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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귀 있는 자는 들으라(2)(계3:14-22) 201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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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3-23 22:58 조회 19,690 댓글 0
 
귀 있는 자는 들으라(2)(계3:14-22) 2014. 3. 23
 
 
 
미국 출신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1788-1850)은 신부 낸시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미얀마로 선교를 떠났다. 그가 25살이던 1813년의 일이다. 그는 “나와 함께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아내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드린 후에 아내를 만났고 선교지를 향한 것이다. 6년 만에 첫 설교를 할 수 있었다. 7년 되는 해에 겨우 첫 회심자를 얻었다. 미국 메사추세추 주의 엔더버 신학교에서 공부할 당시부터 언어학을 공부한 그는 20년간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최초로 미얀마어 사전도 편찬하였다. 두 아내와 6명의 자녀를 슬픔 가운데 잃고 그 곳 미얀마 정글에 묻어야 했다. 미얀마가 영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미얀마 군대에 붙잡혀 감옥에서 모진 고문도 당했다. 남편의 출옥을 위해서 애를 쓰던 그의 부인은 아도니람 져드슨이 풀려난 얼마 후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내 잃은 슬픔과 충격 가운데서도 교회를 세워 나갔고, 학교를 세워 나갔다. 무슨 일을 만나도 그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고 37년간 외로움과 고독과 씨름하며 선교에 힘썼다. 그가 62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갈 때에는 63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7,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201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에는 300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있다. 아도니람 져드슨의 기도는 자신의 영광이나 영달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었다. 그의 선교 열정과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선교 일대기를 다룬 샤론 햄브릭의 <아도니람 져드슨>같은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 되어 소개 되어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한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책망하며 권면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미얀마 선교의 첫 씨앗이 된 아도니람 저드슨처럼 가정과 일터와 삶의 주변에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차든지 뜨겁든지 한 복음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열심을 내야 한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날 구원하신 주님, 나를 자녀 삼으신 주님, 나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신 주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와 부모형제와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과 일가친척과 주변의 영혼 구원을 향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령의 열정이 식지 않는 뜨거운 마음과 열심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까지 두 달 동안 주일 오후에 묵상해 오던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에 대하여 묵상하길 원한다. 주님은 편지하신 교회들에게 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편지하시는 분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자신을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소개하셨다. 이 표현들을 그 어는 것 하나 지나쳐 버리면 안 된다. 예수님은 믿는 성도들의 ‘아멘’이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아멘’이란 ‘진실로, 분명히, 확실히 그러하다 혹은 그대로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아멘’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의 아멘이시라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완전하고 진실하게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아멘이 되신 독생자이시다. 예수님은 빌립보서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는 말씀 그대로 아멘의 삶을 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사야 65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 그 자체이시다. 거기서 ‘진리의 하나님’이란 말은 원래 히브리 성경의 내용으로 하면 ‘아멘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또한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요한 계시록 1장 5절에도 보면, ‘충성된 증인’이시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충성된 증인이요 참된 증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여기서 사용하는 ‘증인’이란 곧 ‘순교자’란 뜻이다. 'martyr' 즉 순교자의 삶이 곧 증인의 삶이며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곧 순교자의 삶을 피할 수가 없는 법이다.
 
최근에 방영 중인 북한의 기독교 실상을 공개하는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통계상으로 말하는 북한의 지하교회 14만 성도들은 그러한 순교자의 삶의 문턱에서 생명을 바쳐서 복음을 믿고 지켜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또한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하였다.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편지하신 내용이 무엇인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은 책망을 많이 받았다. 그 곳, 라오디게아란 도시가 지난 주일에 묵상한 사데라는 도시처럼 잘 사는 곳이었다. 이미 이천 년 전에 무척 풍요하게 살던 도시였다. 해변 도시인 에베소와 아시아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사람들의 내왕이 많았고 무역과 장사가 잘 되었다. 양털로 만든 양모 산업이 성업을 이루었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금융업이 발전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다. 그런 곳에 복음이 들어 간 것이다. 그러하다 보니 저들은 자유 분망하였고 외부적인 핍박도 별로 없었다. 점점 육신적인 즐거움과 풍요를 누리는 향락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이 넘치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별로 간절한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안일하게 되는대로 믿는 등 마는 등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이다. 15절과 16절을 함께 다시 읽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예수께서 몹시 심하게 화가 나셔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을 책망하시고 있다. 그곳 라오디게에 북쪽 11킬로미터쯤에는 히에라볼리라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천이 있었다. 반면에 16킬로미터쯤에 있는 골로새 지역의 한 우물에서는 매우 차가운 물이 철철 터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우리 강화도에서 전등사가 있는 곳은 과거에 온천이 나오던 곳이어서 ‘온수리’라고 한다. 그러나 강화 읍내에서 마니산과 전등사 방향으로 출발해서 읍내를 막 벗어날 즈음의 삼거리 주변 동네를 찬 물이 나는 곳이라고 해서 ‘냉천리’라고 한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도시 주변에도 한 곳은 뜨거운 온천이 나오고 반대로 다른 곳에서는 매우 차가운 냉수가 터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예수께서는 신앙 상태로 대입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차다는 것은 세상적이고 세속적이어서 하나님 신앙에 반목하는 무리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반면에 뜨겁다는 말씀은 주를 믿는 신앙의 열정을 가진 무리들을 말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에 다니긴 하는데 모여 들긴 하는데 미지근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저들에게 주님은 “미지근 하기만 하고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 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하나님과 세상의 두 주인을 섬기는 어정쩡한 이들이 많았다. 우리 고향에서는 ‘식혜’를 ‘단술’ 혹은 ‘감주’라고도 하는데 그 식혜라는 것이 차갑게 먹든지 뜨겁게 해서 먹든지 할 때 먹든지 해야 제 맛이 나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는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는 것처럼 참으로 토할 것 같은 아무 맛이 없는 경우가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도 분명하게 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는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도 똑 같이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시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물론 제대로 믿어 보려고 해도 잘 믿어지지 않고 열심도 쉽게 생기지 않고 기도도 잘되지 않고 찬송도 아직은 쉽지 않고 성경 말씀도 잘 모르겠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갓 입학한 1학년 어린이들이 아직은 어리지만 몇 년 지나면 똘똘한 학생들로 자라나는 것처럼 계속하여 은혜 받고 설교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성도의 사귐을 갖고 하다 보면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한 열흘 지나면 시루 가득하게 빽빽한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조급하면 안 된다. 은혜의 물주기를 계속하면 때가 되면 풍성한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왕 예수 믿는 것 뜨거운 믿음이 생기도록 기도하고 제대로 믿자. 우리가 다 아펜젤러나 언더우드나 알렌이나 스크랜튼이나 아도니람 져드슨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이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순교를 각오하고 전문 선교사의 삶을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 생활 주변의 가족과 일가친척과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을 가진 전도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17절은 ‘너의 실상을 알라.’는 책망이시다. 라오디게아 도시 사람들이 장사도 잘되고 무역도 잘되고 돈도 잘 벌리고 하는 일마다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풍요하고 넉넉하고 무엇이든지 돈으로 하는 일이라면 못할 일이 없고 안 되는 일이 없고 그런 재물의 풍성함 가운데 사는 이들이 넘쳐 났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사람이 가난하게 살 때보다 점점 재산이 늘어날 때가 더 위험하다. 소박하게 살 때 보다 화려 하게 살 때가 더 문제가 많아진다. 우리 몸이 적당하게 먹고 되는 대로 먹을 때가 더 건강하지 너무 기름지게 잘 먹으면 혈관 질환뿐만 아니라 각종 장기와 신체 건강에 오히려 위험 신호가 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모든 것이 풍요하고 부족함과 아쉬움이 없다 보니 경건생활에 힘 쓸 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저들 자신은 부자라고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며 만족하며 살아가는데 예수께서 저들을 진단하시는 말씀은 전혀 반대였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셨다. 여기서 ‘곤고하다’는 뜻은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말씀이다. 마치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채 버려진 폐허의 상태와 같은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의 말씀이 ‘곤고하다’는 말씀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그 도시의 잘 사는 시민들로서 자신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다 부요하다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데 주님은 정 반대의 진단을 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가련하구나, 가난하구나, 눈이 멀었구나, 벌거벗었구나.’ 하고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이는 칭찬 받았던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과 정 반대의 책망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궁핍하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는 칭찬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지난 번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백화점 고급 시계 점인 스위스 제 ‘파르미지아니 플리에르’Parmigiani Fleurier를 취급하는 서울의 한 점포에 50대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이 브랜드의 ‘피보나치 포켓 워치’Fibonacci Pocket Watch를 사기 원했다 시가 30억 원이 넘는 시계였다. 매장은 비상이 걸렸다. 부랴부랴 스위스 본사로 연락을 했고 스위스에서 담당자가 해당 모델의 시계를 들고 얼마 뒤 한국으로 급히 들어왔다. 이 중년 남자의 주문을 받은 파르미지아니 측은 그의 요구사항에 맞춰 제작에 들어갔다. 세계 3대 시계제작 장인인 파르미지아니가 손수 만든다고 알려진 이 시계는 주문에서부터 완성까지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계를 주문한 남자는 명품시계 수집이 취미인 중소기업 CEO로 알려졌다. 물론 투자 가치가 있으니 그렇게 할 것이다.
 
반면에 대전 유성에 위치한 충남대학교 정문 옆에는 ‘정심화국제문화회관’이란 건물이 지어져 있다. 그 건물은 대전에 살면서 평생 김밥 장사로 벌어들인 50억 상당의 재산을 1990년에 학교 발전 기금으로 헌납하고 돌아가신 이복순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건물이다.
 
18절과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금을 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답게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연단을 통해서 영적으로 순결하게 되어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라는 권면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불’이란 ‘시련, 연단, 환란, 시험’등을 의미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는 말씀처럼 말이다. 찬송가 450장 ‘내 평생소원 이것 뿐’ 3-4절에 보면,
 
“불 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라고 찬송한 그런 찬송 가사 내용대로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라오디게아는 모직 산업도 활발하여 좋은 옷감으로 만든 좋고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책망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흰 옷이란 정결한 삶과 승리의 삶을 상징하며 신부의 세마포로 단장한 옷과 같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깨끗함과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의 의로운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죄 용서 받은 기쁨과 감격과 감사와 소망 중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의 억만 죄를 깨끗하게 하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밖에는 없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나서게 했어도 49살에 죽었다. 양귀비는 젊음을 유지하려고 어린 아기의 소변으로 얼굴을 씻으며 살았으나 37살에 죽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장수해 보려고 어린이들의 피를 수혈 받으며 버텼으나 82살에 갔다. 그러므로 값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예수님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너희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세상의 화려한 자랑하던 옷을 벗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는 흰 옷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이미 당시에 의학이 발전한 곳이었다. 특히 안과 의학이 발전한 도시였다. 그래서 안약과 고약이 유명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육신의 안약만 사서 바르지 말고 신령한 영의 안약을 사서 발라서 영의 눈을 환하게 뜨고 살아가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은혜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변할 줄 아는 분별력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라는 권면이 아닌가.
 
19절에서 예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하셨다. 그렇다. 친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이 아닌가. 길 거리에서 아무에게나 책망하면 요즘 청소년들이라도 ‘당신이 무언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대들 것이다. 그러므로 책망과 징계는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책망도 안하게 된다. 사랑이 가고 애정이 가고 관심이 가고 기대가 되고 하니까 책망도 하고 질책도 하고 징계도 하는 것이 아닌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고 징계하신 예수님의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내가 열심 안 낸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더 회개하란 말입니까.” 만약에 이렇게 반응한다면 피차가 당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이것은 남편 잘못, 저것은 아내 잘못, 이것은 아빠 잘못, 이것은 엄마 잘 못, 이것은 자식 잘못” 이런 식으로 서로 핑계를 대고 서로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회개는커녕 사과도 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고 서로 잘 났다 하고 지낸다면 집안은 무엇이 되고 그 어디에서든 무슨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는가. 믿음, 소망, 사랑에 열심을 내자. 믿음도 불같은 믿음을 사모하자. 아무리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아주 포기하지는 말자.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고 참아주고 견뎌주고 이해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내가 잘 못했다 하고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나서서 섬기고 내가 앞장서서 화해하고 내가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어 밀고 사랑하되 열심히 사랑하며 살자. 사랑에지지 말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입증해 보이시지 않았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미움을 이기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자. 믿음 생활의 열심이란 사랑의 열심이 아닌가. 주를 믿는 믿음에 열심을 내자. 그리고 미세 먼지를 두려워하듯이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살자.
 
 
이기는 자에게 무슨 상급을 주신다고 하였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6)라고 약속해 주셨다. 또, 사데 교회에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계3:5)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고 하셨다. 이겨야 한다. 지변 비참해 지는 것이다. 전쟁도 지면 참담해 지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광부들이 독일의 갱도에 1000미터씩 내려가서 낯 설은 나라의 막장에서 일하고 간호사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의 지방 도시에 가서 낯 설은 나라의 세상 떠난 이들의 시체를 알코홀로 닦으면서 고독과 외로움과 처절한 젊은 날의 도전 앞에 씨름을 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동생들 공부시키고 지지리 가난했던 이 나라를 오늘 날과 같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세워 온 것이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컸다. 이제 잘 사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영적 믿음의 부요함을 자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보혈의 은총을 덧입은 흰 옷을 사서 입고 영의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 광명한 천국과 주의 세계를 바라다보며 살아갈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의 주인공이 모두 되어야 할 것이다.
 
20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해 주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 안에서 주님과 이런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삶을 영원히 살아가자.
 
예수님이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문 앞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홀만 헌트William H. Hunt(1827-1910)가 그린 그림으로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영국 런던 옥스퍼드 켄블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윌리엄 헌트가 그 그림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미술 비평가와 친구들은 그림을 보고 잘 그린 그림이라고 칭찬을 했다. 그런데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던 한 친구가 갑자기 의심스런 얼굴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 아주 훌륭하네. 그런데 잘못 그려진 부분이 있네, 이그림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그림을 그린 헌트가 대답했다. "손잡이를 빠뜨리고 그린 것이 아니야. 그 그림의 문은 손잡이가 안쪽에 있다네. 안에서 열어야만 열리는 문일세. 즉 내 스스로가 안에서 열어야만 열리는 우리 마음의 문을 그린 거라네." 이 그림에서 문밖에서 등불을 들고 두드리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문을 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문밖에 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친구들이 와서 문을 열고 영접하라고 권면을 한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나만이 할 수가 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을 두드리는 자의 수고가 허사가 된다. 내가 결단을 하고 내가 문을 열어야만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결단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참된 복음의 진리를 알려주기 위하여 오늘도 끊임 없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고 뜨거운 마음과 열심을 갖고 믿음의 삶을 승리하며 사는 이기는 자의 축복을 받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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