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승천 이후 성령을 받아서 탄생된 교회가 열 두 사도와 사도 바울 시대를 거쳐서 주후 43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적이 있다. 그 후 기독교의 역사는 천년을 더 흘러왔다. 그러던 중에 독일의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수도원의 수사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성경에서 벗어난 당시의 교회를 개혁하셨다. 개혁의 의지가 사람에게서 날 수 있으나 개혁을 성사시키는 힘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의 앞에서 정의의 눈을 갖고, 정의의 주장을 하며, 정의의 길을 가는 것도 물론 그 마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힘이시다. 올 10월 31일은 1517년에 마틴 루터를 통하여 천주교의 타락상을 향하여 95개 조항의 개혁문을 내어걸고 타락한 종교의 개혁이 일어난 지 496주년이 되는 해이다. 4년 후인 2017년이 되면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기념행사와 학술제등이 진행 될 것이다.
마틴 루터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경의 사람이었다. 그가 종교를 개혁할 수 있었던 힘은 성경으로부터 나왔다. 당시의 일반인들은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깨달아 알 수도 없었다. 그런 성경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독일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한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나중에 독일어 문법의 기초가 될 정도의 역작이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감옥에 갇혔던 청년 우남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영어 성경을 펼쳐 들고 한영대조 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씨름했다지 않는가.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셀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배재학당에서 만나서 저들에게 배울 수 있었던 기회가 주어졌음으로 영어도 깨우치고, 영어 성경도 읽고, 영한사전 혹은 한영사전을 편찬할 의지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커서 법률가가 되길 원했다. 그것이 출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산층의 광산업자였던 아버지가 볼 때에는 그 길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마틴 루터가 종교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용감하거나 담대하거나 지혜롭거나 위대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쓰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을 보라. 사도 바울이 이방의 사도가 되어 아시아와 구라파의 여러 지역에 다니며 나라의 국경을 넘고 이 도시와 저 도시를 쉼이 없이 다니면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본문 10절이 그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단 말이다. 이는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능멸하려 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부르시는 예수를 체험하고 삼일간 눈이 가려졌다가 나중에 다메섹 성에서 만난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다메섹 체험 중에 분명히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이 대화 후에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채로 사흘 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다메섹 성에 머물러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가서 만나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아나니아는 당황해 하였다. 소문에 듣기에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붙잡아다가 가두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악명 높던 주인공인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만나라고 하시나 하는 의구심과 불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해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다시 강조한 주님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에게 안수하였고 그의 눈이 띄어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고 눈을 열어 다시 보게 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았다. 곧 이어 세례를 받고 음식도 먹고 힘을 얻게 된 사울은 며칠 만에 각 회당에 찾아다니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의 변화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힘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울은 다메섹 성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전도현장을 목격한 다메섹 성민들은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핍박자 사울이 변화되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와 같은 체험 이후로 사울은 완전히 과거를 단절하고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이방 사도 바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자신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은혜에 대한 고백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사지백체에 모세 혈관 끝에까지 맑은 피가 흐르고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를 맡고 더위와 추위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이 모든 것부터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인 것이다. 우리 혀끝에 감각이 살아 있어서 달고 짜고 시고 쓴 맛을 느끼며 음식을 목구멍에 넘기며 소화 시키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신비한 은혜인 것이다. 걷고 뛰고 일하고 활동하고 계단을 오르고 앉고 설수 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연구하고 창조하고 성사시키고 성취하고 도전하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요 신비가 아닌가 말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다 보면 아내의 뱃속에 아기가 잉태되고 때가 되면 아름답고 예쁜 아기가 태어나는 이 생명 탄생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신비요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낯 설은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당이 건축되고 이 먼 곳에 찾아 와서 우리가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본문의 제목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정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 할 때에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를 닦는 지혜.
기독교에서 불교나 이슬람이나 유교나 도교나 그 이외의 타 종교에 대하여 언급하면 타 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어라고 한다. 왜 남의 종교와 남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고 판단하느냐고 저항한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기독교가 진리이 때문에 종교적 논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기독교만이 진리이다. 기독교에만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고 죄 사함이 있고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다. 기독교만이 영원을 가르치는 종교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인 시간관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 너머에 있는 영생을 말씀하는 것이다. 가령 불교의 시간관은 윤회설(輪回說)이다. 역사가 돌고 돈 다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선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그래야 다음 생에서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좋은 환경의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이치를 설파한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생에서 개나 고양이나 소나 돼지나 말로 태어난다는 말인가. 동국대학 불교대학장을 지냈고 미국 템플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도 받은 한국 불교계의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서경보 박사의 저서 중에 <윤회전생>이란 책을 대강 보면 그 목차 중에 ‘개로 환생된 어머니’, ‘구렁이 형제’ 등의 글이 있다. 그런 식이 윤회라면 잘 모르기도 하지만 관심도 두고 싶지 않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은 인간이 죽어서 개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형제가 구렁이가 되어 환생하기도 한단 말인가. 그것이 불교의 교리 중의 하나라면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더욱 더 한심하고 불쌍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더 말하면 타 종교를 무어라고 하는 것이 되겠으니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 말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알고 율법은 알았으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모르고 복음은 모르던 상태였다. 그런데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에서 변화를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실하게 믿고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다. 그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를 닦아 둔 다는 선언은 사실이며 참된 고백이다.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에 자신의 인생 터전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하는 예수 인생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 터를 잡는 다는 말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참 지혜를 깨달아 알게 된 모든 인생들의 영원한 삶의 기초이시기 때문이다.
몇 주 전에 소개하였던 정근모 박사의 책, <소명 앞에 무릎 꿇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란 책에 보면 한국 유리 최태섭 회장, 명지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학교 발전의 기수였던 유상근 전 통일원 장관, 이화 여자 중고등학교의 교장과 이사장을 지낸 신봉조 이사장 등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평소에 자신이 교분을 갖고 지내는 이들 중에 교회 학교 교사직을 대통령직보다 더 귀하게 여기던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의 창시자 밀라드 풀러 총재,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전 주한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레이니 대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국가 건설을 꿈꾸는 존 바두흐 로잔공과대학 총장, 열방대학의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 등의 신앙 간증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나라 안과 밖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주님의 부르심과 맡겨 주신 사명을 따라 예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는 신실하고 역량 있는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적지 않다.
인간은 오래도록 동굴에서 생활하거나 단층집을 짓고 살아왔다. 물론 지금도 인도네시아 밀림 속에 사는 원주민들 중에는 거의 벌거벗고 살면서 외침을 막기 위해서 30-40미터 높이의 나무 꼭대기에 원두막 같은 구조의 집을 얼기설기 만들어 놓고 그 높은 나무의 꼭대기를 원숭이처럼 타고 오르내리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발달은 집을 잘 짓기 시작했고 더 크게 더 높게 더 좋게 더 화려하게 더 편리하게 더 다양하게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나 싱가포로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10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들이 많지만 세계에서 가장 놓은 빌딩들을 가장 많이 건축한 나라는 이웃 나라인 중국이다. 인류학자들은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제 일위의 최강국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지난 2013년 7월 20일에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착공되었다. 지상 202층, 높이 838m의 초고층 빌딩인 ‘톈쿵청시(天空城市)’가 내년, 2014년에 완공되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 빌딩인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828m)보다 10m가 높다. 지하 6층, 지상 202층의 전체 건축면적은 105만㎡이고 건설비는 90억위안(약 1조 6000억원)으로 추산됐다. 건물 안에는 4,450개의 주거공간과 250개의 호텔, 객실, 학교, 병원, 사무실 등이 들어서 3만 명이 동시에 생활하게 된다. 또 다양한 문화·오락·체육시설을 갖추고 8만5000㎡ 규모의 농장과 8,000㎡의 화원도 조성된다. 특히 시공 방식에서 완전한 모듈화를 실현해 기초공사 기간을 제외한 건축 기간이 7개월에 불과하다. 4개월간 2만 명이 외부공장에서 28만개에 이르는 건물의 각 파트를 제작한 뒤 현장으로 운반해 3,000명이 3개월 이내에 이를 조립해 건물을 세울 계획이다. 이 건물을 기획한 위안다(遠大)과기그룹의 장웨(張躍)회장은 착공식에서 "기초공사는 내년 1월이면 완료되며, 완료와 동시에 외부에서 만들어진 건물파트들이 운반돼 지상공사가 시작된다"면서 "지상공사는 내년 4월이면 마무리되고, 내년 5월이나 6월이면 주민들이 입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국에는 미국의 초고층 빌딩 기준인 500피트(152.4m) 이상 건물이 500개에 육박하고 현재 건설 중인 것도 300여개에 이른다. 이에 따라 오는 2017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마천루를 가진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건물이 지어지려면 기초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터가 잘 조성되어야 한단 말이다. 인생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견고한 터로 삼고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만세 반석 인생이 되고 만세 반석 가문이 되고 만세 반석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날’의 불 시험을 이기는 상을 받을 만한 공적.
아무리 거대한 건물이라도 안전 문제가 철저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게 되고 만다. 우리는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건물이었던 미국 경제의 자존심과 같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이 이슬람 테러범들이 납치한 비행기 테러를 받아서 불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기억한다. 본문 12절에 보면 건물을 짓는 재료를 둘로 크게 나누었다. 금은보석은 견고하고 화려하고 좋은 것이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자연 친화적이기는 하지만 불에 약하다. 사실 불이 나면 약하기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 타 버린 불 속에서도 건물 안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남아 있지 않겠는가. 13절에서 말씀하는 ‘그날’은 누구에게나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 날은 예루살렘 멸망의 날이며 핍박의 날이라는 단순 해석도 있지만 아니다. 이는 마태복음 12장 36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심판 날’이며 데살로니가 5장 2절에서 말씀하는 밤에 도둑같이 임할 ‘주의 날’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보기를 잘 하자. 불의 공적이란 심판을 말씀하는데 심판 날에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을 받는 다는 말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성도들 중에서도 그 행위에 따른 행위 상급이 다르단 말씀이다. 물론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로 지은 집과 같은 신앙도 구원을 받기는 받는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에 의한 것이지 행위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처럼 불 가운데서 재만 남듯이 폭싹 다 타버리면 그런 구원은 15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다. 상급은 행위에 관한 것이지만 구원은 믿음에 과한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소중한 깨달음이요,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에게 있어서나 오늘 날의 우리 각 사람에게 있어서나 그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하게 중요한 구원의 진리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그러나 구원 받는 성도들 중에서도 상급이 서로 다르단 말씀이다.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금번에 극동방송 사옥이 신축되어 봉헌예배를 드렸다. 400억 상당의 건축 헌금을 전국의 시청자들이 보내 왔다고 했다. 어느 분은 북한에 두고 온 동생들을 생각하며 헌금하였다. 시골에서 논과 밭으로 라디오를 들고 다니며 극동방송을 즐겨 듣는다던 어느 시골 교회 여 집사는 고춧가루 50근을 방송국으로 보내 와서 임직원들이 골고루 서로 구매하므로 금방 건축 기금이 되었노라고 하였다. 어떤 분은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병원 생활 하던 중에 극동방송이 은혜가 되어서 헌금하였고 한다. 이런 이들의 손길이 6만여 명이 모여서 400억 거대한 공사를 안전하게 마치게 된 것이다. 예수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도 하셨다. 우리 모두 상 받을 만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자.
성도의 자기 발견.
왜 성도의 삶이 귀하고 복된 것인가.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성도란 누구인가를 규명하고 선언하는 유명한 말씀이 아닌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그렇다. 성도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인 헬라어 ‘naov"’(나오스)라는 단어는 성막 전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일컫는 용어이다. 성막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그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는 성전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 성도가 세상에서 죄를 멀리하고 악을 경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마음 안에 계시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라고 부르는 찬양가사 그대로이다.
1.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2.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 모두 다 이런 믿음으로 지혜로운 건축자 되어 험한 세상의 불의 공적을 이기며 금과 은과 보석 같이 빛나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거룩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다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고 상급 받는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