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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전11:1-10) 201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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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0-19 22:19 조회 19,463 댓글 0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전11:1-10) 2014. 10. 19
 
 
 
우리 속담 중에 “곶감 빼어 먹 듯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내일에 대한 설계나 장래에 대한 계획이 없이 당장 입에 달고 좋게 여겨지는 일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하루하루 되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빗대어 하는 말 이다.
 
전도서 11장은 10절 분량의 길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나 그 교훈은 매우 다양하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란 표현은 단 두 번 나온다. 5절에 보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9절에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삼백 예순 다섯 날의 한해가 가듯이 각 사람의 일생이 강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것이다. 곁에서 대하던 어린이들이 10여년 만에 훌쩍 커서 이젠 어른 키보다 더 크게 자라 있는 모습을 보라. 애들이 쑥쑥 성장하듯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사람이 100년을 살면 36500일을 살게 된다. 물론 그 중간에 윤년이 있으니 며칠 더 살겠지만 말이다. 100년은 짧고 36500일인 꽤 긴것처럼 여겨지는가. 아니다. 인생은 물이 흘러가듯 지나가 버리고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면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9절에 먼저 보면, 청년들에게 즐겁고 기쁘게 마음에 원하는 길을 가고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대로 행하며 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본문에는 ‘그러나’라는 상황을 반전하는 용어가 두 번 나온다. 9절 말고 그 앞 절인 8절에도 보면, 사람이 사는 여러 해 동안 하루하루 즐겁게 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그러나’이다. 무엇이 ‘그러나’인가. 지금 당장 즐겁고 기쁘게 살지라도 ‘그러나’ 그 뒤에 언제인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캄캄한 날’이 적지 않게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캄캄한 날’이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피치 못하게 겪게 되는 고난과 불행과 역경과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시련과 환난과 피할 수 없는 재난과 재앙과 죽음의 순간까지를 포함하는 말씀이다.
 
자, 그러면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란 무엇일까.
 
 
베푸는 생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은 딱딱하고 넓적하게 구워진 것이다. 이것을 만약에 흐르는 물 위에 던지면 잠시 동안은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게 될 것이다. 실제 그런 경우가 있고 누군가가 그 던져 놓은 빵을 물에서 건져 내서 주워 먹을 수도 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말씀은 그런 내용이다. 실제로 떡이나 빵을 물 위에 던지거나 혹은 씨앗을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면 그 씨앗은 흐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 가다가 그 어디에선가 뭍에 도착하게 되고 그 곳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서 꽃이 피고 다시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었다. 또 다른 해석은 배에다가 이것저것의 물건을 싣고 강이든 바다이든 그 어느 물 위이든 이곳에서 저 곳으로 이동하며 상업을 계속하면 때가 되면 이익을 얻게 되리라는 교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전도자인 솔로몬의 때에 국제적으로 해상 무역이 발전하여 실제 배를 타고 물건을 이 나라 저 나라에 팔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는 국제 무역이 발전하였다. 귀하고 값진 물건들을 싣고 강과 바다를 건너 먼 길을 가려면 바람과 풍랑의 위험도 적지 않고 반드시 이익을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물 위에 떡을 던지는 것과 같은 그런 일들이 계속되는 중에 이익도 생기고 번성도 하고 발전도 하고 누군가에게 유익도 주고 혜택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씀 그 대로 말이다. 이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구제와 자선을 베풀며 살다 보면 그 선을 행한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다가오게 될 것이란 교훈을 담고 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라는 말씀도 이와 같은 선하고 착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많은 이웃들에게 행하며 살라는 권면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여덟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일곱이면 족하다고 여기지 말고 계속하여 선하고 좋은 일을 계속하여 나가라는 권면이다. 물론 이런 해석도 있다. 무엇을 투자할 때에 한 군데만 투자하지 말고 일곱 여덟 군데로 나누어 분산 투자해서 이익이 골고루 생기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교훈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2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살아가다 보면 무슨 불행, 무슨 재앙을 만날는지 인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니 말이다. 뱃길로 귀한 것을 실어 나를 때에도 한 배로 나르지 말고 일곱 여덟 배에 나누어 실으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바이킹과 같은 해적이 있었고 오늘 날에도 현대화된 무기로 중무장한 소말리아 해적과 같은 적들의 침입을 완전 방비하기가 어렵지 않나. 재앙도 많고, 걱정과 염려와 불안도 많은 세상에서 흐르는 물에 떡을 던지듯이 선을 행하며 살지 않는 다면 그 인생은 점점 더 삭막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란 교훈이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천 즈음에 있는 동원산업의 자동화 냉장창고 외벽에 ‘바다로 미래로’라는 거대한 홍보판을 보게 된다. 45년 전인 1969년에 시작된 동원산업은 오늘 날 수산유통, 식품, 건설, 포장재 등 18개 계열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필요기업으로서 성장해 가고 있다. 자본금 10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 500톤급 참치 연승선으로 수산업을 시작한 김재철 사장은 오늘 날 국제적인 기업가로 발전해 왔다. 2012년에는 연매출 4조원을 달성하였다. 그는 여수 국제엑스포 유치위원장도 맡아 일했다. 미국 최대 참치 브랜드인 starkist도 인수하였다. 동원 참치는 지난해부터 중국 시장에 진출하여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김재철 사장은 오늘 날 어린이의 꿈을 키워 주기 위하여 어린이 도서를 계속하여 지원하고 매년 중고대학생과 유학생 등 6,00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익스플로러’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젊은이들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직접 방문하고 꿈과 도전을 키워 나기는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한 사람의 곁에 보고도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르게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정성을 다하여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장면을 말씀하신 내용을 우리는 잘 안다. 누가복음 10장에만 소개된 유명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은 강도들에 의해서 옷도 다 벗겨졌고 강도들에게 맞아서 거반 죽은 상태처럼 되어 있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그 현장을 목격한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기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기를 위해 비상용으로 준비해 가지고 다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다. 거기 누가복음 11장 34절의 ‘가까이 가서’라는 그 행동이 귀한 행동이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보고 피하여 지나간 사건 현장에 가까지 가서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하여 그를 응급처치하고 돌본 것이다. “119에 연락을 하면 되지 왜 자기가 나서서 그를 돌보았을까” 그렇게 예수의 비유 말씀을 곡해 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에서 그 환자 곁을 밤새 지키며 치료를 도왔고 다음 날 먼 길을 가면서 필요한 치료비인 은화 두 데나리온을 그 주막 주인에게 건넸다. 뿐만 아니라 그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비유의 말씀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 온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 앞에 비유로 대답하신 말씀이시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면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러자 그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러자 그 율법교사는 다시 시비조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앞서 나눈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 말씀이시다.
 
자, 그러면 성도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러므로 우리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전도자의 이 교훈을 깊이 생각하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가진 것을 가지고 물 위에 떡과 빵과 씨앗을 던지는 그런 선행을 시작할 수도 있고 계속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의 변화이다.
 
사무엘 상 25장에 보면 나발이란 목축업자에 대한 일화가 소개된다. 그는 양이 3,000마리요 염소가 1,000마리였다. 4,000마리의 짐승을 목축하는 것이나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런 그의 집에 그 많은 짐승들의 털을 깎는 날이 되었다. 늘 들판에서 야인처럼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하여 지내야 했던 당시의 다윗이 그의 곁을 따르는 자들 중에 소년 10명을 보내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광야에서 먹고 쓸 식료품과 생필품을 좀 얻어 오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발의 반응은 차가웠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이들에게 어찌 떡과 물과 고기를 주겠느냐”며 냉랭한 반응으로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다윗은 몹시 화가 났다. 그의 곁에서 함께 지내던 600여 명 중에서 400여명에게 칼을 차게 하고 나발의 양털 깎는 현장으로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나발의 집에서는 나발이 다윗의 사람들을 박절하게 대한 사실을 나발의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이 여 주인인 아비가일에게 알렸다. 그 동안 들에서 양과 염소를 칠 때에 다윗의 일행들이 저들에게 밤낮 없이 담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주었으면 주었지 해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때에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급하게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금 방 잡아서 요리한 양 고기 다섯 마리 분량과 복은 곡식 다섯 부대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급하게 나귀에다가 싣고 남편 몰래 소년들을 앞장서게 하고는 서둘러 다윗의 있는 곳을 향해서 찾아 나섰다. 한 참을 나귀를 타고 달려가던 아비가일 일행은 호젓한 산 어귀에서 다윗의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화가 식지 않았던 다윗은 아비가일을 만나자 “그 동안 우리 일행들이 너희 짐승 떼에 악을 행한 적이 없거늘 우리가 행한 선을 이렇게 악으로 갚느냐.”고 말하며 “내가 나발에게 속한 남자들을 내일 아침까지 한 사람이라도 남겨 놓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벌컥 큰 소리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 마자 나귀에서 내려서 얼굴을 땅에 대고 빌기 시작하였다. 나발의 가족들 중에 남자들이 몰살당할 위기를 여 주인 아비가일의 겸손한 지혜로 피하게 된 것이다. 사무엘 상 25장 24절부터 31절까지의 성경 말씀 중에 기록된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엎드려 다윗이 화를 풀기 원하며 고백하는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 가운데 이만한 지혜로운 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현숙한 여인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아비가일의 말을 들은 다윗의 마음은 봄 눈 녹듯이 녹았다. 다윗은 그 현장에서 아비가일에게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2-33)고 칭찬하였다.
 
아바가일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 나발은 왕의 술상처럼 차려서 잔뜩 먹고 술에 취해 있었다. 아비가일은 다음 날까지 남편에게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술에서 깬 남편 나발에게 어제 다윗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나발은 낙담하여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 후에 나발이 죽고 말았는데 사무엘상 25장 38절은 나발의 죽은 원인을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하였다. 나중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 왕의 아내가 되었다.
 
선과 악, 의와 불의는 같이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선과 의와 빛의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악과 불의와 어둠을 멀리하시는 창조주요 섭리자이시다. 선을 선으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흐르는 물에 식물을 던지는 우리, 물 위에 떡을 던지는 축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생활.
현대는 과학과 의학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해서 바람의 부는 바람의 방향과 바람의 양과 바람의 속도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알아맞힌다. 그러나 태풍과 토네이도와 같은 큰 바람이 덮칠 때에 보면 인간이 그 바람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고 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또한 태중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기의 성장 과정을 뱃속을 들여다보듯 자세하게 의학 장비의 도움을 빌려서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나 5절의 말씀처럼 인간이 어찌 바람의 길을 완전하게 알며, 태중의 아기 뼈가 어떻게 자라나는 지를 제대로 다 알 수 있겠는가. 알면 알수록 그 가운데 담긴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과 섭리에 대하여 경탄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는 전도서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인생이 이 땅 그 어디에 있을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경외하며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라고 하면 하나님 안에서 6절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실함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너는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여기서 말씀하는 아침 혹은 저녁이란 말씀 그대로의 아침과 저녁일 수도 있겠으나 아침이 어린 때와 청년의 날이라면 저녁때는 중년의 날이요 노년기를 말씀하는 말씀일 수 있다.
 
농부에게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그 때마다 하여야 할 일이 있고 그 때를 놓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인간은 그 누구나가 때와 시기를 분별하여 항상 그 때 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교훈의 말씀인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아인쉬타인의 외모와 그의 운전기사의 외모가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아인쉬타인이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이 대학 저 연구소 할 것 없이 때때로 분주한 시간을 쪼개서 상대성 이론 특강을 하고는 하는데 그의 운전기사가 보이게는 항상 아인쉬타인의 강의을 듣고 또 듣다가 보니 나중에는 그 내용을 다 알게 되고 나중에는 싱겁고 지루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한 번은 “선생님 그런 강의라면 나도 할 수 있겠습니다.”하고 말하자 “그러면 다음번에 특강 부탁이 들어오면 내가 자네를 모시고 갈테니 자네가 특강을 하게”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드디어 그런 기회가 왔고 운전기사가 아인쉬타인 박사를 대신하여 박수를 받고 등단하여 상대성 이론에 대한 열강을 잘 마쳤다. 문제는 질문을 받는 시간이었다. 재치가 있던 운전기사는 “그런 질문은 우리 운전기사도 압니다.”하고는 아인쉬타인에게 대답할 기회를 넘겼다. 이 정도의 비슷하게 하고 시늉내서 하는 정도로는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되 성실한 삶을 가꾸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안동 삼베 만드는 과정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서 일일이 베실을 준비하고 삼베 한 필을 직조해 내기 까지 그 준비와 진행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값이 비쌀 이유가 충분하였다. 삼베 한 필을 직조하기까지에는 일일이 입에 침을 묻혀 가며 무릎 위 허벅지 위 맨살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비벼 대며 곱고 곱게 만들어낸 베실 4000킬로미터를 마련해야 베 한 필을 직조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한결같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한결같이’가 무엇인가. 그 4000킬로미터의 베실이 한결같은 굵기와 견고함과 색상을 유지하도록 온갖 정성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씨줄과 날줄을 엮어 내는 직조 과정을 거쳐서 세계적인 안동 삼베 한 필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안동 삼베 말고도 우리나라의 지역 중에 몇몇 곳의 유명한 전통 삼베가 있지만 안동 것을 보았으니 안동 삼베 선전과 자랑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성취하려면 하나님의 몫과 사람의 역할이 분명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만 맡겨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기도요 노력은 노력이다. 이는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그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마찬가지 원리가 아닌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법이란 없다. 심은 만큼 거두고 가꾼 만큼 거두고 애쓴 만큼 거두는 것이다. 그 위에 해와 비와 이슬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축복으로 덧입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성경과 역사의 인물들을 보라. 심지 않고 거두고, 가꾸지 않고 잘 된 인생이 있는가. 방주를 건설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준행한 의인이요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홍수 사건 이후에 포도 농사 잘하고 그 포도주에 취하여 둘째 아들 함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아들 이삭도 부인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 부전자전이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위대한 점은 저들은 그와 같은 인간적인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다. 하나님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한결 같은 인생을 만나길 원하신다. 야곱도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고 처가살이 20년을 마치고 얍복 강나루 건너 고향을 향하던 때에 딸 디나가 겪은 수치와 아픔을 뒤로하고 베델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기까지에는 그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의 인생을 살았는가.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의 아버지 이삭처럼 대를 잇는 언약과 믿음의 선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나이 40에 왕궁 밖에 나갔던 모세가 동족과 싸우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을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40년을 지내던 그에게서도 아쉬움을 남는 일화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이 팔십의 모세 앞에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부름 받은 모세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민족 지도자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율법전수자로서의 나중 사십 년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으로 영광스럽게 살아갔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고 인간의 실수도 하나님의 위로로 감싸셔서 다시 쓰실 만한 사명자의 모습으로 다듬어 가시고 연단해 가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족한 인간인 우리는 항상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하지 않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밤낮없이 분주한 나날을 살아 가셨다. 낮이면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무리들과 병자들 앞에서 음식 잡수실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 저 맞은편으로 가는 배 위에서 고물을 베고 깊이 잠이 드실 정도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항상 수많은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애를 쓰셨다. 예수님의 마음 가득한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 뿐이셨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도와 말씀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치유 사역으로 꽉 찬 일과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고단하게 소화해 나가시는 한결 같은 나날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일을 완전하게 다 잘 감당하는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인 요한복음 17장 말씀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는 기도 내용 가운데 예수님의 생애는 이 땅에서 완벽한 순종의 열매를 맺으신 삶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나는 완전한 삶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창세기의 요셉이나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 같은 인물에게서 우리는 그런 완전에 가까운 하나님의 사람의 거룩한 삶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지금 나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아침에 씨를 뿌리고 한 낮에도 열심히 땀을 흘려 가며 가꾸고 저녁에도 그 일터에서 손을 놓지 않는 그런 성실함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럼 은퇴도 없이 평생 일만 하란 말인가 이렇게 본문을 오해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란다.
 
6절의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느냐 어떤 분야에 종사하느냐 그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않는 다는 것은 그 삶의 태도가 성실하고 진지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교훈하는 말씀이 아닌가. 어떻게 모두가 다 최고가 되겠는가. 최고가 되는 것보다 열배 백배 더 중요한 것은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예배를 드려도, 찬송을 드려도, 기도를 드려도,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신앙생활의 태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최선과 성실 이것이면 넘지 못할 산이 어디에 있으며 건너지 못할 강과 바다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과 저것 중에 어느 것이 잘될는지 혹은 둘 다 잘될는지 망설이지 말고 성실하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나님 안에서 잘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시 전도서 8장 12절에 보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요”라고 하셨다. 그 앞에 보면 평생 동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죄인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인 13절에 보면, 악인은 잘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날이 그림자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다음 절인 14절에 보면, 악인 때문에 벌을 받는 의인이 있고, 의인을 이용해서 상을 받는 악인이 있는 세상살이 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헛된 것이라고 하였다.
 
 
항상 즐겁고 기쁘게 사는 생활.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각 사람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기며 살아가야 할까. 7, 8, 9절에 보면 항상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라고 각 절마다 말씀하셨다. “누가 즐겁게 살 줄 몰라서 즐겁게 살지 않나요.” 이렇게 반문하시면 할 말을 잃고 말게 된다. 요즘 가을 햇빛을 받은 가을 풍경이 사방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멀리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찾아 가지 못해도 내 생활의 주변에 아름다운 가을 풍광이 가득하다. 7절 말씀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빛은 참으로 달콤하며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Light is sweet, and it pleases the eyes to see the sun.)
 
인터넷 신문에 보니까 서울 상암 경기장 맞은편 하늘 공원의 억새 숲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고 밤에는 조명 아래 아름답다고 한다. 해의 빛의 아름다움은 삼천년 전에 전도자가 보던 그 해의 빛이나 오늘 날이나 한결같지 아니한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결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되 캄캄한 날들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캄캄한 날이란 살아가다가 보면 피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그 어떤 실패이든 고난이든 역경이든 환난이든 재난이든 질병이든 아픔과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과 좌절과 충격과 무서움과 끝이 보이지 않는 흑암 속의 캄캄한 날들을 겪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적지 않다.
 
아니 오늘, 지금 나 자신이 바로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캄캄한 날이 내게 찾아 온 인생일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절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왜일까. 그 캄캄한 날들이 많을 지라도 그 흑암의 순간이 지나갈 것이니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무덤에 장사되어 사흘간 무덤 안에 갇혀 계셨다. 그 사흘 후에 부활 하신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이 그 사흘간의 무덤과 같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 갇혀 있는 인생일 수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소망을 버리지 말자. 청년의 기쁨과 즐거움이라도 영원하지는 않다. 청년이 마음에 원하는 길을 가고 자기 눈에 보이는 안목의 정욕대로 행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판이 없는 경기란 무슨 재미가 있나. 규칙과 규약이 있고 심판이 있는 경기여야만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므로 근심과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하는 나날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였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1-3)
 
주님 안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며 이웃에서 떡을 나누듯 선을 베풀고 최선을 다하며 즐겁고 기쁘게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성실한 나날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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