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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히11:17-31) 201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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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2-02 21:24 조회 19,792 댓글 0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나요?”하고 물었다.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이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한 아이는 잠시 더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봄이요!” 이런 생각이 창조적인 생각이 아닌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말은 믿음의 말이다. 히틀러의 정권 아래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과 실험실로 끌려 갈 날만 기다려야 했던 유대인들의 감옥 벽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태양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그 사랑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처럼 장래에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이 아닌가.
 
히브리서 11장에는 4절의 아벨에게서 시작하여 32절의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살던 구약 시대의 인물 17명의 이름이 소개 되어 있다. 저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살아갔다는 점이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믿음으로 살아간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를 사건 중심으로 간략 간략하게 소개한다. 믿음으로 살던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의 침략 앞에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였다. 여호수아 때에는 가나안의 철기 문명에 맞서서 이기고 또 이겼다. 사사 시대에도 사사 바락은 하솔 왕 야민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이겼다.(삿4:15) 사사기 7장 22절에 보면 사사 기드온은 미디안을 이겼고, 사사 입다는 암몬을 이겼다.(삿11:32) 임금 다윗은 블레셋과 여브스와 아말렉과 에돔 족속과 싸워서 이기고 또 이겼다.(삼하 5-8장)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의를 행하였다. 사무엘 하 8장 15절에 보면 사무엘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임금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의의 사람이었다. 그 다윗은 사무엘 하 7장 9-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 즉 영원히 왕권이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맹렬하게 달려드는 사자의 입이라도 막아섰다. 사자 굴에 여전히 살아 있는 다니엘을 보고 오히려 놀란 것은 다리오 왕이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불의 세력이라도 이겼다.(단 3장)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 다윗은 사울 왕의 칼날이라도 피하고 또 피했다. 엘리야는 사악한 왕 아합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왕상19:1, 10), 엘리사는 아람 왕의 칼에서도 구원을 받았다.(왕하6:12-19) 임금 히스기야는 병들어 연약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사38:1-9) 기드온이나 다윗은 이방의 침략 앞에서 전쟁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용감하게 해결해 낼 수 있었다.
35절 이하의 말씀까지 다 묵상하려면 주일 예배로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오늘의 본문에는 아브라함에 관한 짧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12명의 증손자들 중에서 요셉에 관한 내용을 한 구절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게 소개된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이라고 정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3대 후손의 믿음.
8절부터 19절까지의 긴 분량 가운데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적지 않게 알고 있다. 그는 75살에 고향과 본토와 친척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따라 나선 믿음의 조상이다. 오늘날로 하면 4천 년 전의 인물이니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물론 당시나 오늘날이나 목축 문화권의 사람들은 논과 밭에서 농사하는 농경 문화권의 사람들과 달라서 물 좋고 풀이 많은 곳을 따라서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이끌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 그리 큰 부담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실 목축 문화권의 저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시 저 곳에서 이곳으로 풀이 자라나는 정도를 보아서 돌고 도는 이동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따라 나선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하나님은 장차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은 많은 후손을 약속하여 주셨다. 그렇게 25년을 기다려서 나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정상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 17절은 이것을 ‘믿음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창세기 22장의 내용을 주목하여야만 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먼저 설명되어 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고 했다. 시험 문제는 그 문제의 답을 푸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 문제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3절부터 13절까지는 하나님의 시험 문제 앞에 아브라함이 순종해 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22:3-4)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엿보게 된다. 모리아 산 아래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그 곳에서 나귀와 함께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아들 이삭과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 종들의 곁을 떠나기 전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하는 말에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22:5)는 말씀 말이다. 분명히 이 제사 길을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떠난 삼일 길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한다. 아들하고 올라가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예배 하고 아들과 함께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하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말이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신앙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하신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과 예배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고 되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게하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였다. 그 때에 잔등에 잔뜩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던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까지 묵상하는 데는 그리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러 주신 장소에 도착하자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 이삭이 지고 간 나무들을 벌여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찰나(刹那)에 하나님이 이 사건에 개입하셨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에 의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행위였을 뿐이었다. 짐승 대신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이방 제사에서나 볼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순간에 그 현장에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를 동원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셨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창22:12) 숨 막히는 장면은 이렇게 하여 멈춰졌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수풀에 숫양 한 마리가 뿔이 걸려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 왔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수풀에서 풀어내다가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날 이후로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ha,=r]yI hw:hy])라고 불렀다. 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On the mountain of the LORD it will be provided.)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지 않고 도저히 아무나 쉽게 따라 할 수도 없는 행동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고 행동화하였다.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 와서 히브리서 11장 18절과 19절은 아브라함이 평소에 갖고 있던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씀들이다. 18절에 보면,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했고 19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하였다. 여기 말씀의 신비가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랬다. 자신의 나이 100살에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아내 사라가 90살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 자체가 죽은 것 같은 아내의 몸에서 낳은 아들임으로 하나님은 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에 하나님은 죽이기고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리라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이다. 지금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와 같은 믿음의 모습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절 끝에 소개 된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를 입증한다. 물론 아들 이삭이 죽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죽여 바치려 하였으므로 되돌려 받고 숫양으로 번제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아들 이삭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아들’과 같은 선물인 셈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믿음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의 생애는 우여곡절이 끊임이 없는 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잘되고 번성해 가기 시작하였다. 20절과 21절은 그와 같은 내용을 한 절씩으로 설명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인가. ‘축복’(祝福)이란 단어이다. 이삭도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야곱에 대하여 그런 축복을 하였고, 야곱 또한 요셉과 그의 두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축복하였다.
 
그 시작은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하려던 그 이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축복의 말씀을 말씀해 주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5-18)
이 말씀은 창세기 27장 27절 이하에 나오는 이삭의 야곱 축복 내용으로 이어진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7-29)
요셉의 믿음.
히브리서 11장 17절 하반절에 보면,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했다. 외아들이라도 드린 아브라함의 헌신적이고 순종하는 믿음의 열매는 야곱의 아들들 대인 4대째에 가서 요셉으로 인하여 창성해 졌다. 그리고 다시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에서 절정에 달한다.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여 나중 17년을 더 살 수 있었던 야곱은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12아들들과 요셉의 두 아들들인 손자들에게 까지 일일이 축복하는 예언의 말씀을 유언으로 하였다. 그 중에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한 말이 이것이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49:22-26)
 
우리가 잘 아는대로 요셉은 17살에 적신으로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간 신세가 되었다. 그런 그가 13년 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7년 풍년에 이어진 흉년 2년차인 아버지에게 되돌아가지 못하고 들판에서 애굽으로 팔려간 지 22년 만에 꿈처럼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아버지 야곱이 출세하고 성공한 아들 요셉으로 인하여 고센 땅에서 효도를 잘 받고 노년기를 지내다가 147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들 요셉을 축복한 축복의 말이 이것이다. 요셉의 생애는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점점 잘되는 생애가 되어 갔다.
 
 
모세의 믿음.
23절 이하에 소개된 모세의 믿음을 보라.
첫째, 안일한 삶을 거절(拒絶)하는 믿음이다. 거절해야 믿음의 상급을 받는다. 창세기 39장 8절에 보면 요셉은 주인마님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에 갔으나 그 일로 인하여 술 맡은 관원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지 않았는가. 거절 잘하면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苦難)을 극복(克服)하는 믿음이요
셋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견디고 상(賞)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이요
넷째, 참고 인내(忍耐)하는 믿음이요
다섯째, 홍해를 건너는 유월절 믿음이요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한 믿음이다.
 
이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를 치는 재앙이 있던 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는 가정의 장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죽음을 넘어 갈 것이라고 하셨다. 이 사실을 히브리 백성들에게 알렸고 그렇게 말씀대로 순종한 가정에는 장자를 치는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보지 않고 구원 받고 영생하는 것을 가르쳐 준 예표적인 사건이다. 이와 같은 믿음의 사건들은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을 홍해 건너듯이 육지처럼 건넌 후에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트렸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30절은 이와 같은 여호수아 시대의 믿음으로 인한 표적을 한 절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1절에서 기생 라합의 믿음을 칭찬하였다. 라합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던 하나님의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고 여리고 성이 멸망하던 때에 그의 가족과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리고 성민이 되었다. 기생 라합은 나중에 살몬과 결혼하였다. 그 살몬은 룻기 4장 20절과 21절에 나오는 보아스의 아버지이고 다윗의 고조할아버지이다. 그러하니 기생 라합은 다윗 임금의 고조할머니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인가. 마태복음 1장 5절의 예수님 족보에도 보라.
 
누구나 믿음으로 살아서 상급을 풍성하게 받고 승리하는 신앙의 명문가를 이룩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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