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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1-6) 201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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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0-27 00:42 조회 19,605 댓글 0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1-6) 2014. 10. 26
종교개혁기념주일
종교개혁기념주일
 
 
호세아서 전체가 그러하듯이 본문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회복을 촉구하는 내용을 반복하여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은 경제적인 회복이나 건강의 회복 이상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두 번(마9:13, 12:7)이나 반복하여 인용하실 정도로 구약 성경의 말씀 중에서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9장 9절 이하에 보면, 한 번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던 길에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제자로 부르셨다. 마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마태의 집에 가셔서 음식을 잡수셨다. 그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곁에 찾아 와서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시비조로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듣도록 이런 말씀을 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마9:12) 이 말씀에 이어서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기 ‘긍휼’(矜恤)이란 말씀을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는 ‘자비’(慈悲)라고 하셨고 호세아서의 본문에서는 ‘인애’(仁愛)라고 하셨다. 그 히브리어는 'dseje''’(hesed)라고 해서 ‘인애, 긍휼, 자비, 동정, 관용, 충성, 헌신’ 등의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이는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마음 상태를 일컫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호세아 6장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서 돌아가자’ 라든지 혹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씀은 모두가 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 이웃과의 사랑을 회복한 삶을 살아가자는 촉구의 말씀을 반복하여 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가정에 사랑이 식어 버렸다면 아무리 임금의 대궐 같은 큰 집에서 살면 무엇하고 재산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물론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런 설명을 들으면 사랑이 식었는데 재산도 없고 재물도 없고 돈도 없는 빈털터리 상태보다야 더 낫지 않느냐고 이상한 쪽으로 상상을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실상이 그러하였다. 저들 남북 왕조의 백성들에게 살 집이 없다든지, 재물이 적다든지, 경제적으로 핍절하다든지, 먹을거리가 모자란다든지 그런 것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19명의 왕 중에서 13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 II세(B.C. 793-753)때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다음 대의 6명의 임금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선지자였다. 북 왕국의 마지막 임금은 선지자 호세아와 이름이 같은 호세아(B.C. 732-722)왕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을 시작하던 여로보암 II세가 왕으로 있던 당시의 북 왕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선지자 활동을 시작한 호세아의 말씀 중에 “지금은 안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쉽게 저들에게 받아 들려질 리가 없지 않나. 지금 한창 번성하고 안정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그러다가는 망한다.” 이런 말을 하면 그 누가 좋아하고, 그 어떤 누가 쉽게 받아 드리려고 하겠는가.
 
호세아를 통한 심판 예언의 시작은 호세아서 1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전하는 선지자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착잡하였겠는가.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태어난 삼남매의 이름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장래를 경고하는 심판의 내용을 담게 하셨다.
 
큰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의 ‘이스르엘’이라고 지었다. 둘째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의 ‘로루하마’라고 지었다. 셋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로암미’라고 지었다. 이런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마음이 무겁지 않나. 그런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을 향해서 계속하여 회개를 촉구하신 말씀 중의 일부가 본문이다.
 
선지자 호세아는 앞장서서 백성들에게 촉구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본문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인간의 식어진 사랑.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이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수 있는데. 무슨 하나님인가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우리나라로 하면 구한말의 정치적인 불안정과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 식민지시대의 처절한 불행과 6. 25를 겪어야 했던 온 민족의 참담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남한 만이라도 오늘 날처럼 번영하는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며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이 점점 등한해지는 시대 현상이 팽배해가고 있지 않나.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오늘 날의 우리나라처럼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임금까지의 사시 시대 이후 120여년의 통일 왕국 시대가 솔로몬 말기에 끝나지 않았나. 나라는 두 동강이 났고 남 왕국 유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주변의 남 유다로 명맥을 이어 가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 10지파의 힘을 규합한 북 왕국은 애굽에서 올라온 여로보암을 초대 임금으로 해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였다. 하나님이 선민으로 뽑아 내셔서 출애굽하고 여호수아 시대의 가나안 정복 전쟁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사 시대와 통일 왕국 시대를 맞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유다와 이스라엘 두 나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저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따로 따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예배자로 살아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경건 생활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고 우상을 숭배하며 물질의 번영 시대를 누리면서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하나님’ 하고 살고, ‘여호와여 여호와여’ 하고 하나님께 제사하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앗세라를 비롯한 각종 이웃 나라의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를 덧없이 받아들이며 하나님 신앙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호세아서 주인공인 남편 호세아는 선지자이며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고멜은 선지자의 아내이면서도 걸핏하면 길거리로 뛰쳐나가서 아무 남자의 품에나 안기며 되는 대로 막 살아가는 방탕한 여인이었다. 가정들 중에 그런 남편 때문에 속 상해하고 ‘사네 못 사네’ 혹은 ‘사네 죽네.’하는 경우가 있다지만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은 그 반대였다. 남편 호세아는 아내에 대해서 정숙한데 아내의 바람기가 잦아들 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이 마치도 선지자 호세아의 부인 고멜의 방탕한 생활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임금으로부터 온 나라의 백성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을 짝하며 사는 형편없는 형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몸은 집안에 있지만 그 마음이, 그 생각이 바람이 나서 자꾸만 밖으로 벗어나 버린다면 그 허망해진 마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되잡을 것인가.
 
선지자 호세아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4절이 그런 내용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면 좀 더 실감이 난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사랑하며 섬기며 경배하며 살기를 원하시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영어성경에 보면 ‘disappear'즉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다. 그 상태를 아시는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신 하나님이 안타깝게 아내와 같이 대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에브라임과 유다 즉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왕국유다 백성들 모두의 실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 버린 지 오래단 말씀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며 살아보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 유다의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부터 아침 안개나 이슬이 아침 햇볕을 받아서 사라지듯이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호소이신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호세아 2장 19절과 20절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셨다. 장가든다는 우리 식 표현을 원어나 영어 성경으로 보면, ‘betroth’ 즉 ‘약혼한 사이’라는 말씀이다. 신랑이신 하나님의 결혼 선물은 ‘공의, 정의, 은총, 긍휼’과 같은 품목들이다. 신부를 향한 신랑의 이와 같은 결혼 선물은 신부의 손가락과 손목과 목과 귀에 끼어 주고 걸어 주는 다이아몬드와 금은 패물과 진주와 각종 화려하고 값진 보석들보다 천배 만 배 소중한 결혼 선물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저들에게 약혼하고 저들에게 장가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버리고 떠난 것이다.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배반하고 떠났단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 예언.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참고 또 참다못하신 남편 하나님이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심판의 말씀이 5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통하고 저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저들을 죽이셨으나 저들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단 말씀이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는 말씀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의 빛을 가릴 수 있는 어둠의 힘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이 책망과 심판을 시작하시면 막을 수 없는 빛이 급하게 천지를 덮듯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그러면 왜 심판을 ‘빛’으로 비유하셨는가 하면 심판의 빛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어둠의 악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여전하신 사랑.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랑이시다. 그렇게 죄악 되고 그렇게 못되고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친히 달려 죽으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그 십자가 사랑을 그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기독교의 십자가도 우상이 아니냐는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예수께서 못 박혀 돌아 가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한 몸에 다 짊어지신 고난의 십자가요 용서의 십자가요 죄 사함의 십자가요 부활의 십자가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극치는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이 많지만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은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하면 나의 귀하고 값진 것을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주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였다. 사울 임금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의 아버지 왕이 그렇게 미워하고 죽여 없애려고 하는 다윗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고 위해 주었는가. 그러므로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니까.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 교회사랑, 성도간의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도 이젠 반려동물을 위하는 인구가 꽤나 많아졌다. 어떤 이들은 버려진 유기견을 집안에 받아 들여다가 다섯 마리, 열 마리 더불어 같이 지내는 이들도 있다. 그런 반려동물 사랑을 한 두 마디의 사랑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응답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마땅한 인간의 모습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기를 촉구하신 것이다. “오리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를 찢으시던 하나님이 왜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시겠다고 하사나. 우리를 치시던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겠다고 하시나.
 
2절의 해석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틀 날에’ 혹은 ‘셋째 날에’라는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난의 때가 끝날 것을 ‘이틀’이라 했고, ‘셋째 날에’는 장차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해석도 의미가 깊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로 버림 받고 앗수르의 심판과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겪고 다시 해방되고 약속에 땅에 돌아오는 회복도 크지만 주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영원한 부활과 영생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리라는 말씀이라는 해석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씀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자는 촉구의 선언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체험하여 깨닫고 알고 믿고 따르며 섬기자는 강력한 초청이며 권면이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시다. 진리의 발견,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knowing about God’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여 아는 ‘knowing God’의 경험에 바탕을 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예수께서 삼년 동안이나 부르셔서 제자 삼으시고 함께 지내던 제자들조차도 예수께 대하여 혹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 관계가 분명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하루는 제자 중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제자 빌립에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분의 완전하신 사랑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150장 찬송의 가사를 보라.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나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 십자가의 사랑이라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응답하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 온 인생, 진정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고 경배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다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도 달라야 한다.
 
데이비드 허버트 도날드가 쓴 <링컨>이란 책에 보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대한 일화가 참으로 많다. 1858년, 링컨이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갔을 때 일이다. 상대방인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 후보는 링컨과 노예제 문제를 놓고 공개 토론을 벌이던 중에 링컨을 향해 "두 얼굴을 가진 자"라고 비난했다. 이때에 링컨은 자신의 약점인 얼굴의 생김새를 웃음의 소재로 승화시켰다. "여러분, 제가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면 지금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 링컨이 오늘날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데에는 그만의 넉넉한 마음과 여유와 유머가 그를 지도자로 세워 나가게 한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초반 명문가 출신 장교들은 삼류집안 출신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항상 얕잡아 봤다. 북군의 주력부대인 포토맥군을 이끌던 조지 매클렌런 장군도 그 중 하나였다. 매클렌런 장군은 링컨 대통령에게 좀처럼 전황을 자세히 보고하지를 않았다. 링컨은 그런 그에게 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늘 닦달을 했다. 기분이 상한 매클렐런 장군은 링컨 대통령을 놀리기로 마음먹고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 각하, 전쟁 중에 암소 6마리를 포획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답장을 써서 전쟁터로 보냈다. "장군, 젖을 짜시오(milk them)"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 전쟁의 격동기에 정치와 군사적인 불안정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을 하나님의 신부처럼 덧입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오늘은 497년 전인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종교의 개혁, 신앙의 개혁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나약해 보이는 평범한 수사 마틴 루터를 통해서 거대해 보이기만 하던 로마 가톨릭을 향하여 폭탄선언을 하게 하셨는가. 마틴 루터가 말한 ‘오직 은혜,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 아니면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성도된 우리에게 오늘,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담긴 성경과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면 오늘 날 교회의 희망이 무엇인가.
 
새벽 빛 같이 임하시며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총처럼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믿고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며 높여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바탕은 무엇인가. 6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나 번제를 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아니지 않나. 성도된 우리가 제사와 번제 즉 예배를 매 시간마다 잘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된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주를 향한 인애 즉 사랑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그 것.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하냐는 말씀이다. 제사와 번제의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보다 천배 만 배 중요한 것은 그 분을 향한 나의 마음 즉 태도이다. 가정에서, 직장과 일터와 사업장과 학교와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우리 가정 달라졌어요, 우리 아이 달라졌어요, 우리 남편 달라졌어요.”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필요한 이유가 무언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달라지길 원하시고 변화되길 원하신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가족사랑, 부부 사랑 등 인간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새로워지기를 원하시고 또 원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 5, 11) 그리스도 예수의 그 마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힘써 깨달아 알아 나가는 복된 계절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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