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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열심(熱心)(롬10:1-10)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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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6-16 21:54 조회 24,238 댓글 0
 
최근에 어느 교회의 선배 목사님을 만났더니 요즘 젊은 여성 신도가 신천지에 깊게 빠져 있고 또 다른 여성 신도를 신천지에 끌러 드린 사실을 알게 되어서 너무나 마음이 상해 있노라고 했다. 인천의 장로교 장로의 딸이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디 가서 무슨 심리 치료 공부를 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결국은 일산의 어디에 있는 신천지 지부에 빠져서 저들이 가르치는 엉터리 비유 해석을 비롯한 신천지의 복음을 곡해하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깊이 푹 빠져서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남매 자녀들도 몰라라 한 채로 오직 거기에만 빠져 지내더니 최근에는 집에 연락도 하지 않고 어딜 가서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열심의 내용과 방향이다. 내용이란 무슨 일에 열심이냐는 본질의 문제이고, 방향이란 삶의 목적을 말한다. 목적과 목표가 잘못된 ‘열심’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래 의도하고 기대한 것에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만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은 구원(救援) 받는 것이다. 가령 이방 전도의 선봉에 서서 평생을 살았던 순교의 사람 사도 바울이 전파하던 복음이 알고 보니 복음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복음이라고 믿고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다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영혼들이었겠는가. 고린도 후서 11장 4절에 보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영혼이 병들어 가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편지한 사도 바울의 편지 내용을 대하게 된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한 잘못에 대하여 신랄하게 지적한 말씀이 나온다. 예수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고, 영이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지 영이고, 복음이면 복음이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이 세상은 열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 날의 문명이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도 열심의 영이시다. 열왕기하 19장 31절에 보면,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했다. 작은 손가락 포도나무 가지를 땅에 심어서 그 가지가 아래로 뿌리가 내리고 위로 잘 자라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를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수고도 필요하지만 전적으로 자라나고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이다. 열왕기하 19장 29절부터 다시 보면, 유다 족속들 가운데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그런 성장의 열매를 풍성하고 넘쳐나게 해 주시겠다고 하였다.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고 피한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앗수르가 쳐들어오려고 하자 히스기야 임금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선전포고문을 펼쳐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고 부르짖은 때에 하나님께서 당시의 선지자였던 이사야에게 나타나셔서 장차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왕하 19:34)는 말씀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그 밤중에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동원되어서 앗수르 진영을 공격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185,000명이 송장되어 있었다. 무슨 말인가. 역사는 역사 중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인생들 가운데서 진리에서 떠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변천해 나가는 것이다. 이사야 9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에 곧 이어서 하신 말씀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고 하였다. 거기 이사야 9장 6절과 7절을 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의 열심은 역사를 바꾸어 가는 힘이셨다. 인간의 열심도 마찬가지다. 공부도 열심히, 연애도 열심히, 장사도 열심히, 직장 생활도 열심히, 사업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중에 보면 잘하게 된다. 하는 등 마는 등 해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다. 교회 생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기도, 찬송, 말씀, 예배, 전도, 봉사, 섬김, 헌신도 그 때 그 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는 이들이 한 시대 그 교회, 그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흔적 있고 두각을 나타내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잘못된 열심, 병든 열심, 서로에게 근심과 상처를 남기는 열심, 진리에서 벗어난 ‘열심’이라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 십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들이 없었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여러 차례 있었으니 세월이 지나도 아내 사래는 경수가 끊긴지 여래해가 지나고 있었고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을 얻고 싶은 간절함이야 얼마나 컸겠지만 아들 낳고 싶은 기대와 욕망은 아내 사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들을 갖고 싶은 마음의 ‘열심’이 불붙기 시작했다. 아내 사래는 자기의 젊은 몸종인 하갈을 남편 아브람에게 허락했고 아브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의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침소에 들여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의 아들의 탄생을 원하지 않으셨다. 결국은 아브람과 사라의 잘못된 ‘열심’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는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기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열심’은 장차 이루실 언약을 통한 열심인 이삭을 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열심’이란 참는 열심히요 인내하는 열심히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열심이어야 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또한 아브라함의 자녀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고 했다. 제대로 잘 못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열심처럼 위험한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도 그와 같은 점을 강조하였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도 그 사랑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서로 다 다른 것이다. 그 지식과 열심의 너비가 다르고 길이가 다르고 높이가 다르고 깊이가 다른 것이란 말이다. 과연 오늘 날 나는 어떤 열심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義)와 인간의 자기(自己) 의(義). 유대인들의 의란 율법의 틀에 갇혀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인간적인 열심에 붙잡힌 채로 자기 열심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모습이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과거에는 그런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9장에 소개되는 것처럼 다메섹을 향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처단하려는 자기 의에 사로잡힌 ‘열심’으로 나아가던 교회에 대한 박해자요 성도들에 대한 핍박자였던 사울을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아 세우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강한 빛을 비추셔서 그의 눈이 삼일 간 보이지 않게 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 때에 하늘에서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강한 빛에 눈이 가리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우편에 승천해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울을 부르시는 부르심은 사울을 인간의 의에 갇혀 있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붙잡히게 하는 체험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겸손하여야 하고, 그러므로 성령을 매 순간 의지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1738년 5월 24일 밤 8시 45분, 영국 런던의 올더 스케잇 거리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 수요일 기도회에 참석했던 요한 웨슬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노라고 간증하였고 그 날 일기에 그렇게 기록을 남겼다. 담임목사도 없던 작은 예배당에 모인 적은 무리의 회중들 가운데 그 누군가가 강단에 올라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는 그 내용을 듣던 중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의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을 듣는 중에 그런 심경의 변화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요한 웨슬 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을 많이 공부했고 이미 20대 초반에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로 임명될 정도의 석학이요 재원이었다. 이미 20대 초반에 목사 안수도 받았다. 아버지도 목사요, 할아버지도 목사요, 외할아버지도 당시에 유명한 목사였다. 이미 요한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미국 조지아 주의 사바나 지역에 원주민 선교를 위해서 3년여 간 선교사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가 1703년생이니까 35살 되던 해의 일이다. 그 날의 그 체험 이후로 요한 웨슬리는 달라졌다. 자기 의나 자기 열심히 아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열심에 붙들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791년 88살의 나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당대의 유명한 전도자요 기도와 찬송의 사람이요, 목회자요 복지 사업가요 교회 교육의 선구자요 속회 조직의 탁월한 행정가였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가 무엇인가. 모세는 그런 자기 의를 세우려던 ‘열심’으로 말미암아 화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씩 탁탁 치는 혈기를 부렸고 결국은 느보산 정상에서 저만치 요단 강 건너편의 가나안을 바라다보면서도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으로 먼저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모세의 인간적인 의를 앞세우려던 ‘열심’이 그만 광야 사십년의 고난의 세월을 거기서 마치고 말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잊은 채로 인간적인 열심과 인간적인 의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민수기 27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서로 분쟁할 때에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죄를 묻고 계시다. 이는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사건을 기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므리바 지역에 머물 때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어 그 곳에서 장례하였다. 회중은 그 곳에서 물이 없자 다시 모세 앞으로 몰려 와서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광야에서 짐승과 함께 물이 없어 죽게 하느냐”고 불평하면서 대들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여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에서 죽게 하느냐”고 불평하며 모세와 아론의 화를 돋웠다. 모세와 아론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는 백성들 곁을 떠나서 여호와의 회막 문 앞에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가지고 형과 함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그리하면 네게 그 반석이 물을 내개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았다. 거기까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민수기 20장 10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그 반석 앞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모세가 소리쳤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리고는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그 때에 가데스의 그 반석에서 많은 물이 솟아났고 백성과 짐승들이 배 불리 마실 수 있었다. 반석에서 물이 풍성하게 나와서 백성과 짐승들이 잔뜩 마신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자. 하나님은 처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반석이 무엇인가. 바위다. 바위는 인격이 아니다. 바위는 광물 즉 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물 덩어리인 반석을 향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하신 것이다.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장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그런데 모세는 화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하나님은 이것을 큰 문제로 삼으셨다. 민수기 20장에는 모세의 인간적인 열심과 인간적인 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 하나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라는 지적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이다. 우리는 성전 건축 기간 동안에 그런 잘못과 인간의 의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야만 할 것이다. 본문 3절에 보면 인간의 의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고 작은 것으로 많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는 결심하시면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셔서 일정한 시간 동안 물이 벽이 되어 흐르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의 의이시다. 하나님의 의는 필요하면 아침마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날마다 배부르게 먹을 만한 분량의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 길에서 넉넉히 버티게 하시고 가나안을 사모하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의이시다. 때로 원하는 백성들에게 필요하면 바람을 불게 하셔서 메추라기 고기로 배부르게 하시고 생각나는 애굽의 고기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서의 의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천지 차이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한 점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의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의란 자기를 자랑하는 의요, 자기 이름을 내세우는 의요, 자기 공로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의이다. 그래서 탈이 나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그래서 나중이 불행해 지는 것이 인간의 자기 의(義)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나중을 보라.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누차 사울 왕의 변화와 회개를 기대하고 촉구하셨으나 결국 사울 왕은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기 열심에 눈이 가리고 말았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사울 임금의 때에 하나님은 사울의 군대를 동원하여 아말렉을 진멸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 아멜렉이 과거에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행하던 길을 막아서서 대적한 일을 벌하시겠다는 결심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사울왕은 21만 명을 모병하여 아멜렉과 싸웠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의 아각 왕도 죽이지 않고 사로잡고 그의 양과 소들 중에서 살지고 좋고 기름 진 것들을 고스란히 살려서 가지고 돌아 왔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불순종과 자기 의를 내세우고 결국에는 갈멜이란 곳에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대단히 실망하셨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 왕으로 인하여 근심에 싸였고 밤을 새어 가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사무엘 상 22장에 보면, 사울 왕이 점점 잘 못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놉 지역에 사는 제사장들의 가족들의 남녀와 아이들과 젓 먹는 아기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모두 다 칼로 쳐 죽였다. 사울 왕은 결국 하나님의 의를 떠났고 자기 의에 사로 잡혀서 불행한 길을 자초하고 있었다. 사울 임금은 어리석은 자기 열심과 자기 의의 늪에 빠져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같은 이름의 신약의 사울은 처음에는 율법 안에서 자기 의에 갇혀 지내던 열심분자였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전에 자랑하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모세를 통한 의(義)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의(義). 4절 말씀에 멋진 표현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표현 말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단번 제사를 통하여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영원한 의를 이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의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 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룩하신 의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나 골고루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며 구원을 받게 하시는 의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을 완성하시는 면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로마서 10장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1절, 9절, 10절, 13절에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의는 12절의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약속이 있는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고 부르고 따르며 순종하는 이들은 그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5절의 말씀에 보면 모세를 통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어야만 그 행함의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의이다. 이 세상에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의인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장 10절과 20절과 22절이 이러한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그렇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하는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워 지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던 모세 시대의 의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모세 시대의 백성들은 그 율법 안에서의 의를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행하므로 구원 얻을 육체란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행위 구원과 믿음 구원의 차이와 가능성에 대하여 소상하게 증거해 준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고 하였다면 도저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고 하였다.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의를 선물로 덧입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9절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선물을 소개하는 말씀이 아닌가. 성도된 우리는 로마서 5잘 9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6절과 7절의 사도 바울의 논리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때가 되면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재림주로 다시 오실 것이지 이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오시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죄에서 대속하기 위하여 그렇게 다시 오실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시 죽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는 그런 죽음도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하여야만 한다. 각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그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도록 전파하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그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담대하게 전하여야만 한다. 증도는 전라남도 신안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그 섬에 일제시대 때에 문준경(1891-1950) 전도사란 여 전도사가 온 섬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녀는 17살에 결혼하였는데 남편이 이웃 섬에 딴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그를 버렸지만 시아버지의 배려로 뒤 늦게 한글도 배울 수 있었다. 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오갈 데가 없었다. 오빠가 사는 목포로 나아서 육지에서 월세 방에 살면서 재봉질을 배워서 삯바느질을 하며 지냈다. 전도 부인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37살에 세례를 받았다. 3년 후인 1931년에 경성성서학원이 입학하였다. 6년간 신학 공부를 하고 전라남도의 섬 마을 만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임자도의 진리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섬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그녀를 비웃었고 그녀는 6. 25 때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해 죽었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공산당 들은 그를 포함하여 예수 믿는 섬사람들을 바닷가로 불러내서 총으로 쏘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의 나이 60살 때의 일이다. 그녀는 홀로 섬에서 살다가 외롭게 죽은 이들의 시체를 장례하였다. 자기는 아기를 낳아 본 적이 없으면서 섬에서 출산하느라 고생하는 여인들의 산파 역할도 하였다. 이 섬에서 잔치하면 잔치 음식 받아다가 가난한 섬사람들을 시시 때때로 거둬 먹였다. 비가 새는 집의 집도 고쳐 주고 도배도 해 줬다. 그러면서 전파한 복음이 오늘 날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그의 ‘열심’이 넘치는 복음 전파를 받아들인 섬 마을 소년 들 중에서 CCC의 김준곤 목사, 목사로서 한국신학대학교의 상담학 교수를 지내고 치유상담연구소 소장으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정태기 박사, 성결교단의 부흥사요 목회자였던 이만신 목사, 합동신학원의 교수였던 신복윤 박사 같은 한국 교회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그 배후에 나약한 여성 복음 전도자의 식지 않는 구령열에 붙이 타던 ‘열심’이 넘치는 문준경 전도사가 있었다. 복음 전파에는 위력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는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천하 만민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성경 속에서 깨달아 알아서 복음을 복음답게, 영을 영답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심을 천하 만민들에게 골고루 쉼이 없이 끊임없이 전파해 나가는 천국 복음의 거룩한 전도자들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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