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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께서 하신 일(행5:12-26)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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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6-16 21:56 조회 20,051 댓글 0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지키는 자들이 연합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대적하였다. 심지어는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풀려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나이 사십 살이 된 구걸하던 불쌍한 이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를 통하여 고침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그런 기적을 이룬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그 일로 인해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겪었다. 산헤드린의 공회와 대 제사장들의 모든 문중은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베드로와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내다가 종교 재판을 열었다. 저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관리들은 결국 사도들을 처벌할 더 이상의 죄 몫을 발견하지 못하고 풀어 놓아 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하여 부흥되어 갔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남자만도 5,000명을 넘어 섰다. 성령 받던 초기에 있었던 물건을 통용하는 일이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가 놓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서로의 형편을 사랑으로 헤아리는 나눔과 섬김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도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을 장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저들 부부는 하나님과 성령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며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했다. 저들 부부도 자기 소유를 팔긴 팔았으나 전적인 헌신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이 들자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사도 베드로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 사도 베드로 앞에 거짓되게 출입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세 시간쯤 간격으로 차례대로 죽어서 장사 지내는 사건이 생겼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세상에서 이 소문을 들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중에도 사도들을 통한 표적과 기사는 계속되었다. 사도들 앞에 찾아오는 병자들 마다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소문이 예루살렘과 성 밖의 유대 고을마다 처처에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제사장과 사대개인의 당파가 앞장서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다시 시기(猜忌)하기 시작했고 또 다시 저들을 감옥에 붙잡아 가두고 말았다. 그런데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서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가서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20)고 명령하였다. 사도들은 그 밤의 새벽녘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새벽이 되자마자 대 제사장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자들이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가서 옥에 가두어 둔 사도들을 데려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감옥에 도착한 부하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문은 든든하게 닫혀 있고 간수들이 서서 옥문을 지키고 있는데 옥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사도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어리둥절하고 있던 차에 성전 맡은 자들이 헐레벌떡 달려 와서 새로운 사실을 전했다. 그 새벽에 사도들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전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주께서 하신 일들이었다.


주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하신 표적과 기사.
초대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들은 주께서 하신 일이었다. 12절에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손이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손이 없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손을 통하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손을 통하여 일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통하면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고 집안이 정돈되고 청소된다. 빨래가 깨끗하게 되어서 장롱의 서랍장에 정리된다. 물론 아빠의 손을 빌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선택과 결정과 의지의 표현을 담아 주셨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를 흙으로 만든 것도 하나님의 손이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도 하와의 손이며, 남편 아담의 손이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형 가인의 손이었다. 바벨탑을 쌓은 것도 인간의 손이었다. 방주를 지은 것도 노아의 손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손 안에 파괴와 재창조의 능력을 골고루 자유 의지와 선택의 기회로 주신 것이다. 꿈의 소년 요셉을 결박하여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도 야곱의 열 아들들의 손이었다. 모세는 도도하게 흐르는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어 밀 때에 홍해가 갈라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 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출14:16)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그렇게 하였을 때에 기적을 보았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날 우리 눈에 보여 지는 완공되어가는 성전의 건축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어 밀 때에 일어난 기적의 현장이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는 것처럼 오늘 날도 인간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려는 표적과 기사를 계속하여 일으켜 보여 주신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던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의 손끝에서 오라토리오 ‘메시아’와 같은 대 합창곡이 작곡된 것이다. 헨델이 56살이던 1742년 8월 22일에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그는 24일 동안 세상의 걱정 근심을 잊고 하나님의 영감에 충만하게 사로잡힌 채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완성했다. 9년 후인 1750년 영국 런던에서 ‘메시아’의 초연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당시의 영국 왕인 조지 2세가 ‘할렐루야’가 연주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해서 그 후로 할렐루야의 연주가 시작되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하지 않는가. 원래 독일 태생인 헨델은 41살 때에 영국에 귀화하여 음악 활동을 계속하였다. 헨델은 17살 때부터 할레 예배당에서 오르간 반주자로 섬길 정도로 영특하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주께서 헨델의 연주하고 작곡하는 손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미켈란젤로의 손을 통하여 천지창조나 피에타와 같은 역사적인 작품이 완성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로뎅의 손을 통하여 지옥의 문과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빛을 보도록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손을 통하여 최후의 만찬 같은 성경적인 걸작이 완성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깁게 묵상하며 기도하던 렘브란트를 통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독교 미술의 대작들이 완성되게 하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예수님’, ‘돌아온 탕자’,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붓는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등의 성경적인 장면들은 역사 속에 생생하게 묘사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뿐인가. 하나님은 톨스토이나 펄벅이나 토스토에프스키 같은 인간의 손을 통하여 ‘전쟁과 평화’, ‘대지’, ‘죄와 벌’과 같은 문학 작품들이 역사 속에 빛을 보게 하셨다. 우리나라로 하면 박목월, 김소월, 윤동주, 심훈과 같은 문학인들의 마음에 영감을 불어 넣으신 주께서 저들의 손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신앙관에 바탕을 둔 역사적인 문학 작품들이 완성되게 하셨다.

주님은 영국의 임금이었던 제임스 왕의 손을 통하여 킹 제임스 성경(KJV)과 같은 역사적인 성경이 번역되게도 하셨다.

주께서는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의 소아외과 의사인 벤 카슨 박사의 손을 통하여 머리나 몸이 붙은 상태로 태어난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을 1987년에 세계 최초로 그리고 계속하여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벤 카슨 박사의 손길을 통하여 악성뇌염으로 고생하며 하루에도 120번 이상의 발작을 일으키는 어린이의 뇌를 수술해서 깨끗하게 낫도록 성공적인 수술을 진행하였다.

12절에 말씀하는 ‘손’이란 인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생을 살아가야 할까. 주께서 나를 통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죄 사함과 회개의 복음과 영생의 진리가 세상 구석구석까지 편만하게 전파되는 일에 쓰임 받는 선한 손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손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용기를 주고, 등을 두드려 격려해 주고, 상대방의 손을 붙잡아 새 힘을 전하는 그런 손길을 소유한 인생으로 살아가도록 나를 사용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시기(猜忌)를 받아 갇혔던 감옥 문이라도 열려 지게 하시는 주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으나 그 밤으로 옥문이 열리고 풀려나도록 도우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었다. 사도들이 감옥에 갇힌 원인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과 그들 당파의 시기심(猜忌心) 때문이었다.(행5:17) 이 시기심이 무서운 것이다. 시기심에서 시작해서 살인도 한다. 시기심에 붙잡히면 사리에 대한 분별력을 잃게 되고 만다. 이 세상에 시기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란 없다. 카인 콤프렉스라고 하는 이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표현이나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시기심이 없는 인간이란 불가능하다. 독일의 심리학자요 아우크스부르크대학의 심리학 교수이며 프로이드 연구소 소장인 롤프 하우블 박사의 책 중에 <시기심>이란 책이 있다. 그는 책에서 “타인에게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돈과 물질적인 부, 탄탄한 직장, 사회적 지위, 여가 등에서부터 복지국가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행복과 만족까지 시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시기심은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는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시기심’이란 감정은 내면의 성찰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준다.”고 정리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기심은 “온갖 형태의 자기 사랑과 자기 우월감을 감추는 위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령 20년 전 혹은 30년 전에 같은 학교, 같은 교실,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는데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 보니 누군가가 나보다 훨씬 앞서 있고 역량이 뛰어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 내 마음 속에 시기심이란 것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시기심에 불이 붙여져서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인데도 쳐서 죽이지 않는가. 시기심과 경쟁심은 선하게 작용하면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만 잘 못 작용하면 자기를 망치고 불행의 수렁에 빠지게 하고 만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은 시기심으로 꿈 많은 동생을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팔아 버리지 않았는가. 임금 사울은 시기심으로 불타는 눈을 갖고 손에서 창을 내려놓지 못한 채 사위인 다윗을 죽여 없애버리려 하지 않는가. 이 ‘시기심’이란 것은 형제자매 간에도 있고 동서 간에도 있고 교회 안에 성도들 간에도 있다. 그러므로 시기심을 잘 못 다루면 큰 자기 불행을 부르고 만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경에 전북 이리역 폭발 사고가 있었다. 전남 광주로 이동하던 기차에는 인천한국화약에서 보내는 화약 30톤이 실려 있었다. 열차 호송원이 촛불을 켜 놓고 잠이 든 사이에 화약 상자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촛불 하나에서 번진 불길은 화약 30톤을 모두 다 폭팔 시켰고 이리역 주변의 반경 500미터 안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다 파괴되었다. 그 폭발의 영향은 직경 8km까지 미쳤다. 이 사고로 59명이 죽고 14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82채의 가정집이 부서졌다. 상가 9530동이 박살이 났다. 9,973명의 이재만이 발생하였다. 사고 현장인 이리역 4번철로 현장은 깊이 15미터, 폭 40미터의 큰 웅덩이가 생겼고 열차와 철로는 박살이 났다. 촛불을 잘 못 다루어 이같은 엄청난 사고가 생기는 것처럼 시기심을 잘 못 다루면 크나큰 불행을 겪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감옥에 갇히듯이 그 무엇엔가 결박되고 답답한 세월을 지내야만 할 때가 없지 않다. 아니, 실제로 감옥에 갇히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는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서 백성들의 절대 지지를 받으며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다. 흑인과 백인의 인권 평등을 주창하는 일에 평생을 목숨을 걸고 앞장섰던 그를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다. 그는 나중에 노벨 평화상을 타는 주인공이 되었다. 국가의 5가지 지폐마다 그의 얼굴이 들어나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노년기를 살아가고 있다. 1918년생이니까 올해 그의 나이가 95살로 최근에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종신형을 받고 감옥 안에 갇혀 지내던 넬슨 만델라를 실제 감옥 문이 열리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하셨고 그를 세계 역사에 빛나는 지도자로 사용하신 것이다.

지금 아니 요즘 내 인생이 감옥 안에 갇힌 것처럼 용신할 수 없고 답답하고 어찌할 수 없는 날들을 지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가 있는가. 질병의 감옥인가. 가난의 감옥인가. 실패와 우울의 감옥인가. 인간관계의 실패의 감옥인가. 그 어떤 감옥 문이라도 하나님의 원하시면 활짝 열려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올 2013년은 동족 전쟁인 6. 25 전쟁이 일어난 지 63년이요, 휴전협정이 된지 60년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60년씩이나 굳게 옥문처럼 닫혀 있는 남북의 문제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활짝 열려지게 해 주실 것이다. 43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가듯이, 70년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의 땅에서 풀려나고 귀국과 귀환의 감격스런 날이 다가 오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자유와 해방과 평화 통일의 감옥 문이 활짝 열리는 날이 분명히 다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주께서 주인이 되셔서 범사를 다스리고 주장하고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내가 내 안에 주인이 되어서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주께서 함께 하시면 바로 왕이 겪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서 출애굽하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리기를 먹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고 낮에는 구름기둥이 덮이고 밤에는 불기둥이 앞서서 인도하는 그 모든 일들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들이셨다. 광야 생활 사십년을 마치고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요,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었다. 레위 지파를 제외한 11지파에게 가나안을 분배 받도록 하고 헤브론의 산악지대라도 점령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통하여 이루신 승리의 업적이신 것이다. 주께서 하시길 원하시면 소년 다윗을 통하여 블레셋의 골리앗이라도 죽게 하시고 그의 목이 잘려 나가게 하시지 않는가. 주께서 원하시면 어린 아이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작은 도시락 분량을 갖고도 이만 여명의 벳새다 광야에 머물던 무리들을 배불리 먹게 하시고 도리어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게 하시지 않는가. 주께서 함께 하시면 역사는 바뀌고 표적과 기사는 계속하여 일어난다. 굳게 닫힌 감옥 문이라도 활짝 열린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스스로 이루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영생의 구주로 보내신 것이다. 성령의 강림도 마찬가지다. 물론 120성도들이 간절히 성령 받기를 기도하였으나 성령을 보내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빛이 있으라.”하는 창조 선언의 첫 시작으로부터 엿새 동안 우주 삼라만상의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에 뛰고 기는 모든 짐승들과 바다의 크고 작은 물고기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대하는 성령의 강림과 각종 표적과 기사가 계속하여 많이 일어나게 된 그 능력과 힘의 근원은 주님이시다.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갔다. 무리들에게는 심지어는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병자에게 덥히면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기대와 그런 믿음을 갖게 하신 것도 주님이 주신 마음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게 하시는 주님.
주님은 사도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충만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감옥에 갇힌 사도들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감옥 문을 여셨다. 뿐만 아니라 그 밤중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천사는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옥문을 열고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Go, stand in the temple courts,
and tell the people  all about this new life.)

(행5:20)고 하였다. 우리 말 성경에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new life’라고 하였다. 그렇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나니까 저들의 삶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되었다. 성령 받기 전에 나약하고 비겁하고 두려워하며 숨고 피하고 도망 다니던 이름뿐인 제자들이었는데 지금 성령 받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졌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협을 받아도 소심해지지 않았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 진다. 성령 받으면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진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관없이 복음 전파의 담력을 갖게 된다. 성령을 받고 나면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자신의 삶을 간증하게 된다. 성령 받고 나면 감옥에 가두어도 못 막고 채찍으로 때려도 못 막는다. 사도행전 5장 4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당파의 모두가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어도 어찌할 수 없고 위협해도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부활을 전파하지 말라”고 협박하고 채찍질을 해서 풀어 놓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 확신과 믿음을 갖게 된 베드로와 사도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담대하여졌다.  이상한 현상은 사도들은 매를 맞아도 기쁘고 감옥에 갇혀도 즐거웠다. 41절에 보면, 능욕 받는 일을 기뻐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성전과 가정마다를 찾아다니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행5:42) 오직 성령의 강력한 역사요 주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하신 일인 것이다. 이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재현되는 가정과 인생과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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