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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누가 과연 큰 자인가(눅9:37-50)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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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8-12 22:27 조회 23,727 댓글 0
 
언제부터인가 세상교육의 목표는 대개가 서로 남들보다 더 큰 자가 되라’는 것에 집중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공부든 무엇이든 남들보다 더 잘해야만 한다. 집집마다 다 그런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부모들이 그걸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사전에도 없는 ‘기러기 아빠’라는 신종용어도 생겨났다. 아들딸이 성공하고 출세하는 일이라면 가족이 서로 다른 나라에 멀리 떨어져서 지낼 지라도 좋고 어떤 희생과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 내리라는 각오 속에 출발했지만 오히려 병들어 가는 가정들이 한 두 가정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성적순으로 자녀들을 평가하고 점수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아들딸들이 성공하거나 출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몰아가다 보니 인생의 본질적인 더욱 소중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개인의 실력과 사회적인 지위나 그의 역량이나 역할 등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그 무엇을 끝없이 요구받는 그런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싸움을 부추기는 세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끝이 없이 무엇이 되라, 어떤 지위를 확보하라, 얼마만큼을 소유하라, 무엇을 이룩하라고 요구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반대이다. 복음은 “무엇이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남들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갖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래야
천국이 나의 것이 되고
위를 받게 되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고 했다.
그래야
배부르게 되고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되며
그래야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이 세상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을 원하지 그 누가 끝이 없는 핍박이나 박해나 역경이나 고난이나 조롱과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래서는 안 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런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하는 변론”이 일어났다. 물론 그렇게 출발했던 제자들이 불행한 길을 자초한 가롯 유다 말고는 나중에는 모두 다 성숙한 사도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저들 제자들이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도 받고 은혜도 받은 결과이다. 오늘 날 성도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일까.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1875년 1월 14일에 유럽의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Kaisersberg)에서 출생하였다. 그 지역은 그가 출생할 당시에는 독일령(領)이었기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알자스가 원래대로 프랑스령(領)이 되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피아노 연주 솜씨가 뛰어 났다. 나중에 그는 그가 다니던 귄스바흐 교회에서 이미 10대 때부터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19살 때에 스트라스부르크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파리와 베를린에서 칸트의 종교 철학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유학시절에는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인 찰스 마리 위도와 친분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미 대학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뛰어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그의 실력은 파이프 오르간의 구조에 대한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위도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30살 때에 <음악가·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en Bach:le musicien-po&egrave;t)를 발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한 <예수전(傳) 연구> 등의 책을 쓰기도 하였다. 1905년, 30살 때에 프랑스 선교단의 보고서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교 의학부에서 의학을 공부해서 8년 후인 1913년에 의사가 되고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 해에 사회 활동가였던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현재의 가봉공화국인 당시의 프랑스령이었던 적도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는 가봉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Lambarene)에 정착하여 평생토록 의료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 활동은 그의 예상보다 많은 선교 비용이 필요했다. 그는 주변의 지인(知人)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그의 선교 사역의 필요에는 언제나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부부가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한 그 다음 해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가봉 랑바레네는 프랑스령이 되었고 독일 국적의 의료 선교사였던 슈바이처는 의료봉사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3년 후에는 결국 프랑스군 전쟁 포로가 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독일로 송환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 민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유럽 전역을 방문하면서 의료 선교를 목적으로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와 철학과 신학 강연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하며 쓴 작품이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Zwischen Wasser und Urwald, 1921)라는 책이다. 그의 의료 봉사활동은 점차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전쟁 포로에서 풀려난 지 7년 만인 1924년에 다시 아프리카의 랑바레네로 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결국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큰 선교 병원을 설립하여 대단한 의료 선교 사역을 펼쳐 나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복음 전도와 진료 사역에 전념하였다. 1924년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의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며 세계인의 존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중이던 1952년에 그는 77살의 나이에 노벨 평화상을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선교지에 나병환자의 진료를 위한 나환자촌(癩患者村)을 세웠다. 그 후에도 그는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고 91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연세 많은 몸을 이끌고 복음 전파와 의료 선교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는 음악가요 뛰어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요 의사요 신학자로서 자기 나라에서 얼마든지 안락하게 지위와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었겠으나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복음 전파와 의료 선교를 위하여 헌신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제자로서 파송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각색 병자들이 고침 받기도 하는 기사와 이적이 자신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적을 이미 보았다. 그런 제자들이 정작은 예수님 앞에서 서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고 말았다. 제자로 부름 받기는 했는데, 사도로 쓰임 받고 있긴 한데 아직 거듭 나지 못한 인간적인 냄새가 풀풀 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셨다.

누가 크냐
그런데 지금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의 문제로 다툼과 변론이 벌어진 것이다. ‘누가 크냐.’ 이 문제는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인생으로 지음을 받은 이후로 인류 역사에 계속되는 문제이다. 아담의 가정에 태어난 장남 가인이 동생 아벨을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쳐 죽인 사건의 바탕도 결국은 ‘누가 크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그러면 가인은 “도대체 왜 나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 드려지지 못했을까” 하는 원인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찾아나가는 신앙적인 겸허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런데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여 없애 버리는 것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 형제 사이의 관계를 상대적인 경쟁관계로 본 것이다. 신앙이 신앙 되려면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겸손한 신앙의 의지가 계속되어야만 한다. 내 곁의 그 누군가가 가족이든 형제이든 그 어떤 공동체의 동료이든 상대적인 것에 신앙의 본질이 가려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그 신앙은 병들고 만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떤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까를 계속하여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며 근본적인 신앙의 대답을 찾아 나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이다.

왜 신앙이 병드는가. 왜 2,000년 역사 속의 교회가 때로 변질되고 타락하고 병들게 되는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에게서 끝없는 은혜를 계속하여 겸손하게 공급받아야만 한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은혜의 공급이 끊기면 나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덧입어야만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금번에 KTX 기차가 한 시간이 넘도록 터널 속에 갇힌 채로 정전이 되어 암흑 속에서 전등도 꺼지고 에어컨 작동도 멈춘 채로 지옥행 열차와 같은 공포의 터널에 갇히는 사고가 일어났다.(2012. 7. 27)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을 향해 가던 KTX 열차가 부산 가까이에 있는 금정터널 안에서 한 시간 30분 이상을 정전 상태에서 터널 안에 갇혀 있었던 사고이다. 사고 원인은 열차 전기 공급 장치 이상으로 밝혀졌다. 오늘 날 기차 중에 가장 빠르고 편리한 고속 기차가 KTX이다. 그러나 전기 공급이 끊기고 나니 터널 안에서 암흑 상태에 방치된 채로 속수무책이었다.  나중에는 견인 열차에 의해서 터널 속에서 이끌어 내어야만 했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마치도 전기 공급이 끊기면 기차가 터널 안에서 공포의 감옥이 되고 마는 것처럼 인간이 나를 나 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눈을 깜빡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코로 숨을 쉬며 손과 발을 움직여서 무슨 행동인가를 하며 좌뇌와 우뇌의 건강한 사고 작용을 하며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의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장애 혹은 어떤 연약한 모습 속에 살아갈 지라도 지금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주님에게서 공급되고 유지되는 축복 아닌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그러므로 겸허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내 삶의 일체의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늘로부터 공급된다는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저들 간에 서로 ‘누가 크냐’는 논쟁에 휘말리라고 부르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저들 12명의 제자들을 제자로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자신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위를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앞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복음 9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이것이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다. 그 목적을 이루게 하시려고 제자로서의 능력과 권위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서로 간에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제자로서의 부르심에서 벗어난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우리는 남자 여자 어른 아이, 청년과 청소년을 막론하고 누구나 계속하여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본이 무엇인가.
성도로서, 신자로서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바탕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신자인 나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을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영접하기
예수님은 큰 충격 속에 제자들 보는 앞에서 어린 아이 한 명을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실물 교훈을 시작하셨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을 앞장세우는 생활이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앞장세우며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은 숫자로 하면 ‘1’이시다. 우리 인간은 ‘0’과 같은 존재들이다. ‘0’은 아무리 많아도 숫자가 아니다. 허수일 뿐이다. 그 앞에 ‘1’이란 숫자가 붙을 때에 그 많은 ‘0’들은 비로소 숫자의 의미를 갖게 된다.

요즘 한국교회 안에 ‘주기도문 일 만 번 기도하기’ 운동을 벌이는 목사님이 있다. 김향안 목사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主祈禱)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언제 부터인가 한국교회가 회의를 하면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언쟁을 하고 다투다가도 회의를 마칠 때에는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고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런 용도의 기도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는 겸허한 순종의 마음가짐을 갖고 기도하는 기도가 ‘주기도’가 아닌가 말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분이셔야만 한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항상 예수님을 앞장 세워야만 한다. 인류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너무나도 오래도록 우상 숭배를 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뒤 늦게라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다.

올 2012년에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영국이란 나라는 섬나라이다. 지난 날 영국에 세계에서 행한 식민지 역사로 인한 평가 앞에서는 찬반 논란이 복잡하겠으나 영국이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나라가 오늘 날과 같은 세계적인 국가가 된 바탕에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이다.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인 영국은 11세기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북쪽의 북(北)아일랜드로 건국된 국가이다.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될 때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게 되면서 오늘 날의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 되었다. 앵글로 섹슨 족과 켈트 족으로 이루어진 영국은 성공회 50%와 로마가톨릭교 11%와 개신교 및 기타 39%의 종교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인들은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여서 “셰익스피어와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잔 웨슬리도 영국인이 아닌가.  가는데 마다 엉겅퀴가 널려 있던 땅 영국으로 오늘 날의 영국으로 발전시킨 바탕에는 하나님 신앙과 예수님 신앙이 기초하고 있다.

누가복음 10장 30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에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보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모시고 가서 밤새도록 간병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먼 길을 가면서 그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였다.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여기까지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하여 질문했던 어떤 율법 교사에게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 교사는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 한 명을 곁에 세우고 교훈하고 싶으셨던 교훈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를 갖고 다투고 도토리 키 재기와 같은 경쟁심에 붙들리지 말고 서로를 섬기고 돌보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라는 강조를 하신 것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돌보는 자가 큰 자이다. 베푸는 자가 큰 자이다. 나누는 자가 큰 자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이며 이종 사촌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나중에 자신들 둘이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하나는 주의 우편에 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소문으로 다른 제자들 귀에 들어가면서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막10:41) 결국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다 불러 앉혀 놓고 분명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마가복음 10장 42절 이하에 나오는 일화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신앙생활의 원칙은 분명하다. 이천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변함이 없다.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영원한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나면 불행해지고 진리를 따르면 자유하게 되고 축복이 따르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앞장세우고 나를 예수님의 보좌 뒤에 숨길 때에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매사에 예수님의 평화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세상을 짓밟고 일어선다는 뜻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이름이며, 소망의 이름이며, 믿음의 이름이며, 섬김의 이름이며, 회복의 이름이며, 치유가 임하는 이름이고, 귀신이 떠나가며,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으며, 인생의 바람과 풍랑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 평화의 은총이며 능력의 이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은 불의를 이기는 정의의 이름이며, 거짓을 이기는 진리의 이름이며, 악을 이기시는 선의 이름이며, 어둠을 이기는 광명의 이름이며,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이름이며, 영원한 생명 즉 영생하게 하시는 이름인 것이다.

김우현 감독이 최춘선 할아버지를 여러 해 영상 추적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김포 공항 주변의 갑부의 아들이었지만 토마스 아켐피스처럼 주어진 부유함을 다 남들에게 나누어 주고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 운동에 앞장서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노년기에 맨발의 전도자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김우현 감독이 그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히말라야의 슈바이쳐 강원희 의료 선교사의 삶을 추적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 뜻이 무엇이겠는가.

누가 과연 우리를 위하는 자인가.
이번에 추천 도서로 소개해 드린 간증집인 <하나님 땡큐>의 저자 윤정희 부부는 그의 남편이 늦깎이 목사가 된 가정이다. 일곱 남매를 모두 다 입양하여 키우고 있다. 남편은 억대 연봉을 받던 안정되고 좋은 전공과 직장을 내려놓고 2002년도에 목원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 남편은 강릉중앙감리교회 소속의 병원 원목으로 환우들을 섬기고 있다. 아내는 강릉과 대전을 오가며 7명의 입양된 자녀들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사랑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저들 부부는 내외가 서로 남들에게 신장을 떼어 주기도 하였다.

우리가 다 저들 부부처럼 살아가지는 못할 지라도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위한 자들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 것은 하나님을 본 것이다. 한 번은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일화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강론을 계속해 주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0-14)

그리고 이어서 약속해 주신 것이 성령 즉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내용이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서 계속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 가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나와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역사에 손양원 목사님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나병 환자의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는 섬김을 다했다고 한다. 자기 두 아들 죽인 공산당 청년을 용서하고 입양하여 양자 삼았다. 두 아들의 장례식 때에 손양원 목사님이 말씀한 아홉 가지 감사는 언제 대하여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지 않는가.

한 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이들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이들인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노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르셨다. “금하지 말라 너희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깨우쳐 주셨다.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복음과 주의 역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자니라.
여기 이 말씀 가운데 복음의 오묘한 비밀이 숨겨 있는 것이다.
반대하지 아니하는 자는 위하는 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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