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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성경과 신앙(딤후3:14-17) 201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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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2-16 16:03 조회 19,427 댓글 0
 
성경과 신앙(딤후3:14-17)          2014. 12. 14
 

우리가 어렸을 적에 ‘동아 수련장’이란 것이 있었다. 요즘처럼 학원이나 과외 혜택이 전혀 없던 시골 학교 학생들에게 교과서 이외에 그 ‘수련장’이란 것은 특별한 혜택을 받게 하는 참고서였다. 그 수련장의 뒤 겉표지에는 나폴레옹(Napoleon I, 1769-1821)이 잘 생긴 말을 타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멋진 모자와 장군의 복장을 하고 알프스를 넘는 그림과 함께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There is no such word as ‘impossible’ in my dictionary.)
 
는 문구가 한글과 영어로 써 있었다. 나폴레옹은 19세기 초의 프랑스를 유럽 전역의 막강한 제국으로 자리 잡게 하였던 전략가요 정치가였다. 그는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하게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였다. 30대 후반 때에 이미 유럽의 절반을 점령해 나갔던 전쟁의 영웅이요 당시 프랑스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다던 그도 1812년, 러시아 침공을 시도하며 모스크바를 향하여 싸워 나가다가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맞았고 결국은 6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1814년 3월, 영국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군대에 파리를 빼앗긴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나폴레옹의 군대는 다음 해인 1815년 3월에 다시 파리를 재탈환하고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의 교만은 하늘로 치 솟았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에서 황제 등극식을 할 때에 자기 위의 권력이란 없다는 상징으로 스스로 황제의 관을 제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나 세 달 뒤인 그 해 6월 18일, 워털루 해전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되는 것으로 나폴레옹의 명성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대단한 위세와 권력도 11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맞지 않나. 그는 나중에,

“나는 칼로 세계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세계를 다스리신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 나폴레옹은 한 시대 프랑스인들에게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었으나 주변국들에게는 엄청난 아픔과 슬픔과 피해와 손해를 끼친 침략군의 우두머리였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이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의 프랑스는 그가 혁명을 일으킬 당시의 국토 면적보다 오히려 더 작아지고 말았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분야에서 살아가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살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이다. 요즘 나라 안과 밖에 위협과 훼방이 심각해 져가는 이단이나 사이비의 문제는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진리의 왜곡 때문이다. 성서 주일의 말씀 묵상 본문인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두 번째 편지이다. 디모데는 그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사도행전 16장 1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디모데 전후서는 디모데 개인을 향하여 편지한 목회서신으로 구별되는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서 유명한 분량이다. 디모데 후서 1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한다”고 하였고 2장 1절에서는 “내 아들아”라고 하였다. 3장 1절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는 말씀으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 대하여 얼마나 영적 교감과 친분을 두텁게 가지고 이 편지를 썼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치와 그 소중함에 대하여 디모데를 깨우치는 유명한 교훈이 담겨 있는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강조하나를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하는 성경.
신앙생활은 어려서 시작하면 할수록 좋다. 그렇다고 난 이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하였는데 하고 실망할 이유는 없다. 언제나 ‘지금’이란 시간이 각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빠르고 가장 좋은 기회의 시간이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 그의 외할머니와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16장 1절에 보면,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라고 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기독교화 되는 것이다. 물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체험하는 순간을 경험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냥 모태신자라고 해서 다는 아니지 않나. 복음이 의심의 여지없이 믿어지고 받아 들여 지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행복이고 축복인가. 뿐만 아니라 복음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평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데이빗 왓슨은 <제자도>라는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에게는 반쪽, 반 만큼이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그의 숭고한 권위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어머니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영접하고 고백하고 결단하는 영적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이 사역하고 디모데가 사역하던 당시에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악평하고 거짓 선전하는 이들 중의 대표였다. 디모데 후서 2장 17절에 보면 저들의 영적 부패와 타락의 심각성을 사도 바울은 ‘악성 종양’이 퍼져 나가는 것과 같은 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옛 성경에서는 이것을 ‘독한 창질’이라고 하였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암’이라고 번역하였다. 저들의 심각성은 디모데 후서 2장 18절의 지적처럼‘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자들이었다.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이었다. 저들 두 사람의 이름 중에 ‘후메내오’의  이름이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알렉산더’와 함께 이미 언급되고 또 다시 거론된 것을 보면 그 ‘후메네오’란 자의 영적 타락이 심각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저들의 영적 부패의 심각성을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자들이며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들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잘 자리 잡으려면 어려서부터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청소년기 때에도 좋고 청년기 때에도 좋고 장년기의 그 어느 때라도 좋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입체적으로 제대로 깨달아 알고 믿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라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분부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의 신앙을 칭찬하고 인정해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매우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명기 6장 7-9절에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명령하셨다. 신명기 4장 10절에 보면,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는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않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하라는 명령이시다. 출애굽기 10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 때에 애굽에 내렸던 재앙의 이야기들을 아들들과 자손들에게 반드시 해 주라고 명령하셨다. 성경 이야기와 성경 말씀을 어린 자녀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듣게 하고 읽게 하고 알게 하라는 명령이시다. 출애굽기 13장 14절 이하에도 보면 후일에 자손들이 유월절과 출애굽에 관한 내용을 묻거든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라고 명령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런 역사적인 내용들을 가죽 띠에 새겨서 손목에 찾고 미간에 붙이라고 하셨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는 교훈을 하신 것이다.
아들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제가 잘나서 공부하고 제가 잘 나서 건강하고 제가 잘나서 똑똑하고 제가 잘 나서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미술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어려서 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도록 가르치라는 강조이다.
이사야 38장 19절에도 보면 질병으로 고생하던 히스기야 임금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치료 받은 후에 드린 기도 가운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알게 하리이다.”고 맹세하는 고백을 보게 된다. 이사야는 한 뭉치의 무화과를 가져다가 임금 히스기야의 종처에 붙이라고 명하여고 하나님이 치유의 은총이 히스기야 왕에게 임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 와 주신다. 그러므로 어른이든 젊은이이든 어린아이이든 그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축복의 시작이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국교회의 목사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도 매우 어려서부터 목사관에서 그 어머니 수산나 사모님으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명 중에서 살아남은 세 아들과 일곱 명의 딸들을 어려서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육시켰다. 요한 웨슬리는 할아버지도 목사님이요 외할아버지도 목사님이었다. 아버지도 목사여 큰 형도 목사였다. 요한 웨슬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목사의 아들 딸로 성장하여 목회자 부부가 되었고 아들딸들을 철저한 성경의 사람으로 양육시켜 나갔다. 우리가 어떻게 누구나 다 목사가 되고 목사의 아내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은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나 자신이 성경 말씀 안에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아들딸과 후손들을 성경의 사람으로 키워 내느냐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한 권의 책이 사람이 되겠다.”
(HOMO UNIUS LIBRI)
(Let me be a man of one Book)
 
요한 웨슬리는 그 자신이 2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그러나 그런 그는 늘 자신은 한 권의 책 즉 성경의 사람임을 자처하였다. 그는 50년 동안 날마다 말을 타고 다니면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한 거리는 지구를 10바퀴 돌 정도의 거리였다. 그는 88살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 까지 60년을 한 결 같이 새벽 4심녀 일어나서 기도하였다. 50살이 넘어서도 날마다 32km의 평균 거리를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지붕이 없는 하늘 아래서 복음을 외치며 다닌 노방 전도자의 대표였다.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만든 찬송가 525곡을 두꺼운 찬송가책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가 쓰던 용품들은 포크와 숟가락 두벌과 주전자 하나와 낡은 코트 한 벌 뿐이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아들과 같은 특별한 존재였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 보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부럽기까지 한 특별한 만남이요 특별한 은총이요 특별한 축복이었다. 디모데를 디모데 되게 한 힘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과 어머니 유니게의 영향이 물론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 받는 종이었다. 디모데는 나중에 에베소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성도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섬기고 따르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없으면 바람이 빠진 풍선과 같은 것이다. 15절의 ‘믿음’,‘구원’,‘지혜’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어지는 신앙의 근본이며 믿음의 바탕이 되는 덕목들이다. 구약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룩하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갔다. 배고픈 무리들이 배 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주어졌다. 바람과 파도와 풍랑이 잔잔해졌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아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12살 난 외동딸이 살아났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장례가 끝난 무덤 속의 나사로가 베로 동인체로 걸어 나왔다. 예수님은 그가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믿음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제자 도마에게 주님은 분명하게 교훈해 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 때에 도마가 대답하였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러면 믿음과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로마서 10장 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감옥에서 설교한 유명한 설교를 우리는 기억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이 말씀은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옥 터가 흔들리던 그 밤에 간수가 스스로 자결하려 하며 죄수인 바울과 실라가 도망나간 줄 알고 무서워 떨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소리쳐 말하자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와서 엎드리며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이리이까”하는 질문 앞에 선포한 구원 초청의 말씀이다.
요한 웨슬리는 1703년에 영국 웹옷이란 곳의 목자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될 정도의 석학이었다. 1735년, 32살 때에 동생 찰스 웨슬리와 미국의 사바나 조지아 주로 선교를 떠났다. 그러나 2년 만에 아무 열매도 없이 실의에 찬 모습으로 영국으로 되  돌아가야 했다. 그 돌아가던 배 안에서 만난 모라비안 교도들의 성령 충만하여 기도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의 모습을 보고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크고 무서운 풍랑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었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불안에 떨지 않으며 침착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에서 큰 도전과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 그를 완전히 변화 시킨 것은 그의 나이 35살이던 1738년 5월 24일 밤이었다. 런던의 올더스케잇에서의 수요 기도회 시간에 경험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은 훗날 88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그에게 식지 않는 열정과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가는 곳곳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였다. 이는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야하는 사명 앞에서는 목회자와 성도의 구분이 없다. 성경은 신구약 곳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교훈하고 안내하는 구원의 안내서와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지혜로 쓴 지혜의 책의 수준이나 시나 소설이나 허구가 아니다. 신구약의 66권의 모든 성경은 인간의 견해나 지식이나 주장이나 철학이나 풍습이나 속담이나 문화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그 어느 누구에게나 똑 같이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하나님이 감동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훈(敎訓, teaching)이 된다.
그렇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에 견주어서 올바른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힘이 있다. 교훈을 영어 성경에 보면 ‘teaching'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가르침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성경은 타락하고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선과 악, 의와 불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선과 의와 진실을 추구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 주는 권능의 말씀이 담겨진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진리의 말씀이 담긴 책이다.
성경은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삼손, 드보라, 다윗, 솔로몬, 이사야, 엘리야와 엘리사, 학개, 미가, 요나, 하박국, 말리기와 같은 인물들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나.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 곁의 마리아나 마르다나 막달라 마리아나 나사로의 이야기나 여리고 성의 삭개오 이야기나 니고데모의 교훈이나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예수님 장례 지낸 교훈등을 비롯해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디모데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일화와 예수님의 아우들이었던 야고보와 유다서의 기록자인 유다와 같은 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교훈의 말씀을 풍성하게 말씀하시나.
 
책망(責望, rebuking)이 된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교훈의 말씀을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책망의 말씀도 담겨 있다. 책망의 목적은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 사람이 되어 살라는 주님의 훈계요 채찍질이다. 성경은 에덴에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이야기, 아브라함이나 아들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이야기, 롯의 두 딸들이 이야기, 야곱의 장남 루으벤이 아버지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한 이야기,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 깎으러 나간 현장에서 변장한 며느리 다말과 동침한 이야기, 야곱의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이야기, 에서가 부모의 교훈을 벗어나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살아가던 이야기,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요셉을 주인 마님이 유혹하던 이야기나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이야기,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던 이야기, 모세가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딱딱 친 사건의 이야기나 다윗이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사건 등등 얼마나 많은 무궁무진한 교훈의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이 담긴 사건의 교훈을 깨달아 알게 하는가.
 
바르게(correcting) 한다.
그렇다. 성경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부끄러운 사건이나 죄 된 사건이나 민망한 사건이나 상식적이지 않은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을 바르게 이끌어 가시는 말씀의 능력이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잠언 31장 분량의 말씀을 정독하여 읽고 묵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진리의 말씀들이 우리의 굽은 생각과 마음을 바르게 해 주는 은혜가 임하는가 말이다. 광화문통에 가면 종로 방향의 대형 서점(교보문고)의 입구에 옆으로 길게 눕힌 돌비 위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그렇다. 이 세상의 좋은 책 즉, 양서(良書)가 인간에게 유익을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을 죄와 악을 벗어나서 바르게 되도록 인간을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영원히 새로운 전인격의 변화를 덧입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의 말씀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다. 성경은 죄를 용서 받게 하고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허물이 가리어져서 새로운 인격자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간을 개조하는 능력의 책이다. 이 세상의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비롯하여 중국의 공자, 맹자, 장자, 노자 등의 유명한 인물들의 가르침과 교훈이 적지 않지만 그 모든 교훈 중의 으뜸은 성경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성경인 인간이 종이로 책을 만들기 시작한 후에 가장 많이 팔린 책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을 바르게 하는 능력의 말씀이 담긴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training in righteousness).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의롭게 하는 길을 열어 놓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시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절기를 기념하는 때이다. 16절을 공동 번역으로 읽으면 본문이 더욱 명확하다.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은 ‘훈련’이란 내용이 크게 담긴 말씀이다. 헬라어의 ‘παιδεια’(파이데이아)는 어린이를 뜻하는 ‘παις’(파이스)에서 유래된 말인데 ‘종이나 자녀나 어린이’를 훈계하고 훈련하고 나무라고 가르치고 징계하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는 말씀이다. 그렇다. 성경은 의(義)가 무엇인지를 훈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한쪽 귀로 듣고 설교를 음악 감상하듯 하고 평가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훈련되고 변화되고 제자가 되고 달라지고 성숙해져 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일꾼들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해 준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강조는 ‘하나님의 사람’이며‘선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은 세상을 막 살면 안 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지난여름쯤에 주일 오후에 한 달 내내 주제 있는 묵상을 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부, 이 땅의 소금, 세상의 빛,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차례대로 묵상한 바가 있다. 그렇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빛과 소금과 편지와 향기와 같은 삶을 복합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갖출 뿐만 아니라 그런 자격을 갖추고 그런 준비를 항상 하면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한다.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6. 25 전쟁 중에 그림을 그릴 종이를 구하지 못해서 미군들이 피우고 버린 담배곽의 은박지를 펼쳐서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궁여지책으로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는 뾰족한 못 끝이나 송곳으로 은박지에 꾹꾹 눌러서 그리고 싶은 것들을 형상화하는 독특한 미술 기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과 같은 작품은 뛰어나지 않나. 부산, 통영, 제주도, 대구, 서울을 오가며 가난하게 노동하여 번 돈으로 그림을 그렸다. 6.25 전쟁 중에 일본인 아내도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955년에 미도파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가난했고 병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41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신 분열 증세와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중에 친구들이 찾아가서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밀린 병원비를 청산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치루었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빈센트 반 고호의 미술 세계가 그러하였듯이 화가 이중섭은 천재적인 작품들을 남겼으나 그의 삶을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힘겨웠다. 그런 그도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다. 1931년, 15살에 다니기 시작한 오산학교에서 만난 미술 교사 임용련으로 부터 미술학도의 꿈이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게나 물고기는 6. 25 때에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에 머물 당시에 너무 배가 고프고 가난하고 어려워서 바닷가에서 작은 꽃게들을 잡아다가 끓여 먹고 물고기를 잡아다가 먹고 하던 시절을 그림 속에 어린이를 등장시켜 작품화 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공부한 적이 있는 오산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 받은 남강 이승훈이 1907년에  애국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평북 정주에서 시작한 기독교 학교이다. 3년 후에 춘원 이광수가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6. 25 때에는 부산 피난지에서 오산 학교의 교육이 계속 되었고 전쟁 후에는 서울 용산구 보광동 언덕에 ‘오산고등학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와 기독교학교와 기독교병원과 기독교복지 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다. 특별히 교회가 소중하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구원 받은 성도요 성탄의 참 기쁨과 의미를 깨달아 알고 믿으며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하는 성도가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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