이 생기자 존스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상임이 반대를 하니 이승환은 한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강화도 해변의 갯벌에 빠져 가면서 걸어서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가서 어머니가 세례를 받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선교 초기인 1893년에 있었던 선상세례였다. 그 후 존스 목사는 전도사를 보내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4-5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올해로 120주년을 맞이하는 강화도 최초의 감리교회인 양사면의 교산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교산교회의 열심과 올바른 기독교인의 행실에 감명 받은 김상임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의 개종(改宗)은 문중(門中)뿐 아니라 강화전 지역의 복음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상임의 개종은 부녀자나 천민들을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 강화 전 지역으로 복음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이 때 강화지역 전 유생(儒生)들이 몰려 와서 김상임이 개종한 것을 항의하고 규탄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김상임은 그들에게 오히려 전도하는 계기로 삼았다. 결국은 이 유생들이 갓을 벗어 버리고 상투를 자르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는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마을마다 탄생하게 되었다. 오늘 날은 강화도에 120여개의 감리교회를 포함해 190여개의 교회가 있다. 나의 고향 교회인 흥천교회는 1906년 11월이 시작되었다. 데이밍 (Charles S. Deming, 都伊明, 1876-1938))선교사에 의하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데이밍 선교사는 미국 남감리교의 파송을 받아 19살에 한국에 온 총각 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출신으로 뉴욕 대학교와 드류 신학교에서 공부한 선교사로 그의 아버지 역시 미연합감리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15년을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피어선성경학원의 원장을 지내며 연희전문학교에서도 가르쳤다.
나의 고조부 지상준(池商駿)님은 1906년 10월 3일에 49살에 세례 받고 증조부 지선주(池善周)님은 23살에 같은 날 부자(父子)간에 데이밍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음 해 봄에 처음으로 6칸짜리 예배당을 지을 때에 마을의 큰 목수였던 지상준 님은 김용하의 매제로서 김정화 님과 함께 무임(無賃)으로 예배당을 지어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이지만 교회의 부흥은 32년 후인 1939년 5월 25일에 40평짜리 석조예배당을 지어 봉헌하였다. 이는 인천 지역 최초의 석조 예배당이었다. 봉헌 예배에 400여명의 하객이 모였다. 복음을 일찍 받아들이고 세례 교인이 된 흥천교회의 개척자인 김용하 전도사의 증손자 김용우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나중에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영국 대사를 거쳐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한 기독교 명사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성령(聖靈)을 주어 증언하게 하신 일.
하나님은 인생의 마음을 아신다. 부부라도 말하지 않으면 서로의 마음을 모를 수 있다. 이는 부모 자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 마음의 생각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본문인 사도행전 15장 8절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는 베드로가 한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계획과 의도와 감정과 뜻을 아신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베드로 사도는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고 강조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는 강조를 함으로서 대비가 되는 분명한 주장을 선언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인 사도행전 7장에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육체의 할레보다도 마음의 할례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듣는 영의 귀의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하였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마음의 할례 즉 성령 세례를 강조한 것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 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관심을 보이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육체의 할례만 갖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법이라고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아닌가. 그 앞서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기를 사모하여야 한다. 그 하나님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 땅의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고 증언하게 하셨다. 이 같은 성령의 역사는 오늘 날도, 아니 오늘 지금 이 순간에서 세계의 처처마다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물세례 받은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고 성령 세례를 받는 주인공들이 골고루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주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려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인종과 풍습과 언어와 외모를 따라서 차별대우하지 아니하시고 동일한 은혜를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다.
아담의 때와 노아의 때와 마찬가지로 극악한 인간의 타락이나 범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의 교육이나 학문이나 도덕이나 수양이나 무슨 마음 수련 정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성의 타락에 대하여 고발하는 심각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라고 하였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깨끗하여 지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려면 성령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고 그 성령 충만을 이웃과 주변에 증언하고 간증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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