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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눅12:49-59) 201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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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3-06 07:33 조회 17,343 댓글 0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눅12:49-59)             2017. 3. 5


시작된 사순절기에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기원한다.
누가복음 12장은 59절 분량의 짧지 않은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3월 첫날부터 오늘까지 다섯 번으로 나누어 묵상하고 있다. 

밭농사가 잘되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길 원하는 부자의 비유 말씀도 누가복음 12장에 있다. 이 비유는 형과의 유산 분배를 도와 달라고 요청한 어느 한 사람에게 예수께서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교훈해 주신 내용이다. 이 비유 전에 서두로 해 주신 말씀이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농사가 잘 된 부자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이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눅12;21)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재물에만 부요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어떤 자일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아갈 줄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자들은 이 세상일들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시간과 세월을 허송하지마는 않는다. 

나그네 인생길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주인 오실 시간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살아야 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주인을 기다려야 한다. 깊은 밤중에 혼인집에 다녀 온 주인이 도착하였을 때에 잠을 자지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들고 주인을 기다리고 서 있다가 맞이한 종들에게는 주인의 넉넉한 배려와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2장 37절을 보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이는 마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설마 잔치 집에 다녀온 주인이 밤늦게 돌아오도록 잠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해서 그 날 밤 그 시간에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기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이러한 교훈은 종말 신앙을 갖고 살아가라는 강조를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지혜롭게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라,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은 자답게 살아가라, 맡겨진 일을 제대로 잘 못하였을 때에는 그 받을 벌을 두려워하라,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며 살아가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이와 같은 강조의 말씀을 구구절절이 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본문이다.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조해 주신 내용이다. 


불을 던지려고 오심.
“내가 불을 땅에 던지려고 왔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말씀을 대할 때면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불’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불을 던진다는 말씀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방화범으로 오셨다는 뜻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불’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의 말씀을 영접한 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겪게 될 갈등과 받게 될 적대감을 말한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0년이 지났지만 세계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모두 다 우상 숭배와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는 신앙, 자신들이 따르는 종교의 가치를 높이려 하면서 아무 신앙생활이나 하면 되지 그렇게 꼭 기독교만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종교는 다 마찬가지라는 종교 통합론과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상관없고 식의 문제가 아니란 말씀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사이의 갈등과 충동을 거쳐야만 한다. 그런 충돌과 갈등의 과정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위선이다. 불가능한 말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내 안에서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 복음과 비 복음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불가능하다. 동서고금의 그 어느 누구나 다 이런 진리를 향한 영적 씨름을 거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생명을 내어 놓으리 만큼 순교적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그냥 마냥 교회 생활이 좋으니까 교회에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하시는 그 복음의 불이 가슴에 활활 타올라서 진리를 깨달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있는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는 말씀은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이시다. 예수께서는 장차 지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세례”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8)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하여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예수께서는 자신이 받으실 세례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이루어지기까지”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쓴 잔을 받아 마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기 전날 밤에 밤새도록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내용 그대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살아가시다 보니 우연히 어쩌다가 불행하게 그런 참혹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감당하셔야만 할 역사적인 과업이요 사명이셨다. 비록 예수께서는 그 사명을 아셨지만 그의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고 힘들고 괴로우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와 극심한 고난과 죽으심을 손수 다 짊어지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라는 찬송의 가사는 이렇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나의 죄 너의 죄와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를 붉게 물 들이셨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그렇다. 예수께서는 육체의 극심한 십자가 처형의 고난을 끝까지 다 한 몸에 담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아니 하나님께서 죽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무덤 속에서 삼일 만에 부활 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이 땅에 던지시기 원하셨던 그 불이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라야 한다. 연기만 나서는 안 된다. 꺼져서는 안 된다.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따라도 그만 안 따라도 그만,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아도 그만 그렇지 못해도 그만인 상태로는 그 불이 내 마음에 불 붙여진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갈라디아 2장 20절의 신앙 고백과 함께 새 성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해 한 해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이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신앙이 아니면 가짜다. 이 신앙이 아니며 아닌 것이다. 이 신앙이 아니면 아직 멀어도 한참 먼 상태다. 이 신앙이 아니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 신앙이 아니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자의 상태, 자연인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땅에 던지러 오신 그 불이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를 찾아가는 거룩한 불로 활활 타올라야만 한다. 


분쟁하게 하려고 오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2:51)

예수께서 이 땅에 화평을 주려고 오신 것이 맞다. 이사야 9장 6절의 말씀 그대로 오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예수는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평강의 왕”이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대로  분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그런 방법이란 없다. 생각하여 보라. 개인, 가정, 종족, 나라, 민족 그 어디를 보아도 이와 강은 분쟁이 없이 복음화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는가. 전혀 없다. 끝없는 불화와 갈등과 충돌과 대립과 박대와 싸움과 분쟁을 거쳐서 개인과 가족과 가정과 이웃과 지역과 마을과 부족과 나라와 민족과 열방 가운데 복음의 열매가 맺혀 온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매 맞고 성경책을 아궁이에 불태우고 문을 다다 걸고 내어 쫓기고 싸우고 갈등을 겪고 미움을 받고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별의 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경우란 없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사순절 기간에 상영을 시작한 “사일런스”(SILENCE)라는 제목의 영화는 일본 선교 초기의 핍박과 순교 역사를 다룬 “침묵”이란 책의 내용을 영화화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섯 식구가 살아가는 한 가정을 예로 드셨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집안에 분쟁이 일어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분쟁하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53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그렇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 누구만 나서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갈등과 분쟁의 불씨가 되고 만다. 그게 화근이 되어서 집안이 평안할 날이 없게 된다. 이 말씀은 구약 미가서 7장 6절에 예언된 말씀이기도 하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39)

MBC방송국 밤 9시 “뉴스 데스크”를 진행하는 앵커요 MBC사장까지 지낸 조정민 사장은 가자 출신의 평생 언론인이었다. 그런 그는 남편 말을 무시하고 교회 생활하는 아내를 핍박하였다. 나중에는 새벽 기도한다면 새벽마다 잠자다 말고 일어나서 집을 나서는 아내를 교회로 붙잡으러 갔다가 자기도 새벽 기도회에서 은혜를 받았다. 기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핍박하고 박해하고 못 마땅해 하고 철저한 불신자로 처신하던 그 자신이 은혜를 받고 말았다. 그냥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 MBC사장직을 사표 내고 뒤 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24시간 TV방송인 CGN TV의 대표 이사를 지내기도 한 그는 지금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베이직 교회를 개척한 담임 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그는 KBS아침 마당에 초대 받아 자신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고 목사가 되기까지의 간증을 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내 안에 혹은 가족들 간에 끝없는 분쟁과 갈등과 영적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고 계시다. 에녹이 그랬고 방주를 건설하던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치 누구를 위해서 인심 쓰고 믿어 주는 것처럼 교회 생활 하지 말고 신앙생활다운 신앙생활을 하자.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 분쟁과 가족들 간의 분쟁의 대답을 찾아내자. 그런 영적 고뇌와 영적 씨름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듭나게 될 것이다. 수가성 여인이 그랬고,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가 그랬고, 니고데모가 그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도마와 마태가 그랬고 핍박자 사울이 그렇게 변화되어 쓰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일단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나면 그 어떤 분쟁이나 갈등이나 환난이나 핍박도 내 속에 불붙은 이 복음의 불을 꺼 버릴 수 있는 힘이란 없다. 주님께서 이 땅에 던져 주기를 원하셨던 그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진리의 불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대로 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이런 은혜와 부르심을 체험한 이들의 고백이 담긴 찬양은 다르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스스로 판단하게 하려고 오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그 당시의 유대교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셨다. 그래서 심지어는 “화 있을 진저”라는 책망조의 말씀을 쏟아 놓으시기 까지 하셨다. 동서고금에 대개의 사람들은 일기의 변화를 보고  기상을 분간할 줄 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서쪽에서 구름이 이는 것을 보고 “소나기가 오리라”고 말하면 대개 소나기가 왔다. 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심히 더우리라.”고 말하고 나면 과연 그랬다. 그런 그 당시의 유대인들인데 그들의 신앙생활은 달랐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적하시고 책망하신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2:56-57)

천지의 기상만 분간하지 말고 이 시대를 분간 할 줄 아는 자들이 되라고 촉구하셨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이 되라고 초청하셨다. 그 당시 심각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인 것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아니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영적 무지였다. 결국은 저들이 담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당하도록 음모를 꾸미지 않았나. 예수께서는 그 당시에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으로 부터도 멀리 떠나가 버렸고 하나님의 뜻에서도 멀리 벗어나 버린 유대 종교의 지도자 행세를 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하나님 안에서 옳고 그른 것인지를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라고 촉구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거짓 뉴스들로 도배가 된다고 할지라도 길거리에 나서는 군중의 수자로 시대를 판단하려고만 하면 안 된다. 진리는 수와 상관이 없다. 진리이셨던 예수님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베드로처럼 배반하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도망쳤어도 홀로 외롭게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로 대답하셨다. 그렇다. 부활이 대답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음은 모든 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대로이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바울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며 전파하길 원하는 복음은 이 세상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진리이다. 그 복음의 진리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자다운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한다.”고 초청하신 것이다. 

올 사순절 기간에 누가복음의 남아 있는 분량의 말씀 묵상과 함께 그런 성숙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58절의 “화해”(和解)란 단순히 나 자신을 고발 하는 이웃과의 좋은 사이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 하실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해를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한다. 영원한 진리 안에서 참과 거짓, 선과 악, 공의와 불의,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전하여야 한다. 그런 우리 각 사람의 영적 승리를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은혜 풍성한 사순절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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