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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의 신앙(합1:12-2: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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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9-28 16:42 조회 20,051 댓글 0
 
사뮈엘 베케트 (Beckett Samuel)는 1969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탄 프랑스의 희곡과 연극의 극본을 쓰던 세계적인 작가이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 나서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프랑스로 이주해서 살면서 작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책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작품이 있다. 고도라는 뜻이 발음으로는 ‘외로운 섬’ 이쯤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고도’즉 ‘Godot’는 영어의 하나님 표현인 ‘God’과 프랑스어의 하나님 표현인 ‘Dieu’의 합성어를 발음대로 표기하여 우리말 책에서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세계 제 2차 대전을 경험해야 했던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1939년에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국 국민이라는 안전한 신분을 이용해 프랑스 친구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그가 가담하고 있던 단체가 나치에 발각되어 당시 독일의 비점령 지역이었던 프랑스 남단 보클루즈에 숨어살게 되었다.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얘깃거리 하나가 동이 나면 또 다른 화제를 찾아내야만 했는데 바로 이것이 ‘고도’에 나오는 대화의 양식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도'를 기다린다. 1957년 등장인물 중에 여성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샌 퀸틴(San Quentin) 교도소에서 공연되었을 때 1,400여 명에 달하는 죄수들은 예상을 뒤엎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저들 죄수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고도’란 ‘가족이 기다리는 바깥의 세상, 빵, 자유’라고 서로 소리쳤다. 1960년대 폴란드에서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은 ‘고도’가 러시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통치 하의 알제리에서 공연되었을 당시 땅이 없는 농부들은 그들에게 약속되었으나 아예 실시되지 않은 토지 개혁에 관한 연극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기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살아간다.

하박국 선지자가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망한 상태였다. 이스라엘 민족인 동족들 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상태에서 남쪽에 남아 있던 유다 나라의 왕과 고관대작들과 백성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상숭배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탐욕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박국은 남 왕국 유다의 16대 임금인 요시야 왕 말기인 주전 612-605년경에 선지자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당시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등한히 한지 오래였다. 그런 때에 하박국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하박국은 ‘껴안은 자’ 혹은 ‘매달리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선지자이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세상을 짝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때에 하박국은 달랐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려는 믿음의 선지자였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께 껴 안겼고 그 또한 하나님을 꼭 껴안고 붙잡고 매달려서 주님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려는 믿음 위에 굳게 섰다. 그는 레위 지파 출신으로 제사장이었거나 성전에서 찬양하는 성가대원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3장의 내용이 기도이기도 하지만 곧 찬양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인 3장 19절에 보면,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하박국의 내용이 끝나지 않는가.

하나님은 하박국의 입을 통하여 장차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이웃 나라인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힘을 가진 침략자 블레셋의 손에 맡겨서 고난의 풀무 불에 던져 넣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박국이 시작되는 1장의 초반부에 보면 이처럼 타락하고 방종하게 사는 동족인 유다 백성들을 책망하고 벌 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하나님께 여쭙는 하박국의 기도가 나온다. 그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때가 되면 열국이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라워할 심판의 날이 다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납고 독수리처럼 날렵한 군대가 쳐들어 와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포를 행하는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본문이다. 하나님의 이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해들은 하박국이 하나님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새롭게 건축된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리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의 말씀을 묵상하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신앙 체험을 가졌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을 대하게 된다. 신앙의 고백은 곧 그 사람 자신의 신앙의 면모를 알게 하는 길이 아닌가.

하박국은 답답하고 불안하고 장래를 예측할 수조차 없는 죄와 악이 가득한 예루살렘 성과 유다 땅에 사는 동족들을 바라다보면서 하나님께 계속하여 기도하고 있다. 2장 1절에 보면 하박국은 파수대와 성루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고 있다.

하박국은 세상에 일어나는 풍조에 밀려 사는 그런 부평초(浮萍草) 같은 인생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는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답고 과연 선지자답지 아니한가. 오늘날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만 바라고 보고 싶어 하는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서 사는 이름뿐인 성도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국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그 기다림과 소망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의 신앙은 주님을 기다리되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요 기다림의 종교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산꼭대기에 방주를 건설할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하는 일을 인정해 주지 않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취급할 때에도 100년 세월을 꿋꿋하게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살았다. 성경은 그런 노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다. 노아 시대의 남자들은 여자를 그 외모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아내로 취하였다. 성경은 그런 당시의 인간상을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는 선언이었다. 하나님은 당시의 인간들이 좌악이 관영하고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땅에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노아 시대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았던 의로운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은 모두 다 홍수 심판 때에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노아를 깔보면서  육체의 방종한 욕망 가운데 살아가던 인생들이 모두 다 어디로 갔는가. 노아의 당시나 오늘 날이나 심판과 구원은 실재한다. 하박국을 통한 하나님의 묵시도 마찬가지이다. 하박국서가 타락한 유다 백성들을 사납고 무서운 블레셋을 통하여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와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3장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하고 노래하고 있다. 3장 13절을 보라.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3장 18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지금 하박국은  죄와 악을 일삼으며 회개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고 영원히 번영할 백성인양 타락하게 살고 방종하며 사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안타깝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거창한 축복의 언약을 말씀해 주셨다. 장차 아내 사라를 통하여 낳을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알과 같은 중다한 후손이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셨다. 그러나 정작 10년 세월이 다 지나가도록 별과 모래의 수와 같은 많은 후손은커녕 아들 하나 태어나지 않았다. 그 때 기다림에 지친 아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침소에 들여서 아들을 낳으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하였고 그 때에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이 아닌가.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판단하면 그런 결과를 맺고 마는 것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사천년 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몸종인 하갈을 통하여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 오늘 날 이스라엘과 중동의 쉽게 해결되지 않는 불화의 불씨가 되고 만 것을 잘 알지 않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어떻게 태어나셨는가.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길고도 오랜 세월이 흘러가야만 하였다. 가령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 여 년 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던 남 왕국인 유다의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기다리는 생활인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남편 될 요셉도 마리아의 태중에서 자라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안전하게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살아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배역하는 타락의 무리들 가운데서도 남은 자(remnant)의 은총을 덧입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메시아 언약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아 왔다.

아직은 한 낮의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벌써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덥다, 덥다’ 말하는 동안에 가을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고 맑은 가을 하늘에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광경이 눈에 들어 올 것이다.

세월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살다 보면 고난도 가고, 역경도 가고, 슬픔도 가고 모두 다 지나갈 것이다. 기쁨이나 즐거움이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밤에는 울음이 기숙했다가도 아침이 되면 기쁨으로 바뀌기도 하고 반면에 아침나절에는 속이 상하고 마음 아픈 일이 있다가고 저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그러므로 흥망성쇠(興亡盛衰)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모두 다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어제 저녁 나절에  5층에 꾸며진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오롯하게 마음잡고 앉아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카오 톡으로 문자가 들어오기에 열어 보았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고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서울 남 연회 김기현 목사가 보낸 동영상이었다. 올해 초에 돌아가신 황수관 박사가  어느 방송사의  TV에 나가서 방송한 내용이었다.

83세 되신 아버지와 53살 된 아들이 요즘 같은 여름에 퇴청마루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날아 와서 창가에 앉았다. 아버지게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새냐”  “아버지 까치잖아요” 잠시 후에 아버지가 똑 같은 질문을 다시 하였다. 아들이 퉁명하게 대답하였다. “아버지 까치 모르세요. 까치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앉아 있던 퇴청 마루에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다시 또 아버지가 똑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아들이 저 새 이름이 뭐지?” 그 때에 아들은 참으로 퉁명스럽게 큰 소리로 아버지를 나무라듯이 대하면서 대답했다. “아이 참 아버지, 까치도 모르세요.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으시는거에요.” 멀쑥해진 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일어나시더니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한 참 후에 아버지는 50년 전인 33살 때에 지금의 이 아들이 당시 3살 때에 날마다 썼던 육아 일기와 같은 내용의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어느 날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오늘 아들이 창가에 날아 와서 앉아 있는 까치가 무슨 새냐고 물어 오기에 까치라고 가르쳐 주었다.  ‘아빠 저게 뭐야’ 반복되는 질문에 나는 ‘으응 까치야 까치’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무슨 이유인지 어린 아들이 까치의 이름을 묻고 또 묻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복해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헤아려 보니 무려 23번이나 반복해서 까치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이다. 오늘도 그런 어린 아들이 귀여워서 몇 번이고 안아주고 또 다시 안아 주었다.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뭐 대략 이런 내용의 일기였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기다려 주는 것이다. 약해도 기다려 주고, 부족해도 기다려 주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기다려 주고, 못마땅하여도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믿음 또한 스스로 기다리는 것이며 상대방에 대하여도 끝이 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기다리고 또 다시 계속하여 기다리며 기도하며 주께서 이룩하신 온전한 성취와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로 함께 같이 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기다림의 진정한 가치가 있게 된다.

선지자 하박국은 어떤 신앙으로 주의 말씀을 기다리며 살았는가. 그의 신앙 고백 속에 하박국이 주의 말씀을 기다리던 믿음을 만나보게 된다.

 
첫째,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신앙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예배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셔서 언약을 주시고 이끌어 가시며 동행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개인적인 하나님이요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도 개인적인 하나님이셨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곳곳마다에서 ‘나의 하나님’이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 신앙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내용들을 처처마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편 18편 1-3절의 고백은 그 대표적인 고백이 아닌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He said: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The LORD is my rock,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is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He is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I call to the LORD, who is worthy of praise, and I am saved from my enemies.)

시편 19편 14절에도 보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나님을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에 바탕을 두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 예수님 체험, 성령님 체험에 근거하여 부르심을 받고 사명자로 쓰임을 받는 것이다. 이는 신구약의 모든 인물들이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는 지난 이천년간의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여호와는 나의 거룩한 자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한 아버지이시다. 때로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술과 마약과 담배와 온갖 탐심과 음란과 생각과 입의 말이 추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한 죄와 악이 나병 환자처럼 덕지덕지한 아버지들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아버지요 흠과 티가 없으신 아버지요 온전하고 완전하고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으신 아버지이시며 온갖 의와 진과 선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와 같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 갈 때에 비록 죄가 많은 인생이지만 그 죄와 악과 허물을 용서 받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은총이며 축복이며 선물인가.


셋째, 여호와는 만세전부터 계신 주님이시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삼라만상의 창조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주님이시다.


넷째, 믿는 자를 사망에서 영생으로 부르시는 주님이시다.
이 세상에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힘은 단 한 가지뿐이다. 돈 많아도 소용없고 권력과 젊음과 미모와 힘과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오직 사망과 죽음을 이기는 힘은 생명뿐이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영생의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구원과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박국서는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처럼 그 분량이 방대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주옥같은 예언의 말씀들로 가득한지 모른다.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의 꽃과 같은 얼마가 귀하고 보배로운 선언인지 모른다. 이는 마치도 구약 속의 신약이라고 할 만 한 신학적인 진보가 있는 놀랍고 도전이 되는 구원의 말씀인 것이다.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이며 신구약 성경 전체의 바탕이 되는 말씀이다. 이는 신약에서도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 인용되었다. 이 말씀은 그 앞부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교만한 자와 불의한 자들의 나중은 멸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려 하는 의인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을 축복해 주신다.

다섯째, 믿지 않는 이방 나라를 들어서 선민인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섯째, 반석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에게 영원한 산성이요 피난처요 견고한 바위시란 뜻이다. 오직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소망을 표현하는 성경적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라는 고백이다. 이곳에 지하 2층 설비를 위해 토목 공사를 해 내려가다 보니 10미터 이상을 파 내려간 저 깊은 바닥이 견고한 반석이었다. 할렐루야. 건물이 반석 위에 세워 지듯이 나의 믿음,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이 반석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꼭 껴 안겨 살고 하나님께 꼭 붙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신명기 32장 4절에도 ‘그는 반석이시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15절에는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이라고 했다. 18절에는 ‘너를 낳은 반석’, 37절에는 ‘그들이 피하던 반석’이라고 하였다. 시편 31편 3절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라고 하였다. 이사야 17장 10절에는 ‘네 능력의 반석’이란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 사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신 말씀도 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인생의 반석 삼고 살아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그런 인생과 가정과 가문과 나라와 민족을 오래도록 붙들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일곱째, 악과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정결한 눈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 없고 악이 선과 함께 할 수 없듯이 거짓이 진실과 함께 할 수 없는 법이 아닌가. 그러므로 정결한 눈을 지니신 하나님은 이 땅의 악과 패역을 그대로 보고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다윗은 시편 5편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와 오만한 자들은 주님의 눈앞에 서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5:4-8)
여덟째,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이시다.

아홉째, 의(義)로운 자를 삼키는 악인들에 대하여도 길이 참고 잠잠하신 하나님이시다.

열 번째, 악인들의 우상 숭배하는 현실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범사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우리가 범죄하는 현장에서 즉시로 책망하거나 벌을 주시거나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길이 길이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신다. 항상 깨달음을 가진 주의 백성들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길이 참고 잠잠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들의 아버지이시다.

주의 말씀을 기다리는 은혜로운 신앙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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