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핍박 가운데 부흥해 온 종교다. 환난과 핍박이 계속되면 사라질 것 같은 기독교가 세월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점점 더 왕성하게 부흥하고 발전해 왔다. 주후 64년도에 로마의 네로는 자신의 궁전에 불을 밝히는 목적으로 소위 ‘인간 횃불’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다가 기둥에 묶어 놓고 그 몸에 불을 붙여서 화형 시키는 방법으로 밤중에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역사는 이를 ‘인간 횃불’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도 신구교의 선교 초기와 일제 강점기와 6. 25를 거치는 동안에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핍박과 희생을 당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다. 부활 후 사십일을 이 땅에 계시다가 열 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여명의 무리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다. 저들은 방언하고 복음 전파 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변화가 분명해 진 인물 중의 대표가 베드로이다. 예루살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이는 유대 사회에 위협이 되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앞장서서 대 제사장들과 결탁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는 감옥에 자주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마다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셔서 감옥 안에서 베드로를 풀어 내셨다. 본문에는 헤롯의 핍박 내용이 계속된다. 여기서 언급되는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I, 재위 A. D 10-44)라는 왕이다. 그는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고 햇빛을 받으면 번쩍거리며 휘황찬란한 은으로 만든 왕복을 입고 백성들 앞에 나서서 연설하기를 좋아 하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간악한 왕이었다. 사도 야고보도 그런 이유로 칼로 쳐서 죽인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일곱 집사들 중에서 첫 순교자라면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는 12제자들 가운데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야고보의 죽음을 백성들이 좋아하자 다음 차례는 베드로라고 지목하고 헤롯왕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때는 주후 44년 유월절이 다가 오고 있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당시의 교회는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의심이 갈 정도의 기도 응답.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성령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시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여야만 한다.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결국 베드로는 헤롯의 힘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네 명씩 네 패로 나누인 군인들이 감옥의 베드로를 지켰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천사를 동원하셔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풀어 내 놓으셨다.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셔서 베드로의 손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 내셨다. 그리고 이어서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통과하게 하신 후에 시내로 통하는 쇠문 앞에 이르자 그 쇠문이 저절로 열렸다.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을 찾아 갔다. 본문은 그 다음 장면부터 이어진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가 문 앞으로 영접하려고 다가갔다. 로데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어린 나이였던 것 같다. 어른들은 열심히 기도하시는데 기도가 끊임없이 계속되자 여자 아이 로데가 심심하게 느끼고 서성이다가 베드로 사도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대문을 두드릴 뿐만 아니라 문 밖에서 베드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로데는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베드로가 문 밖에 와서 있는 사실을 기도하던 무리들에게 전달하였다. 아마도 자기 엄마에게 먼저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도하던 무리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밤이 새도록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무리들인데 정작 베드로가 천사의 도우심으로 풀려나서 저들이 기도하는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이 사실을 믿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는 로데에게 한다는 말이 “네가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분명히 베드로 사도의 음성을 들었기에 “내가 참말이다”라고 말하고 기도하던 무리들의 반응은 “그러면 그의 천사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에는 감옥에 갇혔던 인물들의 일화가 여러 번 나온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하나님이 저들을 풀어내신 일화도 자세하게 언급되곤 한다. 창세기의 요셉이 애굽의 바로 왕실의 감옥에 갇혔었다. 히브리 노예 출신인 요셉이 감옥에서 나올 길은 막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임금의 꿈의 해석자로 요셉을 지목하여 감옥 안에서 풀어내시고 그 날로 바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사람임이 드러나게 하셨다. 요셉은 자신이 종으로 있던 보디발의 주인마님의 성적 유혹을 뿌리친 죄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감옥에서 만났던 떡 맡은 관원을 통해서 감옥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해 내게 하고 그 날로 애굽의 총리대신에 등극하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기로 결심하시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털끝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셔서 살려 내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이 좀 더 계속하여 쓰시기로 작정하시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져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길 가운데서도 건져 내셨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에 들려 점을 치는 여종에게 들어가 있던 그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해서 내어 쫓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 여종을 통해서 돈을 벌던 주인이 관리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다. 결국은 옷을 찢어 벗기고 몹시 매로 친 후에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간수들은 바울과 실라를 깊은 감옥에 가두고 발에 차꼬를 채워 놓았다. 그러나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감옥 문이 열리고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지진을 통해서 감옥 문이 열리도록 그 밤에 역사하셨던 것이다. 지금 어떤 인생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여겨지는가. 기도하라. 기도하면 하나님이 질병의 감옥, 가난의 감옥, 슬픔의 감옥, 우울의 감옥, 억울함의 감옥, 실패의 감옥에서 풀어내시고 새로운 삶을 활력 있게 살아가도록 건져 내실 것을 믿고 기도하라.
본문의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호하시고 더 사용하실 계획을 갖고 잠이 들어 버린 베드로를 천사를 동원하여 감옥 안에서 풀어 내셨다. 하나님이 하시면 이처럼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니까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풀려나도록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라고 하였다.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시작이다. 자기의 삶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형통하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은 쉽게 기도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살고, 내가 노력해서 심은 대로 거두어 먹고 즐기며 살면 되지 기도는 무슨 기도냐고 ‘기도 무용론’(祈禱 無用論)을 펼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그런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의 책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 세상 아버지들도 자녀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면 들어 주지 않는가.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시다. 믿고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 성경은 기도의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하나님이 역사하신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책이다.
본문의 문맥을 자세하게 묵상해 보면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셔서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를 풀어내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루가 지나면 유월절이고 그 유월절이 지나면 헤롯왕은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 사도도 야고보 사도처럼 칼로 쳐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여 헤롯의 악한 계획을 무산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풀려난 베드로가 기도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로데라는 여자 아이에게 ‘네가 미쳤느냐’며 책망하던 저들인데 문을 열고 보니 문 밖에 베드로 사도가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때 베드로는 그 집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감옥 안에서 풀어 내 주셨는지를 문간에서 간증하고는 그 사실을 예수님의 아우들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던 야고보와 그 형제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서 급하게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된 사실을 인간은 때로 의심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너무나도 놀랍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의심이 갈 정도로 기도의 내용들이 응답되는 그런 믿음과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 성명을 했다. 이로써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36년 만에 해방이 된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온 나라의 산물을 수탈해가며 점점 극악해 가던 당시 상황으로 하면 해방의 날이 왔다는 것은 그 사실이 의심 갈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기도 응답의 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이는 계속되던 6. 25의 전쟁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 협정으로 일단 휴전 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전쟁이 멈추었다는 사실이 의심이 갈 정도로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폐허의 땅에 오늘 날과 같은 전후 60년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꿈만 같은 일이며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이 갈 정도의 기적이 아닌가.
이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다 마찬가지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노라면 의심이 갈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꿈만 같은 응답과 축복의 날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다가오는 법이다. “왜 슬퍼하느냐”라는 복음성가를 불러 보라.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 이라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슬픔, 의심과 불신을 내어 버리고 오직 주 만 믿고 따르며 기도하는 기도 응답의 삶을 살아가자.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골고루 행사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반면에 때때로 책망하시기도 하고 벌하시기도 하는 심판의 주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용서는 길이 참으시는 용서이지만 하나님이 한번 심판을 발하시면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헤롯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로마의 역대 왕들이 한 결 같이 그러하였지만 사도행전 12장에 소개되는 헤롯 왕 즉 헤롯 아그립바 1세 왕 역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던 왕이었다. 20절에 나오는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라는 뜻이 무얼까. 두로와 시도는 베니게 지역의 항구 도시이다. 열왕기 상 9장에도 보면 베니게 제일의 항구 도시가 두로였다. 그런 지역에 대하여 헤롯이 노여워 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죽여 버리려던 베드로를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풀어내신 사건으로 인하여 심기가 불편해진 헤롯 왕이 유대를 떠나 머무는 동안에 그 지역에 대하여 심술을 부린 경우일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두로와 시돈 지역의 무역상의 마찰이 있어서 경제적 제제를 가하는 방법으로 ‘식량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되기도 한다. 20절 후반부의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왕의 침소 관리를 맡은 측근 중의 한 사람인 블라스도를 설득해서 양식 문제를 해결하려고 화목을 시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헤롯은 교만한 왕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신과 같은 행세를 하며 지냈다. 하루는 헤롯이 번쩍 거리는 은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서 백성들에게 연설을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반응 또한 가관이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행12:22)고 추켜세우며 아부하였다. 이는 주후 44년에 있었던 일이다. 헤롯 아그립바 왕의 일생은 거기서 끝났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할 줄 모르는 악한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자였다. 성경은 헤롯의 죽음을 하나님이 죽이신 죽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학자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 날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영국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행사가 열린 경기일이었다. 그 경기일의 둘째 날은 마침 황제의 생일날인 8월 1일이었다. 헤롯은 그 경기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내려갔을 것이다. 이 날 헤롯은 은으로 지은 화려한 옷을 입고 반원형 경기장의 상좌 귀빈석에 앉았다. 헤롯왕의 의복은 햇빛을 받아 번쩍 거렸고 백성들은 눈이 부셔서 바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날이 헤롯의 마지막 날이었다. 본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 드릴 줄 모르던 헤롯을 주의 사자가 치니까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했다.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이 사실에 대하여 복통으로 죽었다고 했다. 반면에 외경인 마카비서에서는 그의 배에서 수많은 벌레가 나고 그의 몸이 썩는 악취가 나서 죽었다고 했다.(마카비 2서 9:9) 어느 내용이 헤롯이 죽은 정황이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훼방하고 대적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다는 교훈을 준다.
핍박 중에도 흥왕(興旺)해 가는 하나님의 말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말씀에 의한 창조였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창조되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은하계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모든 창조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가 있으시다.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 축복이 창조되고, 저주를 선언하시면 저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붙잡히셔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그 주간에 예루살렘 성을 드나드시다가 이른 아침에 길 곁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셨다. 마태복음 21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열매 맺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자 저주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 제자들이 보니 그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하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기도의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진시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1-22)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가능과 불가능, 신뢰와 의심, 신앙과 불신앙, 축복과 저주, 화와 복, 죽음과 영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왜 성령 받는 것이 중요하고 방언하는 것이 필요한가. 왜 예언하여야 하는가. 예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싶은 말씀을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기 때문이 아닌가. 빛을 어둠이 이길 수 없듯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억압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핍박과 환란이 극심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게 마련이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이를 입증하지 않는가.
우리나라 민족의 민족성을 질경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질경이는 우리나라에 어딜 가나 산재하여 자라나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식물이다. 그러나 왕성하게 번식하거 어디 가나 잘 자라나는 것이 질경이이다. 우리나라에만도 그 종류가 10여 가지나 된다. 한방에서는 질경이를 차전초라고 하고 질경이씨를 차전자라고 한다. 그 효능은 거의 만병통치에 가깝다. 의학적으로는 플란타기닌, 아우쿠닌 같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밝혀져 있다. 먹기에 맛이 있고 독성이 거의 없는 식물이다. 질경이 잎을 말려서 차로 끓여 마시면 고혈압, 기침, 가래 제거, 감기, 두통, 관절염에 효능이 있다. 질경이 잎을 생즙을 내서 마시면 설사, 변비, 구토 등의 소화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된다. 피부 궤양 치료제로 쓰인다. 질경이 잎을 찌어서 환부에 붙이며 고름이 멎고 새살이 돋아난다. 질경이씨나 뿌리를 달려서 마시면 간염이나 신장염 치료에 효능이 있다. 봄철과 초여름에 질경이를 채취해서 데쳐서 나물을 해 먹기도 하고 뿌리를 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어린잎을 따서 데쳐서 참깨 가루에 무쳐서 나물을 해서 먹으면 그 맛이 고소하고 좋다. 그 이파리나 뿌리를 말려 두었다가 차로 끓여 마시면 훌륭한 차의 맛을 즐길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질경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내신 자연의 그 식물 한가지 만 해도 이처럼 좋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에 얼마나 복되고 좋은 것인가 말이다.
우리 교회가 지난 삼년 반 동안 수많은 우여 곡절을 거쳐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마치도 질경이와 같이 여겨졌지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오늘 날과 같이 우뚝 세워 주셨다. 헤롯의 핍박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해 간 것처럼 앞으로 우리 교회를 통하여 그렇게 말씀이 흥왕해 가는 번성의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과메기나 문어를 좋아하고, 호남 분들은 홍어를 좋아한다. 홍어는 암모니아와 트리메틸아민의 함량이 높다. 회나 구이나 국이나 포 등에 적합하다. 다른 생선과는 달리 항아리에 짚과 소금 등을 함께 넣고 삭혀 두었다가 먹는데 안 삭히고 그냥 먹는 경우도 있다. 특히 홍어 삼합은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 중의 하나다. 적당히 삭힌 홍어 한 점과 돼지 삼겹살 삶은 고기 한 점을 맛있게 묵은 김치 한 점에 싸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 아닌가. 서양 사람들은 홍어를 삶아서 헤이즐넛 향기가 나는 버터에 파슬리에 다가 레몬을 곁들여서 먹는다. 강화도 사람들은 밴댕이 회, 밴댕이 김치, 밴댕이구이, 밴댕이 젓갈을 즐겨 먹는다. 지방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지만 어디에나 좋고 누구에게나 좋고 어느 가정에나 좋은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태어나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가정마다 인생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점점 더해 가도록 전파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도 나는 지금 예수 믿지만 진작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이미 장성해 버린 나의 자녀들이 어렸을 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서 키워내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기도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진 나라마다 민족마다 가정마다 가문마다 번영을 이루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예수님의 사도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며 핍박하던 헤롯왕은 벌레에게 먹혀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흥왕해왔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But the word of God continued to increase and spread.)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나 칼이나 창이나 사자의 입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면 그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의 생각을 나 자신보다 더 자세하게 잘 아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정과 개인과 교회와 민족이 흥왕해 가는 말씀의 부흥기를 체험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