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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요12:20-26) 3. 24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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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3-03-24 21:45 조회 23,403 댓글 0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관리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요한복음 12장 42절에 보면 ‘관리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저들이 드러내 놓고 믿지 못한 이유는 사회적인 신분 관리나 사회생활에 불이익이 있을까봐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관리란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장례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와 같은 산헤드린 관원을 일컫는 말이다. 저들이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바리새인들 때문이었다. 저들에게 알려지면 유대인의 조직 사회에서 출교 당할까봐 망설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43절에서는 저들처럼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적당히 처세하며 자기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능수능란한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요한복음 19장 38절 이하에 보면 그와 같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며 적당하게 처세하며 살아가던 관리들 가운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위기의 때에 전혀 다른 신앙의 면모를 보였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숨고 떠나가 버린 텅텅 빈자리를 지킨 것은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것 같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와 같은 관원이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피밭이라고 이름하는 아켈다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나머지 열한 제자들도 이러 저리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저들 관원들은 그 믿음의 표현이 달랐다. 교회를 섬기다가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들을 왕왕 경험하게 된다. 종려 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는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가 아니면 아직은 ‘사람의 영광’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본문에 보면 20절에 ‘명절’에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려고 올라갔던 헬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씀하는 ‘명절’이란 유월절을 말한다. 12절에도 보면, ‘명절’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오늘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들어 가셨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Palm Sunday)라고 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요12:13)라고 하였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 9장 9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호산나’(wJsannav)란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히브리말을 헬라말로 음역한 말이다. NIV 영어 성경에 보면 두 번 반복해서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편 118편 25절의 유명한 기도 내용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께 그런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하는 기도이다.

본문에 보면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 곁에 가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 사실을 전달받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The hour has come for the Son of Man to be glorified.)

는 선언을 하심으로 예수님을 만날 이유를 공식화 하셨다. 자, 그러면 예수님은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붙잡히셔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며칠 전에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무슨 영광을 말씀하신 것일까.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영광.
헬라사람 몇몇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의사를 전달한 것은 벳세대 출신 제자 빌립과 안드레였다. 예수님은 이 ‘때’를 놓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이 ‘때’에 관한 말씀으로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관찰이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아들 예수님께 알리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놓고 크게 외쳐 가르치셨으나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하는 자들이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낳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7:29)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예수님을 붙잡기는커녕 손을 대는 자조차 없었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 7장 30절은,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하였다. 또,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기록이 나온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라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반응하기를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하고 반반하였다. 이 같은 대화의 끝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8:19)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헌금함 앞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이 없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요한복음 8장 20절은,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라고 증언해 주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곳 저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그 ‘때’란 죽으실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인자로서 영광을 얻으실 때가 되었음을 선언하신 후에 곧 이어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교훈을 말씀하셨다. 이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하실 영광은 죽음을 통해서 이룩하실 영광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 유명한 비유와 선언의 말씀이 바로 본문인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나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는 자연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가 아닌가. 그것이 밀이냐 보리냐 쌀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곡물 한 톨이 땅에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가진 그 곡물 한 톨은 ‘죽음’ 즉 사라지는 과정을 통하여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배의 열매를 맺는 법이니 말이다. 한 톨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는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가 담겨져 있다. 죽지 아니하면 그 한 톨 그대로 뿐이지만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요 생명의 법칙이다. 이 세상에 이 같은 자기희생이 없이 이룩된 업적이란 없다. 죽음이 없이 성취된 역사도 없다. 이는 한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엊그제 서울대학병원에 문병을 갖다가 현관 로비 한 쪽에 도서관을 개관하였기에 잠시 둘러서 책 몇 권을 훑어보았다. 그 중에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출판한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김승태 역음)이란 스코필드 박사에 관련된 글과 사진자료 모음집을 보았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박사가 누구인가. 영국 태생의 캐나다 수의학자요 평생을 한국에서 활동한 의료선교사였다. 27살 때인 1916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온 후로 수의학을 가르치며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였다. 1919년의 3 ·1 운동 때에 화성 제암리감리교회 방화사건으로 26명의 마을 신자들을 죽인 일제의 포악상 등을 사진에 담고 기사화해서 외국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20살 때에 소아마비 가 찾아와서 왼쪽 팔과 오른 쪽 다리에 마비 증세가 있는데도 어렵게 수원에서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찾아 들어갔다. 일본 경찰과 군대의 포악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한 사실들을 글로 정리하여 세계 언론에 알리는 노력을 다하였다. 수원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만났는데 이완용이 스코필드 박사에게 “어떻게 하여야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하고 묻자 “이천만 동족에서 사죄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본의 고지마[小島] 장군,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총독 등을 만나 일본의 만행과 고문 등을 비난하고 한국 식민 지배를 그만둘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서대문형무소나 대구형무소 등을 찾아다니며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등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만나서 위문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투쟁정신에 감탄하여 그가 쓰고 모은 독립운동 기록물이 그 당시에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그는 삼일 운동 독립 선언 33인의 대표에 추가되어 독립 선언 34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한국 이름 석호필 박사이다. 그는 19살에 영국에서 캐나도 토론토로 이민하였다. 농장에서 반년 쯤 고생을 많이 하며 돈을 벌어가지고 토론토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다음 해인 대학 2학년 때에 열병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그는 과로인줄로만 알았으나 그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잘 못쓰게 되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억척같이 공부하였고 세균학 연구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런 몸으로 평생을 살면서 나중에 한국의 독립과 의료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열심을 다하였다. 한쪽이 마비된 손과 발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한국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다보고는 하였다고 전해진다. 스코필드 박사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때때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세브란스와 서울대학에서 가르치고 틈틈이 청년들에게 영어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늘 앞장서고는 하였다. 1969년 한국에 영주 귀국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의 유언에 따라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그는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애국자요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요 평생을 복음과 예수님의 사랑 실천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간 예수님의 사람이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므로 영생을 얻을 영광.
예수님께서 이어서 해 주신 교훈의 말씀이 이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이 세상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셨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그 생명이 영생하도록 보전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또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면 부모처자형제자매라도 적당히 사랑하여야 한다. 물론 부모를 공경해야한다. 반드시 효도해야만 한다. 내외간에 혹은 부모 자식 간에 형제 자매간에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자기 자신이라도 덜 사랑할 줄 알아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23년째 선교하는 외과 의사인 박누가 선교사는 ‘동남아의 슈바이쳐’, ‘제 2의 울지마 톤즈’ 등의 별명이 따라다니는 주인공이다. 작가 김영선은 <아픈 만큼 사랑합니다>라는 책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여 세상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KBS TV는 ‘인간극장’ 5부작으로 그를 소개하였고 ‘희망 릴레이 사랑 싣고 세계로’라는 프로그램에서 2부작으로 병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23년 째 의료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췌장암 수술과 두 번의 위암수술, 그리고 간경화에 당뇨 판정을 받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자기 또한 환자다. 자신의 몸 하나 거두기도 어려울 만큼 쇠약해졌지만 박 선교사는 병마와 싸우면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팔, 베트남, 캄보니아, 라오스 등 의료 혜택이 없는 오지를 찾아 다니며 의료 선교를 펼치고 있다. 그는 단지 병원이라는 건물을 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17년 된 다 낡은 대형버스를 개조해 만든 브레이크도 잘 듣지 않는 이동병원 버스를 몰고 다니면서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원주민들을 직접 찾아 나서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아파 봤으니깐 그만큼 남들을 사랑해야겠다. 내가 아파 보니까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된다. 내가 아픈 만큼 남을 더 사랑하겠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이런 교회, 이런 사역, 이런 선교, 이런 복음의 열정을 가진 복음의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교회로 섬겨 가야 할 것이다. 나 하나 혹은 내 가족끼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벌어 잘 사는 그런 꿈 말고 말이다. 세계 열방을 가슴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장을 갖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복음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 가고 싶은 열정 말이다. 그러므로 요즘 마무리하는 교회 건축은 우리들의 사역의 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복음 전파 사역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의 표현을 잘 눈여겨보아야 하고 그 뜻의 의미를 잘 깨달아 알고 믿어야 한다. ‘보전하리라’는 말씀의 ‘보전’(保全)이라는 단어는 ‘프락소’(fulavssw)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키다, 보호하다, 경계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이는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영생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의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고 남을 섬기고 돌보고 존귀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영생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에 매진하며 살아갈 때에 그 영생이 지금부터 이미 현재적으로 시작해서 영원토록 영생을 얻는 영광스러운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물질이 있어야 하니까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직장에도 다니고, 장사도 하고, 사업도 하고, 그 무엇도 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결코 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남매를 키우며 남의 집의 옆방을 월세로 얻어 사는 넉넉지 못한 가정의 젊은 집사 내외가 있었다. 집은 가난한데 식구는 많았다. 주인 집 응접실에 있는 화장실을 눈치 보며 같이 사용해야 했다. 아침에 애들이 학교 가는 시간이면 화장실 쓰는 것이 전쟁이었다. 악착같이 벌고 모아서 작은 아파트를 하나 샀다. 가족 모두가 너무나 좋아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친구네 집이 아파트를 샀다고 해서 축하 선물을 사가지고 가서 보니 그 집의 아파트는 화장실이 두 개였다. 다시 또 악착같이 일하며 안 쓰고 안 먹고 되는 대로 입고 부지런히 벌어 모아서 화장실 두 개 있는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사를 갔다. 가족 모두가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모른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6개월 후에 그만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까.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할까. 어떤 가치관, 어떤 인생관, 어떤 복음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할까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실 영광.
세상의 인생들 중에는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인생도 있고 천하게 여기시는 인생도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오해하면 안 된다. 가령 노아의 시대를 보라.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노아 시대의 시대상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였다. 이는 노아의 때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노아를 바라보시는 눈과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눈이 다르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귀하게 여기셨다. 아담의 후손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죄를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선해 질수도 없고 의로워질 수도 없다. 오직 인간이 구원을 받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라. 장관도, 차관도, 국회의원도 법조인도, 연예인도, 잘 나가는 인기 강사도, 심지어는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가. 세상의 잣대로 재어 보고 세상의 저울로 달아 보아도 문제투성이이지만 하나님의 잣대로 재어 보고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보면 더욱 심각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보기에 어떠한가가 문제가 아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안에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라”하고 누누이 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왕이냐 평민이냐, 성공하고 출세하였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왕이 귀족 천명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벌였다. 벨사살은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이다. 아버지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간 성전의 금 그릇과 은그릇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것으로 왕과 귀인과 왕후와 후궁들이 밤이 깊도록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하자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우상을 신이라고 여기면서 신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의 연회장 벽면에 촛대 맞은편에 석회 벽에 글씨를 쓰는 것을 왕이 보았다. 벨사살 왕은 얼굴빛이 변하고 마음이 불안해 지기 시작하였다.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두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떨렸다. 왕은 술객과 점쟁이를 불러서 그 뜻을 해석해 보라고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그 때에 불려 나간 인물이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벽에 쓰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씨의 뜻을  왕 앞에서 해석하였다.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단5:26-28)

그렇다. 하나님 셈 하실 때에 합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저울에 달아 보실 때에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누시면 나라라도 나누이게 되고 하나님이 버리시면 아무리 큰 민족이라도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벨사살 왕은 그날 밤에 죽고 말았다. 하나님이 죽이신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죽는 인생은 언제 죽더라고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허영심과 온갖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야만 한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고 선언하셨다. 본문인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따로 있다. 사람에게 귀히 여김을 받는 것도 복이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야 하지 않겠나. 

가이드포스트 4월호가 도착했다. 겉표지에 부활절특집호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Standinf Tall"이란 제목의 ‘포기하지마’라는 간증문이 실렸다. 주인공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미군 대령 콘웰 그래그 갓손(Colonel Grag Gadson)이다. 대학교 때에 미식 축구인 풋볼 선수였다. 건장한 체구인 그가 이라크 전쟁에서 2007년도에 두 다리를 잃었다. 사차선 고속도로에 적들이 매설한 사제 폭탄이 터져서 짚차를 타고 이동하던 3대의 미군 탑승자 중에서 자기가 가장 크게 중상을 입은 것이다. 한쪽 다리는 현장에서 잘려 나갔고 나중에 후송되어 나머지 다리도 절단해야만 했다. 그는 사고 현장에서 의식을 잃기 전에 “하나님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God! I don't want to die here.)하고 절규했다고 했다.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월터 리드 국립국군병원에 헬기로 후송된 그는 오래도록 투병생활과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 주었다. 나중 집에 돌아 가서는 혼자가 되었다. 물론 아내도 있고 장성한 남매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화장실 출입부터 시작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이틀을 엉엉 울면서 지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공급하시는 힘을 체험하였다. 옛 대학 친구이고 풋볼 동료 선수였던 친구였다. 그는 제대 후에 미국 뉴욕 자이언츠 팀의 수석 코치 곁에서 코치로 생활하고 있었다. 자기를 아들과 함께 뉴욕 자이언츠 경기에 특별 선수로 초청하기로 결정했다는 통보였다. 양다라에 의족을 하고 참여하였고 후배 선수들에게 특강도 하였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로 뉴욕 자이언츠 팀이 경기마다 연전연승하는 쾌거를 회득했다. 그는 요즘 미국 버지니아 주 볼트 벨부아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현역 장교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공부도 계속해서 정보시스템으로 석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말한다. 군인에게 절대 포기란 없다.(There is no quiet in this soilder)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에게 절대 포기란 없다.’(There is no quiet in this saint.) 부활절이 다가 오고 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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