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그 모든 인생들은 영적으로 구분하면 두 종류의 인간들뿐이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인생만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며 경배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인생들은 아무리 권력이 높고, 금과 은이 많고 부요하고 지식이 많고 자랑할 것이 많은 것 같아도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인생일 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브라함의 때인 사천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본문의 2절에도 보면 이방인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시편 115편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4-8)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단순한가를 고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생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으로 초청하는 유명한 말씀 중의 한 곳이 바로 시편 115편이다. 그래서 시편 115편 9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라고 하였고 13절 이하에 보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시115:13-15)라고 하였다.
하박국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2:18-19)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이 같은 내용들을 진리인양 믿고 나무와 돌과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고 비는 인생들이 이 세상에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하박국서는 이와 같은 말씀에 이어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2:20)고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말하는 이들의 입술의 고백과 찬송에는 “예수는 주”라는 고백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도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라고 찬양하지 않는가. 그 동안 여러 장의 고린도전서의 편지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의 심각성과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안 써도 되느냐, 교회 안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느냐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을 언급하고 교훈하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시작하여 14장까지의 긴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예배의 소중함과 교회의 영적 질서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본문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1절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것’이란 영어 성경에 보면, ‘the gifts of the Spirit'이라고 하였다. 즉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는 것이다.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신 각양의 은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거저 부어 주시는 각양 좋은 것들을 말한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뿐만 아니라 색의 다양한 조화를 통하여 빛의 세계가 아름답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흰 것 일색 혹은 검은 것 일색이 아니라 그 모든 색깔들의 다양한 조화를 통하여 아름다움이 더해가는 것과 같다. 색의 삼원색이 무엇인가. ‘빨강 노랑 파랑’이 아닌가. 빛의 삼원색은 무엇인가. ‘빨강 초록 파랑’이다. 이는 마치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가 되시듯이 색과 빛의 기본 원색 세 가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하여 그 아름다움의 신비가 더해 가는 것이다.
지난 11월 12일 미국 뉴욕의 미술작품 경매장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라는 작품이 무려 1528억원에 경매되었다. 이는 그동안 최고 경매가를 유지하던 뭉크의 <절규>를 능가하는 사건이다. 영국 출신의 작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의 이름이 새롭게 떠 오른 것이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가 세웠던 1억 1990만 달러의 경매 최고가 기록을 1년 6개월 만에 갈아치웠다. 그림 한 점에 150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곳은 뉴욕의 한 갤러리로 밝혀졌다.
사람의 손끝으로 그린 미술 작품의 가치를 1500억원씩 주고 사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우주와 대 자연의 신비와 나의 주변 환경들과 나 자신의 건강이 이 만큼 유지되어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그 얼마나 벅찬 감격이며 신비이며 축복이고 은총인가. 당연히 두 눈을 떠서 보고, 당연히 두 귀로 잘 듣고, 당연히 모든 냄새를 잘 맡고, 당연히 입맛이 새롭고, 당연히 세치 혀로 표현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면 안 된다.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요 은총이요 신비요 축복이 아닌 것이 그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상에 해와 달과 별들로 인한 낮과 밤의 혜택을 끝없이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축복과 혜택을 골고루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먹이시고 입히시고 삼라만상과 우리의 건강을 이만큼 지키시고 보존하여 주시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최근 필리핀과 같은 이웃 나라가 엄청난 태풍 피해로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고 있는 소식을 접한다. 재난과 위기는 언제라도 있을 수 있고 누구라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서로가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되 지금 나의 나됨을 감사하며 내 속에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들을 덕스럽게 잘 활용하며 서로를 섬기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깨달아 알아가는 그 첫 시작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예수는 주’시라는 신앙의 고백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한 때 자동차 뒤 범퍼에 물고기 모양의 범퍼 스티커를 많이 붙이고 다니던 적이 있었다. 그 물고기 모양 안에 헬라어로 글씨가 쓰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큐리오스 이에수스’라는 이 말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로마 세계 안에서 엄청난 저항을 일으켰고 또 심각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당시에 황제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교회의 이 고백은 세상의 고백 ‘케이자르 큐리오스’ 즉 ‘가이사가 주시다’는 고백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역적이 되고 말았다. 오늘 날로 하면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북조선 역사의 영원한 태양이며 민족의 영도자’인 것처럼 말이다.
다시 1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제안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제대로 잘 알고 깨달아 서로를 잘 섬겨 나가는 교회의 성숙한 일원이 되기를 소원하는 전도자 바울의 간절함이 배어 있는 표현이다.
유익(有益)하게 하시려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
성도된 우리 모두는 각 사람에게 부여 해 주신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성도의 연합과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같은 한분이시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강조가 다 중요하지만 7절의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중요한 표현이다. 8절에서 10절까지에는 아홉가지 성령의 은사를 소개한다. 이를 다시 셋으로 나누면 지적인 은사와 믿음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로 나눌 수 있다. 지적 은사란 8절의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말한다. 믿음의 은사란 9절의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의 다섯 가지 은사를 말한다. 그리고 방언의 은사란 ‘각종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함’을 말한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골고루 나누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경험하여 아는대로 성도들의 연합이란 은사 따라, 직분 따라, 사역을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았는가. 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으로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사람이 언제나 항상 이렇게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를 통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있는가.”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로 말미암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쭐해 하고 교만하게 처신한다든지 혹은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공동체 안에 분열이나 다툼이나 혼란을 일으키고 교회의 영적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은사를 절제하고 덕을 세우고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는 방향으로 자제하여야 마땅한 것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명예나 허영이나 공명심이나 자랑이나 우쭐함으로 하고 남에게 대접 받는 방편으로 하면 나에게 은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고 갈취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각 사람의 은사를 통한 하나님의 뜻.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모든 일은 성령 안에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탈이 적고 서로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549장 찬송)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그런 고백이 있는 신앙생활을 겸손하게 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그 나중의 열매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라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니까 가롯 유다처럼 되는 것 아닌가. 성령 받은 초대 교회 무리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니까 사도행전 5장의 불행한 교회역사 기록의 주인공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사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디모데 후서 4장에 보면, 10절에 ‘데마, 그레스게, 디도’는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상처만 남기고 제 갈 길로 세상을 향하여 떠나가 버린 인생의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4절에는 직업까지 거론하면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며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라”는 교훈과 경고의 말씀도 빼어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르심과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의 고백과 자기 점검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계속하여 확인해 나가는 삶의 순례가 아닌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도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여기 ‘땅에서도’라는 의미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삶을 통하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씀은 너무나도 많다. 시편 40편에 보면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라고 하였다. 시편 143편에서도 다윗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였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데 그 10절 후반부에 보면,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는 산상 수훈의 설교 말씀을 통해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는 가르침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자질을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11장 20절 이하에도 보면 예수께서 여러 마을을 찾아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을은 받아 들이고 어떤 고을의 백성들은 전혀 잘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을 속 상해 하시면서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1-22)고 책망하고 경고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6)는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하신 적이 있으셨다. 예수의 마지막 밤 감람산에서의 기도 내용도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니었나.
그러므로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다 마찬가지여야 한다. 건강 젊음 시간 재물 돈 재주 은사 역량 경험 능력 지위 힘 권세 그 모든 것들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신앙인이 아닌가. 그래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 앞에 덕과 유익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주 안에서 주어진 은사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서로에게 유익과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주의 백성답게 살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