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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고전10:30-11:1) 201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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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관리자
작성일 15-02-15 06:59 조회 21,568 댓글 0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고전10:30-11:1)       2015. 2. 15

이 세상의 대개의 여자는 남자가 변할 거라고 바라고 결혼한다. 하지만 남자는 구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여자는 세월이 지나며 변하고 만다. 연약해 보이던 부인이 여 전사처럼 씩씩해져만 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 우리가 배우고 본 받고 따라야 할 말씀은 오직 주의 말씀뿐이다.
 
역사 속의 인물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성경 속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 대단하고, 모세가 위대하고, 다윗이 뛰어나고, 솔로몬의 지혜가 감히 그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려 하던 연약함과 비겁함이 있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다. 다윗은 부하 장군의 아내를 전쟁 중에 간음한 절제력 없던 왕이었다. 솔로몬은 인생 말년에 이웃 나라의 여인들을 첩으로 맞아  들이고 저들의 섬기는 각종 우상과 이방 신들을 예루살렘에 받아들임으로 하나님 신앙에서 멀어져 갔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가 대단하지만 그도 나중에 예수님이 붙잡히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실 때 어디론가 도망가 숨어 버리고 그 역사적인 현장에 나타나질 않았었다.
 
이렇게 보면, 성경 인물 들 중에서 그들 자신이 감히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만한 인물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물론 여호수아는 모세의 광야 생활을 지켜보며 그를 본 받고 싶은 마음이 컷을 것이다. 엘리야를 대하던 엘리사의 마음에 자신도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는 나중에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나. 창세기의 요셉,  사사시대 말기와 역사 시대 중심에 서서 사울과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선지자 사무엘이나 다니엘서의 다니엘, 에스더서의 에스더, 느헤미야서의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은 본  받고 싶은 인물이 아닌가. 다메섹 체험으로 변화 된 이후의 사도 바울도 이련 면에서는 참으로 본 받을 만한 사도 중의 사도요 복음 전도자 중의 전도자요 가히 주님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다가 순교자의 길을 간 초대교회의 위대한 복음의 사람이 아닌가.
 
그 모든 성경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중심에 서 계신 분은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며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풍성한 먹을거리로 배부르게 하셨다 그를 임금 삼고저 하는 무리들 곁을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공생애 3년을 쉴 틈이 없이 살다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무리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일일이 한 사람씩 부르셔서 평생토록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아가도록 성령을 부어 주시고 순교자의 삶을 사는 사도로 다듬어 나가셨다. 메시아이신 줄 몰라서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 체험 이후에 그는 전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갔다. 변화 이후의 사도 바울은 이 전에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뛰어난 이방 전도자가 되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탁월한 인물이 사도 바울이 아닌가. 그 바울이 전한 13편의 신약 성경에 담긴 편지 가운데 고린도전서 11장 1절인 본문에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고 편지 하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선언인가. 이 세상의 그 어떤 분야의 그 어느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예수님의 모든 삶과 그 모든 말씀은 본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본 받되 저들의 행실은 본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저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뀐 생을 살았다. 그런 그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 하면서 감히 이런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며 선언이며 도전인가.
 
어찌 사도 바울이라고 부족함이나 흠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복음의 부르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답게 살아가려고 항상 씨름했던 믿음의 사람다운 담대한 고백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은 문맥상으로 보면 10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어졌어야 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0장의 내용을 마무리 하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어떤 모습과 무엇을 본 받으라고 하고 있는가.
 

감사 생활 본 받기.
10장 전반부에 보면 사도 바울은 모세 시대 때에 홍해를 건넌 일과 광야 생활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 본보기란 무엇인가. 10장 2절에 보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험을‘세례’라고 해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 중에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마실 수 있었던 경험을‘신령한 반석’, ‘신령한 음료’라고 해석하였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이처럼 그 사건 자체보다 의미와 그 교훈의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기적의 물을 내던 광야의 반석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선언하였다. 이 얼마나 신령하고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는 선언인가. 이처럼 세례의 경험에 비출만한 출애굽을 경험하여 불가능하였던 홍해의 물줄기를 갈라 세워 주심으로 넉넉히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물이 없어 생활 할 수 없고 생명을 연장 할 수 없던 광야 40년 동안 물의 문제를 시시 때때로 해결해 주셔서 풍성하게 사람들과 짐승들까지 마시며 해갈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은‘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축복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그런 은혜로운 물의 신령한 공급의 현장이던 광야 생활 중에서도 다 구원 받지 못하고 적지 않은 백성들이 멸망한 사건은 후대의 우리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하였다. 광야 생활 중에 멸망한 이들은 물이 없어서나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악을 즐겨 한 것’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 그 악이란 무엇일까. 7절에 보면 ‘우상 숭배’와 ‘음란’과 ‘교만과 원망과 불평’을 말한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머물렀다. 그 사십일 동안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다. 아론을 앞 장 세운 저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경배하며 그 앞에서 제사하며 먹고 마시며 뛰어 놀았다. 백성들은 여인들과 자녀들의 귀에서 금귀고리를 뽑아 모아다가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은 그것을 녹여 부어 조각칼로 새겨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 금송아지를 보고 백성들이 소리쳤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아론이 앞 장 서서 그 앞에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난 백성들이 그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보이지 아니하시나 보이는 그 어떤 물질세계 보다 정밀하게 섭리하시고  간섭하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물질세계의 탐심에 갇혀 살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새해를 맞았고 지난 첫 달을 지내고 벌써 둘째 달 중순이다. 지난달에도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얼마나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탐심 가운데 사로 잡혀 살아 왔나. 시간, 재물, 소득, 돈, 관심, 취미 등 매사에 얼마나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가까이 하며 살아 왔나.
 
산 아래 광경을 아시고, 금송아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급하게 모세에게 어서 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모세를 내려 보내셨다. 출애굽기 32장  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몹시 실망하셨고 속상해 하시며 분노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산 위에서 모세를 내려 보내시면서 몹시 화가 나신 목소리로 진노하시면서 한 마디를 덧 붙이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하나님께서 몹시 화가 나신 것을 알게 된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하나님 앞에 다급하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주의 맹렬한 노를 그쳐 주세요.
하나님, 심판하시려는 뜻을 돌이켜 화를 내리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하산한 모세인데 산 아래 쯤 도착하니 요란 법석한 소리 가운데 금송아지를 둘러서서 춤을 추며 광란하는 백성들을 보고는 정작 모세 자신이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몹시 난 모세는 두 손에 들려 있던 십계명의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모두 깨트리고 말았다. 모세는 그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다시 불살라 녹여 부수어서 가루를 물에 뿌리고 그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도록 하였다. 형 아론에게 못마땅한 심경을 피력하는 동생 모세에게 아론은 궁색한 변명과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론은“백성들이 가져온 금을 불에 던졌더니 그 불 속에서 그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거짓말까지 하였다.
 
그 후에 모세는 진(陣)의 문에 서서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그 때에 레위 지파의 자손들이 모세 앞으로 모여들었다. 모세는 저들에게 허리에 칼을 차라고 명령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 날에 광야에서 레위 자손들의 칼에 죽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3,000 명가량이나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며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노하여 진멸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을 통하여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출32:10)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출애굽기 32장 33절에서 모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고린도 전서 10장의 7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세 시대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하는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광야의 백성들과 같이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라고 하였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 거주할 때에 모압의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바알브올 숭배에 빠지며 음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알브올이란 모압의 우상의 전을 섬기는 여 사제들로서 저들과 음행한 것이다. 이 일로 진노하신 하나님은 염병으로 24,000명을 심판하셨다. 또,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 생활 중에 날마다 공급 받아 먹던 음식인 만나를 질려 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아론을 원망하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심판하셨다. 그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백성들이 속출하였다. 물론 그 현장에서 안타깝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기를 기도하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있었다. 저들 중에는 우상을 숭배하거나 음행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면서도 설마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시랴 하는 영적 착각과 교만에 빠져 있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런 저들에게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한 것이다.
 
먹고 마시는 모든 생활 중에 우상을 멀리하고 진심으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하였다. 매사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남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처신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에 본을 보이자고 하였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와 같은 모습을 교훈 삼고 본보기를 삼아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답게 깨우침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라면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난날의 사건과 교훈을 본 보기로 삼아서 매사에 하나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삶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유명한 교훈의 말씀이 바로 여기 고린도 전서 10장에 나온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So, if you think you are standing firm, be careful that you don't fall! )
 
(고전10:12) 그리고 이어서 교훈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조건과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항상 성도되고 자녀 된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면서 겪는 각양 시험을 이길 만한 믿음과 지혜와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시험을 피할 길도 예비해 주시고 능히 넉넉히 감당하게 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 본받기.
사람은 그 먹고 마시는 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 적잖게 영향을 미친다. 국민 배우이며 연세가 든 아버지 역할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배우, 최불암 씨에 대한 대담 기사가 주말 일간지 양면 기사로 실렸다. 과거에 자신이 금연 프로그램을 잘 진행하고 그 후에 어디선가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 한 시민이 “TV 앞에서는 금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잘 진행한 분이 담배를 피우면 어찌하나”하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그 순간부터 당장 담배를 끊은 후로 다시는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살아 왔노라고 하였다.
 
고린도 전서 10장의 14절 이하에 실린 짧지 않는 교훈의 말씀 내용은 바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6-17)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이며 신앙생활에 도전이 되는 말씀인가. 옳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떡과 피된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해 주신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가 어찌 우상의 제물을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제물용 고기가 아니면 고기를 구하기 힘들 정도의 우상 숭배가 몹시 심한 도시였다. 물론 고기를 그냥 단순히 고기라고 여기고 먹을 수 있으면 문제가 없겠으나 혹시 어느 누구라도 왜 우상의 제단에 올려 졌던 고기를 먹느냐고 마음 상해하는 이가 있다면 삼가라고 하였다. 상대방의 양심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차라리 먹지 말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그런 문화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교훈하는 말씀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이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행동강령이요 행동 수칙이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사에,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실천하며 그 누군가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라면,
 
부모 공경을 어떻게 할까.
주변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대할까.
주변의 가정을 어떻게 여기며 살까.
주변 사람들의 소유나 재산을 어떻게 대할까.
주변 사람들의 인격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때에 주신 십계명 중에서 제 5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부터 시작하여 “살인 금지, 간음 금지, 도적질 금지, 남의 인격 모독 금지, 남의 소유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등을 계명으로 정하셔서 실천하며 살도록 강조하시는 그 바탕은 무엇인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기초한 명령이 아닌가.
 
요즘 각종 민망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가슴 아프게 하고 당혹스럽게 하고 마음 무겁게 하는 별의 별 사고와 사건 소식 들 중에서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연루된 사건 소식이 교훈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건이 아닌가.
 
남들처럼 크게, 대단하게 성공하거나 출세하지 못하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만은 가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신자다운,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을 사도 바울은 소극적으로는 32절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하였고 적극적으로는 33절에서,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하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다. 그것이야 말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엊그제 연신내 사거리의 서점에 들렀다가 어느 책 한 권을 읽었다. 서서 몇 십 페이지를 읽었다. 그 책 중에 이런 실화가 실려 있었다. 한 젊은이가 치매로 고생하는 홀어머니를 노인 요양 병원에 모시고는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병원으로 퇴근해서 어머니를 간병하며 밤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정신이 들락날락 하시는 어머니가 하루는 침대 곁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서 아들에게 건네주면서 ‘김밥을 만들었으니 먹으라’고 건네시는 것이었다. 아들은 당황해 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고 그 휴지 말이를 받아 들고 먹는 시늉을 하면서 “엄마, 참 맛있네요. 맛있게 만드셨네요.”하고 응수하였다. 어느 날은 병원 복도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운동을 시켜 드리는데 걸으시다 말고 주루룩 환자복 바지 자락에 실례를 하셨다. 아들은 전혀 당황해 하지 않고 “엄마 참 시원하시겠네”하며 현장을 수습하고는 방으로 모시고 와서 목욕하시도록 돕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도록 도와 드렸다. 얼마가 지나고 요즘처럼 구정이 가까워 오자. 퇴근길에 잠시 집에 둘러서 어머니의 한복을 챙겨서 곱게 다리미질 해가지고는 병실의 어머니 침대 머리맡에 고이 개켜 놓았다. 구정 전날이 되자 간병인 두 분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수고비를 더 드리고 어머니를 깨끗하게 목욕 시켜 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구정 전날 밤에 어머니의 침대 곁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내일은 한 복 입으시고 병실에서 제 세배 받으셔야지요. 어서 건강해 지셔서 내년 구정 때에는 집에서 지내 실 수 있기를 바래요.”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의 침대 곁 바닥 간이침대에서 아들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구정 날 아침이 밝았다. 일찍이 일어난 아들이 아침을 맞은 어머니에게 아침 문안을 하려고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그 새벽 시간에 고이 잠이 들어 계셨다. 어머니는 그날, 그해의 그 구정 날 아침에 잠을 주무시듯 편안하게 돌아 가셨던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란 무슨 십자가를 진다든지, 순교한다든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다든지 그런 거창한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일상생활 중에서 나의 사랑하는 가족, 나의 사랑하는 이웃, 나의 직장과 일터에서 그리고 내가 섬기는 교회 생활 중에서 만나는 수많은 주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답게 생각하고, 성도답게 말하고, 성도다운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성도다운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처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5)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영화’라는 표현은 모두가 ‘영광’이란 단어이다. 즉 예수님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고 언제나 아버지하나님 안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기도하며 사셨다. 
 

모든 사람을 구원 받게 하려는 구령열 본 받기.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몰랐을 때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였으나 다메섹의 변화 체험 이후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믿음의 사람다운 길을 걸어갔다. 사도 바울은 동족들인 유대인들에게나 이방 사람들인 헬라인들에게나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거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 대하여 기쁨이 될 만한 삶을 살아가려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살아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만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한 가지  목적이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기도 생활에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가는 곳곳마다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진하였다.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핍박과 그 어떤 고난도 감수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역 전도 현장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 한 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쳐 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주인에게 붙잡혔고 그는 바울과 실라는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바울과 실라는 몹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야 했다. 그런 그 밤 중에도 고통 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며  지냈다. 그런 옥 중에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옥터에 지진을 일으키셨고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방에 채웠던 차꼬가 풀려 나가게 하셨다. 이 일로 오히려 그 감옥의 간수와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선포되고 전해지는 복음의 말씀 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수많은 병자들과 약한 자들이 고침을 받고 나음을 받고 깨끗함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사도 바울의 그런 소원을 하나님은 들어 주셨고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는 주님의 은총과 기적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선교의 사명 완수를 위하여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통하여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일터에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낳고 천국의 복음이 나를 통하여 그 누군가에게 전파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으며 살기를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편지 하였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믿는 자의 삶의 선언인가. 오늘 날 어느 누가 감히 이렇게 외칠 수 있겠는가. 자칫 잘 못 말하다가는 “너나 잘하세요.”하고 핀잔을 듣지는 않을까.
빌립보서 3장 17절을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빌립보 교회 주변에는 형편없이 실망스럽게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할 정도로 엄하게 경고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개들이란 어떤 자들일까. 육신의 방종한 탐욕에 빠져서 육체의 욕망대로 함부로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빌립보서 3장 18절 이하에 보면, 땅의 일을 생각하며 멸망의 길을 알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배의 욕망을 신처럼 섬기며 그 영광을 부끄러움으로 대신하는 불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생활하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사도 바울은 말씀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그렇다. 시내에 다니다 보면 외교관들이 타는 차는 번호 판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국기를 자동차 운전석 맞은편 앞부분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닌다. “너 내가 누군 줄 알아”하고 망동을 부린 청와대 비서관처럼 행동하면 안된다. 술 먹고 택시 기사에게 행패를 부리는 그런 싸구려 언동(言動)을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 시민권자’ 답지 못하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항상 입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늘 홀로  한 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일일이 다 고쳐 주셨다. 귀신에 들린 불쌍한 영혼들을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심으로 새 사람 되어 살도록 회복 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 지났고 장례가 끝난 나사로라도 불쌍히 여기셨고 살려 주셨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온갖 요구를 해결 하여 주셨다. 그리고 천국 백성의 구원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 바울은 깨달아 알았다.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섬겨 나갔다. 그런 사도 바울이 편지에서 진심을 고백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가 바로 그런 그의 삶을 후대에 전하는 책이 아닌가. 1447년경에 초판이 출간 된 그 책은 성경 다음으로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평가된다. 그 책은 감리교를 탄생 시킨 영국의 잔 웨슬리나 잔 뉴톤 같은 이들의 회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물론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잔 번연의 <천로역정> 같은 책이 차지하는 기독교 역사의 비중이 결코 약하지 않지만 말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네델란드에서 태어났고 독일에서 평생토록 70여 년간을 수도원 중심의 생활을 하면서  설교와 저술과 필사(筆寫)에 전념하면서 92년을 살면서 후세들을 양육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고 어머니는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 이미 12살 때에 신앙 공동체에 들어가서 신앙 훈련을 철저히 받았다. 그는 청빈(淸貧)하고 순결(純潔)하고 순종(順從)하는 삶을 강조하는 수도원 신앙이 몸에 배어 있는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실천과 강조는 분명하였다.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영성 생활의 진보를 위하여 잡담을 피하고 지나치게 남들과 너무 오랜 교제의 시간을 갖지 않으며 스스로 삼가고 침묵과 묵상의 시간을 즐겨 하며, 시련과 고통과 고난을 잘 참고 견디고 극복하며, 성찬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나날을 살아가라”
 
고 가르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그런 삶의 모범을 보이며 살아갔다.
 
올해도 며칠 후면 맞이할 성회 수요일과 사순절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다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사모하는 기도자와 복음 전파자의 나날이 되기를 소망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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