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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믿는 자의 부활신앙(요20:19-29) 3. 31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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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4-17 22:28 조회 20,411 댓글 0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이다. 사망이 첫째 아담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 온 것처럼 부활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것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21절에 보면,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요 전부이다. 부활 신앙이 없이 교회 생활을 하면 그와 같은 신앙은 윤리 생활이요 도덕 종교요 자기 수양의 종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확고한 부활 신앙에 바탕을 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고도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옛날에 버려두었던 그물을 다시 챙겨 들고 밤새도록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를 시도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들어가서 세마포가 놓였고 예수님의 머리를 쌓던 수건은 따로 놓인 예수님의 부활하신 현장을 확인하였지만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숨고 말았다. 디두모라 이름하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밤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 가신 적이 있으나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에 갔다가 나중에 합류한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고 반응하였다. 부활하신지 여드레가 되던 날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한 자리에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있는데 예수님이 찾아 가시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문안하셨다. 그리고 도마를 향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는 말씀을 해 주셨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즉, 부활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믿는 자로서 성경을 대하지 않으면 사무엘 상하나 열왕기 상하나 역대상하는 단지 유대인들의 역사일 뿐이다. 시편이나 잠언이나 전도서는 단지 인간에게 지혜와 교훈을 얻게 하는 교훈의 책일 뿐이다. 아가서는 연애편지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 성경이야 말로 믿음의 책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며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생생한 성령의 말씀의 책인 것이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가족적이고 좋으니 주일날 마다 속도원 만나는 맛에 찾아오고, 정들었으니 주일날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고 교회에 오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된다. 우리를 붙드는 힘은 부활 신앙이어야만 한다. 이는 어른이든 젊은이이든 어린이이든 노인이든 다 마찬가지다. 제자 도마는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우여곡절을 가지긴 하였지만 가롯 유대의 운명과는 천지차이였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권고하시고 초청하시는 말씀을 들은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My Lord and my God!"
이와 같은 신앙은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바탕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 말이다. 일찍이 이 런 믿음은 다윗에게 있었다.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런 신앙 말이다. 다윗은 또한 “여호와는 나를 건지시는 분이시오 나의 하나님시라”고 고백하였다.

부활절 아침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런 돈독한 신앙이 다시 한 번 고백되는 아침이 되기를 소원한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고백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 요한복음의 백미(白眉)와 같은 너무나도 소중한 말씀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한 말씀 더 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오늘 날 우리는 그런 믿음의 주인공답게 세상을 이기며, 의심과 불신을 이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금번 4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보니까 어린이 동화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어느 가정의 남매가 교회를 잘 다녔는데 하필 종려 주일날 남동생이 감기가 몹시 걸려서 고생하면 힘들어 하다가 주일 날 교회를 빠졌다. 혼자 교회학교에 다녀온 누나가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 방에 누워 있는 동생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보이면서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이것을 머리 위로 흔들다가 길에다가 쫙 펴 놓았어”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어린 남동생이 “으앙”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마구 울어 대면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깜짝 놀란 엄마가 어린 아들에게 무신 일이 생겼는가 하고 부엌에서 뛰어 나가자 “내가 아파서 딱 한번 교회에 빠진건데  왜 하필 예수님이 오늘 오셨느냔 말이야...”하면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 어른들도 이 어린이처럼 예수님 만나고 싶어 하는 이런 믿음이 간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이니 절기로 맞이하는 습관에 젖어 있고 그냥 “아 오늘이  부활절이네” 그런 정도로 지내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부활 신앙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하였던 무덤을 찾아 갔던 몇몇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요한복음 20장 1절이 말씀하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 몇몇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 간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그 여인들의 이름이 좀 더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 외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함께 갔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좀 더 발라 드리기 위해서 갔다. 저들 여인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고 믿고 존중하고 사랑하던 그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이라도 더 발라 드리려는 그런 섬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저들이 예수님 부활하신 빈 무덤을 보게 되었다. 그  곳을 지키던 흰 옷 입은 청년을 보았다. 그는 천사였다. 마가복음 16장  6절과 7절에 보면,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고 천사가 말했다. 

요한복음 20장은 1절부터 보면, 빈 무덤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가 이 사실을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알렸다. 둘이 달려가서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는 슬쩍 들여다보고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도착한 베드로는 빈 무덤 안에까지 들어가서 빈 무덤을 보았다. 그 빈 무덤 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만이 이곳과 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은 무덤이 없다.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례하였던 무덤도 예수님의 무덤이 아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돌무덤이었다. 삼 일간 빌려서 뉘이셨던 무덤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덤이 없으시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지 사십일 만에 하나님의 곁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열흘 후에 성령을 보내셨다. 우리가 사도 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대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본문을 앞 뒤로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새벽에 그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울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옮겨 갔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분은 동산지기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이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서 숨어 있던 곳을 찾아 가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 네 가지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첫째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둘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 셋째는, 성령을 받으라.
또 하나는,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셨다.

해마다 부활절이면 묵상하는 여러 가지 말씀 묵상 중에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샬롬’인 평화의 선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예수님이 하신 인사는 ‘샬롬’이란 인사였다. 히브리 말로 샬롬이며 헬라 말로 ‘에이레네’(eijrhvnh)라는 이 말은 “평화, 복지, 번영, 행복, 축복, 완전, 완성, 성공, 성취, 선물, 안식, 평온, 구원”등의 다양하고 좋은 의미를 다 포함한 말이다. 이 평강은 알 수 없는 평안의 상태인 것이다.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의 평화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에 전쟁을 많이 겪은 민족이다. 6. 25의 아픔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남한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어도 북한의 백성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 올해가 6. 25가 휴전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언제 전쟁의 불안이 끝나고 평안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인가. 한 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에 그런 완전한 평화의 때란 없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시대 이후로만 보아도 무려 580번 이상의 외침을 겪으면서 생존한 민족이 우리나라 민족이다. 요즘도 남북의 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육해공군이 밤잠을 못자며 비상 경계 태세를 갖는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평화의 문안은 죽으시기 전에도 늘 하시던 인사와 문안이셨으나 부활하신 이후에 하신 이 인사와 문안의 의미와 비중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서워서 떨며 두려워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 가셔서 이렇게 문안 하신 것이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 평안은 불안해도 평안하고, 초조해도 평안하고, 답답해도 평안하고, 우울해도 평안하고, 병약해도 평안하고, 가난해도 평안하고, 실패하였어도 평안하고, 이기지 못하고 졌어도 평안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평안한 그런 평안인 것이다. 이 평안은 인생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그 어떤 상황도 뛰어 넘을 수 있는 평안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믿고 따르며 의지하고 순종하기 시작하면 마음에 크고 놀라운 평안이 임하게 된다.

요즘처럼 나라가 뒤숭숭할 때에 우리나라 하늘에 B-2 스텔스 폭격기와 같은 미국의 가공할만한 전투기가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을 10시간 만에 날아 와서 한국 상공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만  평안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이 땅에 계실 때에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이런 축복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도의 축복과 안식과 기쁨은 주님이 내 마음 속에 선물로 허락해 주시는 크고 놀라운 평안인 것이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덧 입혀 주시는 평안이다.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 데서” 412장 찬송의 3절에 보면,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평안과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위로와 안식과 은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처럼 그런 평안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하나됨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사명자의 파송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보내신 구세주이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보냄을 받아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아들로서의 사명을 다 하신 것처럼 성도된 우리들도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나의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교회를 중심으로 나를 보내신 주님의 부르심과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된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역사는 사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사명의 사람은 시대의 현장에서 모든 일을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통찰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슬픔에 젖어서 기도하던 청년 선지자 이사야의 기도가 나온다. 이사야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주께서 높이 들른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 스랍들이 모셔서 있었다. 스랍이란 천사를 말한다.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였다.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훨훨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의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는 음성을 들었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런 고백을 하였을 때에 스랍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핀 숯을 손에 잡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그 불에 당군 시뻘건 부젓가락을 이사야의 입술에 댔다. 그리고 하는 말이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음성이 들렸다. 그 때에 이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명자가 된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신약과 구약의 그 모든 선지자들과 사명의 사람들이 다 이런 부르심을 통하여 사명자의 삶을 살았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공헌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이와 같은 사명자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 누군가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의 사명자의 찬송을 부르며 결단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사명자의 길을 가는 이들이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 같이 함께 부르며 사명자의 고백을 새롭게 하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서워 숨고 도망갔던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 제자들이 나중에 제비 뽑아 보충 받은 맛디아를 포함해서 모두가 다 사명자의 길을 가고, 순교자의 길을 가며 평생을 주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매진한 것을 보라.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전공과 직업과 세상살이가 다 다르지만 오직 나를 자녀 삼으시고 제자의 삶으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범을 따라서 충성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중에 보면 사도 바울 곁에서 동역하던 바나바나 디모데나 브리스길라 아굴라나  누가나 마가나 아볼로와 같은 이들이 각자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사명의 사람들이며 동역자들이었는가.

성령을 받은 부활의 증인
증인이 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복음전파의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비겁하고 소심하고 나약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고 무서워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 받고 나니까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담대한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다. 성령의 힘이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이와 같은 강조가 아닌가. 부활하시고 사십 일 후에 승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 바로 성령 받으라는 강조였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그런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 예수님이 해 주신 대답이 무엇인가.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7-8)

그렇다. 성령 받아야 한다. 그렇게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인데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성령 받고 나니까 완전히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가.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사도 바울과 같은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은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은총인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던 악날한 모습의 사울이었는데 그가 부르심을 체험하고 성령 받고 나니까 당시에 그 유명한 이방 전도자 사도 바울로 거듭나지 않았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다. 성령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열매가 달라지는 법이다. 오직 성령만이 대답이다. 성령 충만하면 걱정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고 두려워 할 것도 없다.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의 <왕의 십자가>라는 책에 보면,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고난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그날, 모든 것이 역전되고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 올 것이다. 영광의 기쁨이 우리가 겪은 모든 상처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팀 켈러 목사는 1989년 뉴욕 맨해튼에서 50명의 성도들과 함께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였다. 오늘 날은 주일마다 팔 천 명의 성도들이 예배하는 교회가 되었다. 성령께서 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주인공으로 인도하시는 하늘의 능력이다. 성령을 받고 가정과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복음의 승리자들이 되자.


죄의 용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강조하신 내용이 서로의 죄를 용서하는 삶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용서는 최고로 성숙한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이다. 마음에 맺힌 원한이 있는가. 용서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며 내가 사는 길이다. 누구에게 손해를 보았는가. 누가 내게 경제적인 막대한 손실을 끼쳤는가. 누가 나를 해하고 모함하고 음해하고 욕하고 핍박하였는가. 용서하는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요 십자가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등지고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가고 숨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비겁한 행동을 다 용서하셨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치라고 사명자로 재 파송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씨름을 해야 한다.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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