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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어느 한 초대 교인의 죽음(행7:54-6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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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8-04 20:31 조회 20,415 댓글 0
 
대개의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자연 수명을 모두 다 향유한 후에 죽음을 맞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가 전쟁 중에 죽는다든지, 혹은 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고 항거하다가 순국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독재자의 탄압에 의해서 희생되는 경우도 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 중에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 애굽의 바로 왕은 히브리 아기들 중에서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히브리 민족의 강성한 수적 성장을 두려워한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모세가 태어나던 때에 엄청난 사내아이들이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예수께서 태어나던 해에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동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중에서 두 살 미만의 아기들은 모두 다 죽였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하여 숨고 도망 다니던 다윗은 놉이라는 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다. 그가 다윗에게 먹을거리와 마실 것과 칼을 주었다. 그 내용에 보면 아히멜렉은 하나님께 묻고 나서 다윗을 도왔다. 그런데 다윗을 도운 이 사실이 사울 왕에게 알려졌다. 18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임금 사울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도왔다는 판단이 되자 제사장들을 핍박하는데 놉 지역에 거주하던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그 마을에 사는 남자여자 어린아이 젖먹이와 소와 나귀와 양까지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다 칼로 쳐서 죽인 적이 있다. 세계의 역사 중에는 이런 사건들과 억울한 죽음과 정치적인 목적의 집단 살해 사건들이 비일비재하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싸우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진리를 믿는 믿음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순교(殉敎)라고 한다. 순교 이전에 심한 고문을 받는다든지,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기도 한다.(히11:36) 히브리서 11장 37절에 보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받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절인 38절에 보면,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씀 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실로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이다.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이 땅 위에 왔던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칼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골고루 자세하게 나오는 내용들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서 자기 아내를 삼은 사실에 대하여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비난하게 되면서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헤롯은 온 나라의 백성들이 다 아는 선지자인 세례 요한 죽이는 일에 대하여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 마태복음 14장 5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헤롯은 백성들의 눈 이전에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믿음이 없던 자였다. 마침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로 인해 낳은 딸이 연회석에서 춤을 추자 기뻐하였다. 헤롯이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딸이 제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묻자 세례 요한을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 달라고 하였다. 그 순간 왕 헤롯은 근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곁에 함께 앉은 자들 앞에서 맹세하며 자기가 한 말이 부담이 되자 사람을 명하여 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의 목을 칼로 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그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딸에게 주니 그것을 어머니에게로 가져갔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서서 그의 시체를 장례 하였고 이 사실이 예수에게도 전하여졌다.(마14:1-12)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문의 스데반은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일곱 명의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즈음의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 안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들의 무리까지도 부활의 복음에 복종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도들의 복음 현장뿐만 아니라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자 큰 기사와 표적이 계속하여 일어  났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인으로 받아들여진 자유민들 중에서 스데반과 진리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상대방의 여러 사람들이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이겨 보려 하였으나 스데반 집사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말을 능히 당할 자가 없었다. 결국 스데반은 미움을 받고 대적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스데반을 미워하는 이들은 돈을 주고 사람을 매수해서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악한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까지 충동시켜서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 앞에 세우도록 하였다. 스데반의 대적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 사람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다.”고 허위 사실을 만들어 고발하였다. 스데반은 붙잡혀서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착잡한 표정이 아니라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그 때에 대 제사장이 나서서 스데반에게 질문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냐”(are these charges true?) 사도행전 7장 1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때에 스데반 집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복음에 대하여 변증할 좋은 기회에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등이 참여한 거대한 종교 재판석 상에서 차근차근 평소에 깨달아 알고 믿고 있던 성경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탄생한 반면에 이날 스데반의 복음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복음의 진리를 듣고 난 후의 반응.
스데반의 복음 증언이 끝나자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과 그 현장을 지켜보던 무리들이 앞장서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다. 오늘 날로 하면 새까만 법복을 입은 판사들이 앞장서서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서초구의 법원 사거리 앞에서 스데반을 과천 입구쯤의 산자락에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였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스데반의 복음 증거 내용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 스데반을 돌려 쳐 죽였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스데반의 복음 전파 내용은 사도행전 7장 2절부터 53절까지의 내용으로 논리 정연하고 침착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해서 이삭,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에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고 개입하셨는가를 차근차근 증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시 때때로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던 조상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에 대하여 꼭꼭 집어 교훈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에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그의 증언 마지막 부분에 가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공모하고 협잡한 불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분명한 논조로 증언하였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예수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와 그들 대 제사장의 문중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들이 들으라고 고발하는 말로 증언을 마치었다.

사도행전 7장 51절부터 53절까지의 내용에 보면,
· 목이 곧은 사람들아
·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조상들과 같이 성령을 거슬린 사람들아
· 의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살인자들아
· 천사가 전하여 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한 자들아

회개(悔改)란 잘 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회개란 영적으로 잘못되고 신앙적으로 잘 못 행했거나 잘 못 살아 왔거나 잘 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가령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동안 광야의 산 아래서 아론을 앞장세우고 백성들이 금을 가져가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절하고 제사한 행위를 어떻게 쉽게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회개란 영적으로 철저한 것이고 처절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작당을 해서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게 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내어 준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가.

스데반 집사의 표현을 빌리면 “의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살인자들아”하는 직설적인 표현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자들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당시에 산헤드린 공회원이나 대 제사장들의 권력의 힘이란 막강한 것이었다. 그 거대한 권력의 힘 앞에 달걀로 바위를 치듯이 할 말을 다 하였으니 그들이 가만히 듣고만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진리는 진리이고 빛은 빛이며 어둠은 어둠이 아닌가. 어찌하여 빛을 어둠이라고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하겠는가. 스데반은 빛을 빛이라고 말한 후에 돌에 맞아 죽은 순교자이다. 스데반의 복음 증언을 다 듣고 난 관원과 대 제사장들은 스데반의 진리 선포에 마음이 찔렸다. 그런데 베드로 때와는 달랐다. 저들은 일제히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왜 이를 갈았을까. 이는 “크게 노하다. 노발대발하다. 몹시 화를 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유대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총집결한 재판 자리에 홀로 서 있던 스데반의 증언은 담대하고 침착하였다. 그 내용이 마치도 잘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들을 모두 다 증언하였다. 복음 증거의 변증 기회를 마친 스데반의 하늘을 우러러 보는 얼굴은 여전히 천사처럼 빛이 났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다. 성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표현은 여러 차례 나온다.(마26:64, 눅22:69, 엡1:20, 골 3:1, 히1:3)그러나 본문처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는 표현은 여기뿐이다. 진리를 진리 되게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순교할 스데반의 천국 입성을 맞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신 것이다.  대적자들의 궤계와 간악함을 고발하고 진리를 선포한 스데반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장면이다.

6. 25 때의 일이다. 어느 마을에 한 경건한 기독교인이 피난도 가지 않고 마을의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마을의 전쟁고아들을 돌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공산당이 쳐들어 왔고 그는 체포되었다. 총살 직전에 한 공산 당원이 그가 고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어린 인민들을 위한 일이니 그를 죽이지 말고 그의 아들을 죽이자고 선동해서는 그의 아들을 총살하였다. 일순간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만 것이다. 세월이 지난 전쟁은 휴전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아들을 죽인 그 공산당은  UN군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주한 UN 본부를 찾아 갔고 자기 아들을 총살시킨 그 공산당을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였다. 그를 살려 주면 양자로 삼고 잘 돌보아 새사람 만들겠다고 간청하였다. 이런 사실이 UN군 사령관에게 전달되었고 살아 풀려난 그 공산당은 양 아버지의 복음 전파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그의 실명이 거론 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의 힘을 교훈하지 않는가.

우리가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고 말하는데 과연 성령 충만한 상태란 무엇일까. 때때로 좀 막연하지 않은가. 지난주에 미션 연구소 이사회가 열렸다. 최근에 두 교회가 힘을 합하여 태국 치앙마이 산족 마을에 학교를 건축하였다. 문제는 건물을 짓는 일보다 학교의 운영이 아닌가. 어떤 교사들에 의하여 어떤 학생들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 건물의 화려함보다 열배 백배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곳 산족 마을의 형편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던 초기의 모습과 비슷하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도시마다 처처마다 기독교 명문 학교들을 발전 시켜 오고 복음을 아는 인재들을 길러 내지 않았는가. 아마도 세월이 지나면 그 학교에서도 그런 인재들이 자라날 것이다. 이런 저런 협의를 마치고 헤어질 때에 후배 목사 한 분이 자신이 쓴 설교집 한권씩을 건네주었다. 그 내용 중에 보니 이런 글을 인용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만일 아이가 참을성 있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그 아니는 인내심을 배운다.
만일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자신감을 배운다.
만일 아이가 칭찬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만일 아이가 무엇이든 허용하는 분위기 속에 자라면
그 아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만일 아이가 자신이 받아 드려지는 환경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스스로 좋아 하는 법을 배운다.
만일 아이가 인정받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배운다.
만일 아이가 나누는 걸 보면서 자라면
그 아이는 자비로운 마음을 배울 것이다.
또 만일 아이가 정직함과 공정함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만일 아이가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세상이 살아갈 만한 멋진 곳임을 배운다.
그리고 만일 아이가 평화로움 속에서 자라면
그 아이는 마음의 평화를 배울 것이다. 

어른이든, 젊은이이든, 청소년이든, 어린이이든 성령 충만함이란 이런 내용들을 골고루 잘 터득하고 십자가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람다운 사람, 가족다운 가족, 사회인다운 사회인, 신자다운 신자로서 가정과 학교와 세상과 교회 안과 밖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의 앞에서 비겁하지 않고
약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재물의 소유와 필요 앞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며
복음의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성경적인 평화를 사랑하며
재물이나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육신의 욕망에 빠져 살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돌보고 섬기며
베풀며 살아 갈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진정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스데반은 몇 살을 살았는지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평생의 삶이 그러하였고 죽음의 순간도 남달랐다. 그는 복음을 증언한 후에 “보라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고 하였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성도의 천국 체험인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던 무리들.
스데반의 복음 증거가 끝나자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재판에 참여했던 권력자들은 모두가 다 같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왜 큰 소리를 지른 것일까. 자신이 없으면 오히려 큰 소리 치게 마련이다. 마음에 찔리고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한 자신들의 심경을 억제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히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것이다. 자신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착잡한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고 더군다나 “하늘이 열렸다, 인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자 모든 이들이 약속한 듯이 그 동안 참고 있던 악한 감정과 대적하는 마음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 터져버린 것이다. 그래서는 귀를 막고 달려들었다. 귀를 막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패역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관원들의 마음은 성령 충만하게 복음을 증언하던 스데반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스데반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들이 저들에게는 마음을 째는 양편에 날이 선 검과 같았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 앞에 마음이 찔리자 회개하기는커녕 귀를 막고 스데반을 죽이려고 일제히 달려 든 것이다. 결국 저들은 사회적인 지위나 유대 사회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지위를 잊어버린 채 폭도들로 돌변하여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인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잘 관찰해 보면 누구를 불려서 시킨 것도 아니다. 저들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대제사장들이 직접 나서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 나라에는 그 어떤 누구도 직접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저들은 일제한 한 마음으로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그 무리들 중에는 청년 사울도 함께 포함 되어 있었다. 성경은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와 부르심을 체험할 때에 몇 살이었는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본문에 보면 그가 이미 아주 젊은 청년의 나이에 산헤드린 공회의 낮지 않은 지위를 확보할 정도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던 청년 공회원이었음으로 알려 주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도 젊디젊은 판검사나 청년 국회의원들이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시에 청년 사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까지 지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개인 수학한 인재였다.(행22:3) 모세의 율법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권력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58절에 왜 하필 증인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청년 사울의 발 앞에 두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울은 당시에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을 목격했던 증인들 중에서 나중에 혹시 자신들에게 미칠지 모르는 후환에 대한 두려움을 청년 권력자 사울에게 부탁해도 될 만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죽음.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은 그때서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돌에 맞는 고통을 참고 이기며 죽어 가던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7:59)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눅23:46)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듯이 에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어느 누구이든지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오면 무엇을 유언하고 무슨 고백을 할 것인가. 죽음의 순간까지도 이 세상에 귀하게 여기고 붙들고 놓지 못하며 집착하고 의지하던 그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요 철학자였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50년 내로 교회는 사라질 것이고 100년 내로 성경은 지구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큰 소리 쳤다. 그는 “하나님은 죽었고 성경은 거짓이다”고 떠들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기독교를 배척하는 글도 많이 썼다. 그런데 그는 84살에 죽었고 그의 집은 프랑스 성서공회의 건물이 되었다. 그 집의 마루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성경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비하고 놀랍지 않은가.

사람은 살아서도 잘 살아야 하고 죽음도 잘 맞이하여야 한다. 스데반의 죽음은 감동적이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얼마나 엄숙하고 장엄한 장면인가. 반면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대 제사장들의 영혼은 얼마나 불쌍한 영혼들인가. 돌에 맞던 스데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하며 무릎을 꿇었다. 대적자들의 손에서 스데반을 치는 돌들은 계속하여 포탄과 같이 날아 들었다.  스데반은 고통속에 죽어가면 다시 또 소리를 질렀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얼마 후 스데반은 숨을 거두었다. 스데반의 시체 위에는 그의 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돌무더기들이 뒤 덮여 져 있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서 잔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마지막 기도에는 힘이 있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어쩌면 이렇게도 예수님을 따라 죽음을 장엄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 스데반은 에베소서 4장 13절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주인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교훈하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는 말씀을 죽음의 순간까지 실천한 사랑의 실천가요 순교자였다.

사도행전의 8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런 사울인데 사도행전 9장의 내용대로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변화되어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서는 대 사도가 되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스데반의 엄숙한 죽음이 사울의 마음에 영적 진동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때가 차서 예수님이 핍박자 사울을 불러 쓰기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붙들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 형제나 자녀들의 영혼을 예수님이 꼭 붙들어 쓰시길 기도하자.

며칠 후에 다가오는 6. 25 전쟁 63주년 기념일이다.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의 역사 앞에 복음 평화 통일을 기도하는 우리는 스데반과 같은 기도를 드리며 내 몫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사랑과 공의와 진실의 복음을 전파하며 복음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순교자적인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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